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남영동 1985

 

정말 오래간만에 정치영화를 봤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왜 만들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과 너무 어설프게 예술적 승화를 하려고 했던 ‘효자동이발사’가 최근에 봤던 정치영화였으니....

아무튼 정지영 감독의 정치영화라면 별로 망설이지 않고 봐도 되겠다 싶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시작한 영화는 두 시간 내내 대공분실 안에서의 고문에만 집중했다.

중간중간 김근태의 고뇌를 보여주기 위해 가족에 대한 회상장면이 아주 짧게 나타나는 것 말고는 영화의 90% 이상이 그 좁은 고문실 안에서만 촬영됐다.

무자비한 구타에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모든 고문이 아주 생생하게 재현됐다.

별로 웃거나 인상 쓰지도 않으면서 잔인한 고문을 능숙하게 해내는 이근안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그 악마 앞에서 토하고, 개 거품 물고, 똥 오줌 다 싸면서 벌벌 떠는 김근태의 모습은 벌레 그 자체였다.

잔인한 악마가 나약한 벌레를 짓밟는 그 생생한 모습은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이나 ‘추적자’의 하정우 같은 캐릭터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줬다.

고문을 위해서 칠성판을 들고 오는 순간이 얼마나 끔찍한지...

영화의 상상력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할 때 오히려 현실에 충실한 영화가 더 큰 힘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영화였다.

정지영답게 돌직구로 승부한 이 영화는 최고의 고문영화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두 시간 가까이 그 잔인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불편하기는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잔인한 고문을 일삼는 경찰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야구중계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희희락락거리고, 여자문제와 집안문제로 고민하고, 김근태 사건을 멋있게 처리해서 승진하고 싶은 공무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아주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현실적인 인간들이 그런 고문을 자행한다는 것이 더 소름끼치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에 대한 굳은 의지로 똘똘뭉친 김근태는 잔인한 고문 속에 무너지면서 벌벌 떨면서 벌거벗은 나약한 인간이 돼서 발버둥쳤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성과 굳은 의지를 꺾지는 않았다. 물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하고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고 말지만 그는 끝까지 영웅으로 그려졌다.

이근안과 고문경찰들은 현실적인 인간이었는데, 김근태는 독립운동 투사와 같은 영웅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잔인하더라도 영웅을 이길 수 없는 것이 영화라면 이 영화는 잔인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영웅에 대한 서사시일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고문하는 영화를 본다는 엄청 불쾌하겠지만, 인간이 영웅을 고문하는 영화는 불편할 뿐이다.

감독은 잔인한 고문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도 고문하는 악마와 싸운 것이 아니라 그런 고문을 이겨내는 영웅 속으로 비켜가 버렸다.

 

전두환 정권 시절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박정희 대통령 각하’라는 말이 더 많이 나오는 이 영화는 대선을 앞두고 너무도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냈다.

목사가 됐던 이근안이 아직도 자신의 행동을 애국적 행동이라고 떵떵거리고 있는 이 현실에서 20여 년 전의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명박에 의해 뭉개진 인권의 가치가 박근혜 뒤에 숨어서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악마들에 의해 다시 고문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왠지 허약해보였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인간적 속물이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의해 그 악마들이 제대로 응징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인간이 영웅을 이길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영웅이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최고의 고문영화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아쉬운 정치영화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