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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대화

며칠 전에 울산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수련회를 마치고 시간이 나서 연락을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울산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같이 먹고 제주시 쪽으로 나와서 술을 한 잔 했습니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울산 사람이 합류하면서 자리는 매우 흥겨웠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울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반가운 이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이름들을 거론하면서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술자리에서 이름을 거론하면서 얘기하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런 저런 문제들을 거론하면서 씹어대는 얘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지론이 ‘뒷다마 까지 말자’는 것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나도 같이 어울려서 열심히 뒷다마를 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그 사람을 놓고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정치적 입장이 약간은 다른 사람이었고, 그 자리의 한 사람과는 같은 조직에서 많이 부딪히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그 사람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게 되면서 약간의 논쟁이 일었습니다. 물론,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계속 이어가다가 내가 한 마디를 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뒷다마 까는 거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세 시간 동안 누구 누구는 뭐가 문제다라는 식으로 흉보는 얘기들만 계속 하고 있어서 좀 불편해요. 사람들의 장점을 생각하면서 좋은 얘기들을 하는 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랬더니 한 명이 대뜸 이러거든요.

“억압하지 마!”

순간 숨이 탁 막혀왔습니다.

물론 화도 났고요.

“뒷다마 까는 것이 불편해서 사람들의 긍정성을 보자고 얘기하는 것이 억압이라면,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하죠?”

그랬더니 그 사람은 울산에서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하고 싶은 얘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산다면서, 제주도에 내려왔을 때 그런 얘기들을 시원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숨이 막히고 화가 났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나는 뭐죠? 제주도에서 만만치 않게 외롭고 힘들게 살고 있는데...”

“너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외로워.”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을 즐겁게 해서 보내지 못했던 것도 그렇고, 어떤 큰 벽을 만난 답답함도 그렇고, 내 자신에 대한 자신 없음도 그렇고...

그래서 며칠 동안 내 자신과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A : 나랑 얘기 좀 할래?

B : 많이 심란한가 보구나?

A : 나 마구 쏟아내고 싶은데...

B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지. 편하게 얘기 해.

A : 운동권들은 자기 주장을 하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남의 얘기를 들을 줄 정말 몰라. 그날도 내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하는 것은 물으려 하지도 않았어. 물론, 한 사람은 내 메일을 보고 있어서 달랐지만... 나는 그들의 삶과 울산의 현재가 궁금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묻고 그랬던 거야. 그러면서 같이 사람들을 씹어댔던 거지. 그런데 내 얘기를 하자고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씹어대는 얘기 말고 좋은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억압이라는 거야.

B : 왜 억압이라고 느꼈는지에 대해서 얘기했잖아.

A : 물론, 그런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싫거든. 경치 좋은 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져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편한 얘기를 하고 싶겠지. 그것은 자연을 호흡하면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어야 하잖아? 하지만 그날 그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는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자연을 관광상품으로 소비하면서 쌓여있던 욕구를 배설하는 것이었어.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나는 그들의 자유로운 배설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얘기들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순간 배설 욕구를 막아버리는 억압으로 느꼈던 거야. 그리고 그들은 여자였고, 나는 남자였으니까 더 그렇게 느꼈던 거겠지.

B : 그랬을 수도 있겠지... 니 가슴에 쌓인 얘기 마음껏 들어보자.

A : 그리고 사람을 정파적으로 재단해서 얘기하는 것도 정말 싫거든. 내가 현대자동차 활동할 때 정말 많이 해왔던 방식이잖아. 누구는 어느 정파 사람이고 누구는 누구랑 친한 사람이고 하는 식으로 편을 가르고, 그 잣대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고, 그런 그들을 비판하면서 내 사상적 순수성과 활동의 올바름을 증명하고... 그런 활동의 결과 같은 정파 사람들과의 동질감은 높아지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관계는 축소되고, 영혼은 피폐해지잖아. 이제는 그런 것이 정말 싫어. 현실적으로 정파운동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실제에서는 긍정적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게 운동을 왜곡하고 영혼을 갉아먹는 방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B : 그렇지? 그렇다고 중요한 시점에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거나, 입장 차이들에 대해서 단결하자고만 얘기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고민스럽다.

A : 마지막에 제일 싫었던 게 뭔지 알아?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나를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같이 힘들고 외롭고 아파하는 사람으로 생각해달라는 뜻에서 ‘나는 뭐죠?’라고 반문했던 거거든. 그런데 ‘너만 외롭냐? 나도 외로워!’라고 대답하니까 정말 할 말이 없더라. 운동이라는 것이 대중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를 치유하는 것인데, 왜 운동권들은 사람들의 고통을 관찰하려고 하는 걸까? 몇 년 전에 근골격계투쟁을 할 때 대중들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하세요’라고 했거든. 그러면서 아픈데도 아프다고 얘기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했고, 아픈 사람들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면서 손을 맞잡을 수 있었고, 그래서 끝까지 투쟁할 수 있었던 거였어. 그때부터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대사가 내 마음에 중요하게 자리 잡았지. 그런데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거야. 참...

