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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의 한 자락 - 김진균

유럽에서 일어난 1968년의 사회운동(혹은 혁명)은 멀리 극동에 있는 한국사람들에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운동의 한 자락을 볼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1999년 2월 독일 브레멘대학에 가서 약 1주일동안 학술토론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그 토로회를 주관한 분은 그 대학의 홀거 하이데 교수였다. 그분의 회갑이 마침 그 때여서 그 토론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 환갑잔치에 초대되었다. 학교로부터 약 1시간이상 농촌의 넓고 넓은 들판길을 따라 가서 그 교수의 농가에 도착하였다. 그 농가는 옛날 가축조차 한 집 울타리안에 기숙하는 마구간이 있었다는데 그 마구간을 수리하여   홀을 만들었다. 바닥에 나무를 깔아서 넓게 이용할 수 있었다.

홀거 교수는 한국과 인연이 많은 분이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는 몇 안 되는 교수이고 한국에서 간 유학생을 지도하여 박사를 몇 사람 배출하고 한국의 산천을 좋아해서 간혹 여행을 오기도 한다. 브레멘에서도 한국 사람들과 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마침 환갑이 기에 그 회갑연을 한국식으로 차리게 되었다. 상단 가운데 병풍을 치고 상을 차렸는데 그럴듯하게 환갑잔치상을 차린 것이다, 한국에서 온 청주가 있고 떡도 마련되었다. 넓은 홀에 벽면에 따라 상을 쭉 놓았는데 불고기와 잡채, 김치 등 한국 음식이 차려지고 한국산 청주와   맥주가 나오고 특별히 독일 포도주가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환갑잔치에 참석한 하객중에서 나이가 많은 축이라 한쪽 첫째 머리의 상에 앉게 되었는데 내 옆에서   민박를 제공한 집의 교포 아주머니가 통역 겸해서 앉았고 건너편에 나이 든 (약 60세) 부인네 두분이 앉았다. 한분은 처녀를 데리고 왔다. 인사를 하고 보니 홀거 교수의   첫 번째 전 부인과 세 번째 전 부인이었다. 첫 번째 전 부인이 딸을 데리고 왔다. 두 번째 전 부인은 참석치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하였다.

잔치가 시작되니 사회자가 가족이 나와서 헌주를 하라한다. 아, 가족이 누군가? 딸이 왔으니 당연히 나와서 헌주하는데 두분의 전 부인도 쭈뼛거리며 나가서 헌주를 한다. 한국식으로 꿇여   앉자니 힘도 들겠다. 한 친구가 말한다. 아들은 한국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러나 상 저쪽에 앉아 합석한 두 부인들에게 어떤 대화를 해야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데 그 분들이 김치와 불고기, 잡채를 잘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김치를 잘 아느냐?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럼   내가 여름에 시원하게 먹는 물김치 담그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배추를 약 5 - 7센티 사각형으로 자른다. 거기에 왕소금을 약간 뿌려서 간단히 숨을 죽이고 간이 들게 해서 씻는다. 무를 넣고 싶으면 넣는다. 양파를 크게 두쪽으로 쪼개어 넣는다. 파를 취향에 따라 고르는데 중파가 좋을 것이다. 잘 씻어서 몇 포기씩 단으로 해서 넣는다. 생강도 넣는다. 푸른 고추 큰 것 몇 개와 빨강 고추 큰 것 몇 개 , 오이를 잘 씻어서 잘라서 넣는다. 이렇게 해서 물을 붓고 심심하게 간을 한다. 식초를 몇 숟가락 넣는다. 이렇게 하면 맛이 깔끔해지고 시원해 진다. 단지에 담아서 그늘에 몇 시간 두었다가 조금 익으면 냉장고에 넣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가니 특히 셋째 부인이 관심을 많이 보인다. 그녀는 인도의 요가를 배워서 이 홀에서 동호인들과 함께 요가운동을 한단다. 그날 인도옷을 입고 나왔다. 김치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겨울에 담는 김장김치가 한국에서 잘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음식의 수준으로 보면 한국의 여름 물김치 담그는 것도 숙련과 신비가 깃들은 것이다.

자세히는 알기 어려웠지만, 홀거 교수는 유럽 1968년 혁명시대의 주역이었다. 그는 학교로 와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연구를 평생해 가는 길을 잡았다.   첫 번째 부인은 68년 혁명의 동지였단다. 아마도 아름답게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되었단다. 68년 혁명은 기존의 질서를 의심해 보고 전복해 보는 것이 아니었느냐! 결혼해 행복해 사는 것이 한편으로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기존의 결혼제도에 매몰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기존의 전복을 편리하게 생각해서야 않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 기존의 제도에서 벗어나서 각자 '자율성'을 추구하자    -이렇게 해서   각자 자기의 인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둘째와 셋째 부인과의 만남과 헤어짐도 그런 맥락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만나서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하고 토론도 하고 서로 격려도 하는 모양이다. 마치 68년 혁명의 긴 한 자락을 보는 것 같았다.


1968년을 열 살 나이로 지낸 어떤 프랑스 처녀는 약 6년후에 1968년을 이렇게 기억한다고 한국유학생에 말한 것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연애할 때 길에서 뽀뽀를 하면 경찰관이 보고 호르라기를 불어 대던 일이 68년에 깨끗이 사라진 거예요". 이에 비하면 유럽의 68년 혁명을 소개한 국내출간 서적이 몇권 나와 있는데는,   대체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안보-군사주의체제,   자연파괴적 성장주의 경제발전체제,   핵무기-비밀관리체제와 무모한 전쟁들,   엄숙한 가부장제, 그리고 남성 성인 권위주의 체제,   강력하게 내려오는 식민주의체제 - 이 모든 것을 전복시키고자 감행된 혁명이라는 것, 그러나 이 혁명이 곧 헤게모니가 장악된 부르죠아 체제에 곧 흡수되었지만 새로운 사회를 위한 사회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된 내용이 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조급하게 소련붕괴이후 그리고 문민정부의 도입이후 마치 '새사회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논조, 특히 계급운동 혹은 노동운동의 역사적 사명의 마감을 주장하는 논조에 이 유럽의 68혁명을 근거하는 논자도 많았다.   오히려 홀거 교수처럼 자신의 일상생활과 연구활동, 그리고 한국과 같은 사회운동의 활력에의 관심 등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추구하고 시험해 보는 진지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한다.

마침 박종철출판사에서 로널드 프레이저가 쓴 [1968년의 목소리 - "불가능을 요구하라"]를 번역 출간하였다. 여섯 나라 230명의 이야기로 짜여진 1968년 이야기이다. 프랑스 어느 고등학교학생은 말한다 : "1968년 5월에 대한 나의 생생한 기억이 '무엇이냐고요?' 모든이들이, 새롭게 발견한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즉 누구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5월 한달동안의 대화속에서 사람들은 5년 동안 공부한 것 보다 더 많을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또 다른 세계였지만   - 아마 꿈의 세계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항상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말할 필요와 권리 말입니다."

   1968년에 프랑스 젊은이들이 이제    말하기 '시작하다'를 외치는 것을 여기 한국에서 그 당해의 상황으로   듣자면 유럽의 민주주의 발전 진화에 대한   환상에 젖은 우리로서는 너무 의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홀거 교수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동안에, 한국에서는 진정 '말을 해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잉태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도 곧 한국에서   유럽의 '1968년'과 같은 일이 1987년과는 또 다르게 벌어지리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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