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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며칠 전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우연치않게 당신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언제 시간 되시면 차 한 잔 했으면 합니다. - S. N."
짧은 내용과 함께 영어 이니셜 서명이 있었고,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영어 이니셜로는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물론 짧은 내용 속에서 뭔가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단지, 약도로 봐서는 집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라는 점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 만나자는 약속도 없고, 약도가 그려진 곳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 말고는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이틀 동안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가 재미삼아서 한 번 찾아가보리고 했다.
남는 것이 시간이라서 시간 여유도 있었고, 바람도 쐴 겸 찾아가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겠다 싶기도 했다.
또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반짝 추귀가 지나고 다시 화창한 가을날씨가 완연해진 어제 지도를 들고 약속 장소를 찾았다.
집을 나와서 산쪽으로 1시간 정도 올라갔더니 산간 마을도 벋어난 곳에 작은 이정표가 하나 나타났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갔더니 흙과 돌로 지어진 작은 방갈로 같은 것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까 누가 나와서 어떻게 왔냐고 물었고, 얼떨떨한 나는 편지를 보여줬다.
내 편지를 펼쳐본 그 사람은 나를 3번 방갈로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었더니 왠 외국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앉아있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안내하는대로 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히 목인사를 했다.
엄청 늙어보이는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어서오세요. 어렵지 않게 찾아오셨나요?"
나는 계속 어리둥정할 채 그들 앞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보다는 조금 덜 늙어보이는 할머니가 잔을 내밀면서 얘기를 했다.
"이 차 한 잔 드세요. 스콧이 직접 만든 차랍니다."
권해주는 차를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내 입에는 그저 그런 녹차맛이었다.
"얼떨떨한가 본데. 인사부터 하지요. 저는 스콧 니어링이라고 하고, 이 분은 케테 콜비츠의 며느리입니다."
띵~.
이건 왠 황당한 시츄에이션!
그러고보니 할아버지 얼굴이 어디서 본듯했다 싶었는데, 책에서 봤던 스콧 니어링 얼굴이었다.
케테 콜비츠의 며느리라는 분은 처음보는 얼굴이어서 생경했다.
"저희 어머님이 오셨어야 했는데, 오늘 일정이 겹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는 것에 대해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라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일단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서 그 분들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블로그에 올리시는 글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글을 참 잘 쓰시더군요."
스콧 니어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말했고, 케테 콜비츠의 며느리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자신의 삶과 그림에도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다는 얘기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들이었다고도 전해달래요."
계속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술을 좋아하시는 줄은 알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차로 대접을 하게 됐습니다. 괜찮으신지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예라고 짧게 대답했다.
"당신의 글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한 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스콧 니어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혼자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이가 많아서 톤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말에 힘이 느껴졌고, 눈빛은 더없이 온화해보였다.
정말 스콧 니어링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글들을 보면 당신이 전환기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모든 걸 시작하세요. 새로 시작하세요.
막 다시 태어난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잊어버리세요.
새로운 곳으로 가세요.
일을 얻으세요.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적성에 잘 맞고 만족스러운 일을요.
규칙을 세우고 꾸준히 그 일을 하세요.
그러며 당신은 자신감을 얻고 당신 자신과 당신이 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겁니다.
어쩌면 당신은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당신 자신의 골칫거리를 잊게 해줄 겁니다.
당신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여서 흐느끼고 자책하며 자기 연민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에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해 능력을 발휘해보십시오.
사랑과 원기, 조화로운 생활을 빕니다."
약간 건조한 톤으로 설교하는 듯한 얘기이기는 했지만,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얘기들이어서 조용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제 부인 헬렌을 아시겠지요. 저녁이 되면 헬렌이 좋은 글들을 읽어주곤 했는데, 이 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 순회목사였던 존 웨슬리가 1750년에 씉 시구입니다."