B : 그건 좀 그렇네...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해봐.

A : 휴~ 그만할란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더 심란해져.

B : 나도 심란하다.

A : 내가 잘났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는 것이 아니야. 그냥 서로 감싸주면서 즐겁게 얘기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B : 니 말은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어. 그런데, 니 마음 속에 ‘나는 잘났다’라는 생각이 정말 없을까? 예를 들면, 정파운동의 폐해를 극복한다든가, 대중의 고통을 함께 하는 자세라든가 하는 것은 훌륭하거든. 그런데 ‘나도 옛날에 그렇게 활동해왔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를 극복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A : 음...

B : ......

(그때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나왔다.)

C : 야, 너는 그동안 니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자신 있어? 니가 상처를 줘왔던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 앞에서 제대로 반성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

A : ......

B : ......

C : 나는 니가 거짓말 하고 있다거나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그런데 너의 잘못에 대해서 가끔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환기시켜주려는 거야.

B : 얘는 그 동안 그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해왔어. 그리고 그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금씩 노력하고 있잖아. 그런데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하겠니?

C : 좋은 게 좋은 것은 아니잖아. 누군가 해야 될 얘기는 해야겠지.

A : ......

B : ......

C :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괜히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었구나. 나는 들어갈게.

(그리고 다시 내 안으로 들어갔다.)

A : ......

B : 저 친구가 너무 힘든 얘기를 꺼냈구나.

A : 정말 할 말 없다. 무슨 말을 하겠니?

B : 울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A : 걱정 마. 안 울어. 이게 울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힘들지만 내가 풀어가야 하는 문제잖아.

B : 우리 하던 얘기 더 할 수 있겠니?

A : 그래. 조그만 더 생각해볼게.

B : ......

A : 정말 솔직하게 생각해봤거든. 너도 알겠지만 나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같이 노는 걸 좋아하지, 지도하고 교육시키고 그러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혹시 나도 모르게 서로의 관계들 때문에 그런 자세가 몸에 스며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의도하지 않게 그런 태도로 비춰질 수는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 우월의식을 갖고 그 사람들을 대했던 것을 정말 아니야.

B : 나는 니 편이니까 당연히 너의 판단을 존중해. 그러면 그날 그 자리가 왜 그렇게 불편하게 끝났을까? 너의 생각과 행동은 옳았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잘못된 거였기 때문일까?

A : 아니야. 누가 옳고 글렀느냐 하는 것이 아니지. 그냥 서로 얘기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할까? 아니면 상황과 조건의 차이였다고나 할까?

B : 차이라면 니가 평소에 주장하는 데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됐던 거 아냐? 그런데 왜 서로는 그 차이를 존중하지 못했지?

A : 음...

B : ......

A : 잘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얘기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조금 불편해도 참았어야 했나?

B :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니 얘기가 그렇게 과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거든. 그리고 불편한데도 참는다는 것은 뭔가 가슴 속에 묻어둔다는 거잖아. 그런 태도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올바른 것일까?

A : 그렇다면 나는 올바랐고, 그들은 잘못됐다는 결론밖에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거든.

B : 그럼 뭐지? 니가 처음에 막 쏟아냈던 말들은 뭐지? 너는 조목조목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비판했잖아.

A : 음...

B : ......

A : 잘 모르겠어. 그런데 니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나도 내가 비판했던 방식 그대로였다는 생각은 든다. 누군가를 비판하면서 내 사상적 순수성과 내 행동의 올바름을 증명하려고 했던 방식 말이야. 나도 결국 그들의 힘겨움과 아픔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네. 그저 내 외로움과 힘겨움만을 감싸고 있었던 거였어.

B : 글쎄... 남을 비판했던 그 무기를 자신에게 들이대면서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좋은 자세이기는 하지... 그런데 뭔가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한 억지스러움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A : 지금까지 너랑 한 얘기를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너와 나는 솔직했어.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어떤 결론을 설정하고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어. 그건 확실해. 하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야.

B : ......

A : 그들의 치열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 같아. 그들은 일선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하고 있는데, 멀리 떨어져서 혼자 지내고 있는 내가 그들의 치열함을 제대로 이해하고 호흡하지 못했던 거 같아.

B : 그렇다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잖아?

A : 그리고 내가 사회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몇 년 동안 혼자서 지내다보니까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자신이 없고, 지나치게 민감해져 있어. 그래서 그날도 예민하게 대응했던 거 같아.

