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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주'를 보고

처음에는 "아니! 박찬욱이 한 해에 영화를 두 편이나 개봉한단말이야!"라고 했는데...
나중에 인터넷으로 자세히 살펴보니까 '박찬욱'이 아니라 '박찬옥'이었다.
'박찬옥이 누구야?'하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몇 년 전에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라네...
그떄 그 영화 보고 지루하다는 느낌 말고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었는데...
그래도 감독이 신선한 감독이고, 소개되는 내용과 분위기가 뭔가 있어보이기도 해서...
약간 기대를 갖고 영화를 보러갔다.

감독의 인내력과 내 인내력을 시험하다보니까 두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영화였다.

첫번째 인내력, 자세한 설명이나 심오한 의미를 기대하지 말고 그냥 감독이 주절거리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두번째 인내력, 그냥 따라가면서도 감독은 시종일관 진지하기 때문에 그 진지함도 참아야 한다.
세번째 인내력, 엉성한 연기와 구성, 촬영 등을 탓하지 말고 그저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면서 감독을 따라가기만 해야 한다.
네번째 인내력,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장면들이 계속 나오더라도 '그런 것 쯤이야'하면서 계속 따라가야 한다.
다섯번째 인내력, 감독의 의도와 결말에 대해서도 '그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라는 생각만 하고 영화관을 나와야 한다.

이런 인내력이 없으면 이 영화를 절대로 끝까지 볼 수 없다.

감독은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상을 만들었다.
그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하는 일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오른손에는 세상의 불합리를, 왼손에는 자신의 죄책감을 쥐고 있는 고뇌하는 남성 지식인이 세상의 중심에 서있다.
그리고 그를 숨겨주면서 불륜의 죄를 저지르는 첫사랑 여자, 그가 첫 눈에 반했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부인, 그에게 연민과 애정을 동시에 갖게 했던 사랑하는 처제가 그를 중심으로 삼각형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악세사리로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악마의 역할을 위해 개발업자와 깡패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하면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너무나 철저히 감독의 지시를 따른 그들은
대상을 외워서 하는 것이 너무 티가 났고,
감독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났고,
감정과 이성이 없는 꼭두각시 인형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주인공의 고뇌를 드러내고 감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심각한 고민은 모두 주인공이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 고민을 알려고 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고민을 알려고 노력했던 유일한 존재인 여자주인공의 노력은 남자주인공의 고민만을 키워갈 뿐이었다.
오직 신만이 그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남자주인공은 개척교회 목사였던 선배에게만 그 고민을 살며시 얘기할 뿐이다.
고뇌하는 지식인의 위대함이여!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이 제대로 피워나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끊임없이 아파하면서 발버둥친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욕구와 욕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처만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안타깝고, 슬프다.
그런데 그 안타까움과 슬픔은 감독만의 몫이었다.
감독은 서울 외곽의 파주라는 지역을 통해 개발과 소외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고
현실의 갈등과 함께 내면의 갈등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또다란 심오함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 속의 파주는 실제 파주가 아니었다.
영화 속 파주로 가는 길은 왠지 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공간은 8년의 시간동안 어떤 변화도 읽어낼 수 없다.
남자주인공을 제외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에 세워져 있는 망루는 너무 허약해보이고,
망루에서 싸우고 있는 철거민들의 모습은 가벼워보이고,
망루를 공격하는 깡패들의 모습은 우수워보인다.
하지만 그런 허약함과 가벼움과 우수음 속에서도 남녀주인공은 심각하다.
그 심각함이 간혹 지나치면 '영웅본색'처럼 주인공들이 폼을 잡고 얘기할 때는 철거싸움도 멈추고, 돌들도 빗나간다.

감독은 분명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도 가장 소외된 이들의 현실 속에서!
그런데 그 현실은 너무도 많이 단절돼 있어서 실제 현실의 껍데기만을 보여주고 있었고
소외된 사람들은 너무 소외되 있어서 영혼마저도 없었다.
고뇌하는 지식인을 위해 치열한 현실과 소외받는 사람들은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안타까운 주인공들의 사랑이 가슴 아픈 상처로 남으면 울림을 주었지만,
소외받은 사람들은 더 소외된 채 버려지는 잔임함을 남겨주었다.
자신의 자의식에 짖눌린 감독은 자신의 초월적 세계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처참하게 버려졌다.
용산철거민들이 이 영화를 봤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박찬옥의 강한 자의식은 임순례의 자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임순례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자의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순례는 신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을 중심으로 나왔다가 사라지는 모든 사람들은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발버둥치면서 현실에 적응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과 맞서싸웠다.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동등한 현실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힘겨움과 상처가 있지만 꿈과 사랑도 있었다.
'힘들지만 살아남아야 했고, 살아가야 했던' 임순례의 자의식은 무겁지 않았다.
하지만 박찬옥의 자의식은 너무 무거웠다.
왜냐하면 박찬옥이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연출력이라고 생각한다.
일목요연하게 얘기를 풀어가지 않으면서도 어지럽지 않게 흐름을 집어낼 수 있는 연출능력이 있었다.
절제된 대화와 절제된 감정들이 새로운 감수성으로 다가오면서 긴장력을 갖게 했다.
감독이 조그만 더 낮아졌더라면 괜찮을 영화였는데...

이런 영화들이 좀 더 낮은 자세로만 다시 만들어진다면 또 볼 것이기 때문에
8000원이 아깝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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