스콧 니어링이라고 자처한 사람이 내민 종이를 들여다 봤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때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단순한 시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고맙습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말에 댓구를 하자 그가 웃어보였다.
이어 케테 콜비츠의 며느리고 자처한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어머님은 1차 대전에 참전한 큰 아들을 잃은 이후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살아오셨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자신과 민중들의 고통을 함께 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나치 정권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일을 떠나지 않고 소신을 지키셨지요.
그분이 죽음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어느날 저와 제 남편에게 하신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지긋이 눈을 감더니 말을 이었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를 마시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얘기를 해야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의 얘기 잘 새기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아직도 제 자신과 해야될 얘기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얘기를 유심히 듣던 스콧 니어링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때려는 순간 누군가 내 뒤통수를 힘껏 내려쳤다.
나는 순간 눈 앞에 별이 보일 정도로 얼얼했고, 내 앞에 앉아 있던 두 분이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뒤를 돌아봤더니 머리에 있어야 할 뿔이 잘린 사슴 한 마리가 짝다리를 집고 서있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녹용이었다.
이 녀석이 어디서 술을 거나하게 먹었는지 코도 빨갛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녹용이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술 냄새나는 입을 열었다.
"야, 세상 고민 혼자 다 뒤집어 쓰고 있냐? 듣자 듣자 하니까 짜증나서 들을수가 있어야지? 누가 먹물이니랄까 봐서..."
이어 녹용이는 스콧 니어링이라고 자처한 분을 쳐다봤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꽤 사셨나본데, 그 만큼 살았으면 나이 어린 사람이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따끔하게 얘기를 해야될거 아니예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그분은 녹용이가 다가올까봐 뒤로 물러서면서 조금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아니, 아니... 나도 그런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나이도 새파란 게 인생 다 산것처럼 얘기하지 말라고... 나도 정신 차리라고 하려고 했어요."
그 분은 황급히 방을 나가버렸고, 이번에는 녹용이의 눈이 케테 콜비츠의 며느리를 자처하는 분을 향했다.
"판화쟁이 할머니도 마찬가지예요. 영감님이 죽이 맞아서 이 놈한테 바람이나 불어넣고 말이야..."
더욱 당황한 그분은 말까지 더듬었다.
"저는... 판화가 아닙니다. 제 어머님이... 판화가 입니다. 그리고... 저는... 심부름 왔습니다."
"아까까지는 한국말 잘 하더니만 갑자기 왠 외국인 말씨야!"
술 취한 녹용이의 고함에 놀라 그 분도 황급히 방을 나가버렸다.
탁자 위에 걸터앉은 녹용이가 나를 보기 위해 돌아서려는 순간 나도 도망가야겠다 싶어서 방을 나와버렸다.
뒤에서 녹용이는 "풀만 먹고 제대로 살 수 있어?" "예술이 밥 먹여주냐?" "먹물들하고는..." 등등의 얘기를 혼자서 떠들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곳을 나와 돌담을 돌아서려니까 케테 콜비츠의 며느리라고 자처했던 할머니가 나무 뒤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혹시 그 사슴 아는 사슴인가요?"
"잘 아는 건 아니고요. 저도 두 번 만났을 뿐입니다. 저 녀석 지금 술에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닌가본데, 나중에 술 깨고 나면 엄청 후회할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때 녹용이의 술취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분이 황급히 내 손에 쪽지를 쥐어줬다.
"스콧이 이 쪽지를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황급히 돌아가버렸다.
쪽지에는 급하게 휘갈겨 쓴 필체로 몇 줄의 글이 쓰여져 있었다.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미안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일이 곧 내 삶이었고,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습니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습니다.
일과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입니다."
그때 녹용이가 돌담길을 돌아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산타 이 노친네는 어디 쳐박혀 있는거야?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 몫 땡기려면 지금부터 준지를 해야할거 아니야. 노친네 하고 일해 먹기도 힘드네..."
녹용이는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가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노나니.
좋다!"

 

 

* 녹용이가 누군지 궁금하신가요?
최규석이라는 만화가가 펴낸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만화에 나오는 놈입니다.
제목만 보고 무슨 환경이나 생태만화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습기가 많은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는 20대 젊은이들의 얘기를 재미있게 그린 만화입니다.
녹용이는 네 명이 우굴되는 반지하방에 얹혀서 사는 사슴입니다.
뻔뻔함과 비굴함과 자기합리화를 무기로 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이 녀석 머리에 있는 뿔은 술값이 모자라서 팔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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