B : 그럴 수는 있겠다. 그래도 사회성이 심각하게 없다거나, 예민함이 심각해서 그 자리 사람들이 부자연스러웠다거나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유야 어쨌든 처음에는 재미있었잖아.

A : 그럼 뭐지?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B : 글쎄... 나는 너한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야. 그날 그 자리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그 사람들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하는 얘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처음에는 너의 불편함에 대해서 얘기를 했고, 그리고는 왜 불편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했어. 뭔가 명쾌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어. 이제 그 불편함을 어떻게 하면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얘기해야하지 않을까?

A : 하지만 나한테 어떤 점이 문제이고 부족한 지를 제대로 알아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B : 그러니? 그러면 더 고민해봐.

A : 음...

B : ......

A : 내가 관념적으로 변하고 있는 걸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관념적 감상성과 관념적 급진성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

B : 그럴 수도 있겠지.

A : 니가 보기에는 어떤데?

B : 나는 너야, 그치? 니가 느끼지 못하는 걸 내가 느낄 수 있겠니?

A : 그렇긴 하다.

B : 이런 식으로 문제를 찾으려 한다면 너는 끝없이 니 내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결국 니가 얘기했던 지나친 민감성과 관념성으로 빠져들지 않겠니?

A : 그러면 어떻하면 좋을까?

B : 글쎄...

A : ......

B : ......

A :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게 좋겠어. 니 말대로 내 안으로만 빠져드는 것 같아.

B : 그러면 우리의 얘기는 여기서 끝낼까?

A : 아직도 불편함은 남아 있는데...

B : 나와의 대화에서 이 이상 진척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해보는 건 어때? 니가 잘 하는 방법을 선택해 보는 거야. 사람들에게 너의 고민과 생각을 얘기하는 거 말야.

A :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사람들이 불편해 할 거 같아.

B : 왜? 누가 불편하다고 얘기하든?

A : 그건 아닌데... 내가 그동안 너무 무거운 얘기들을 많이 했잖아.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계속 듣다보면 그 무거움 때문에 불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B : 니가 그런 생각이 든다면 앞으로는 무거운 얘기 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만... 그것도 너의 지나친 민감함이지 않을까? 너는 왜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왔는데?

A :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

B : 그 사람들이 니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얘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잖아.

A : 그건 그렇지.

B : 그러면 왜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무거운 얘기들을 해왔지?

A : 음... 첫째는 나를 드러내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어. 그게 내가 사람들과 얘기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나를 성찰하면서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과 호흡하고 싶었어. 나와 비슷한 곳에서 호흡해왔던 사람들이고,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나의 하나님이고, 부처님이고, 총체성이기 때문이지.

B : 그런데 왜 불편해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A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얘기를 듣는지 안 듣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침묵하거든. 그렇지 않고 답변을 보내주는 사람도 걱정해주는 답변이었어. 그 침묵과 답변 속에서 불편함이 느껴졌거든.

B : 그럼 너는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데? 내가 불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

A : 그런 생각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를 믿어.

B : 왜? 내가 너이기 때문에 믿는 거야?

A : 아니야. 그동안 너와 많은 얘기를 하면서 너를 믿을 수 있게 됐어. 솔직히 너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니?

B : 하긴 그렇다. 니가 나를 못 믿으면 너는 벌써 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도 믿니?

A : 아! 알겠다. 그들을 신뢰하라는 거지?

B : 그래. 니가 나를 신뢰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 그들은 너의 하나님이고, 부처님이고, 총체성이라고 니 입으로 얘기했잖아. 신뢰한다면 그들의 침묵과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답변까지 신뢰해야 하는 거 아닐까? 니 말대로 너의 하나님은 침묵으로 답변하시고, 너의 부처님은 미소로 답변하시고, 너의 총체성은 그들의 다양한 방식으로 답변하는 거 아닐까? 문제는 니가 얼마나 그들을 신뢰하고 솔직하게 얘기를 하느냐 하는 거야. 간절한 기도라는 것이 그런 거 아닐까?

A : 무슨 말인지 알겠어.

B : 그리고 너는 충분히 낮은 곳에 있어. 니가 말하는 데로 세상의 힘이 만들어지고 솟아나는 그곳에 있다는 거야. 그들이 하나님이라면 너는 부활한 예수님이고, 그들이 부처님이라면 너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고, 그들이 너의 총체성이라면 너는 그들과 같이 있는 거야. 예수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무슨 답변을 듣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닐 거야. 그치?

A : 그래.

B : 이제 나는 들어가도 되겠니?

A : 고마워.

B : 고맙긴, 나도 너랑 얘기하는 게 즐거워. 너는 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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