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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해방적 기능 - 파울로 프레이리

대화는 세계와 인간들을 위한 심오한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세계에 '이름 붙이는' 일은, 하나의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로서,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대화의 기반이자 대화 그 자체인 것이다. 결국 사랑은 책임 있는 '주체들'이 맡는 숙제로서, 지배관계 속에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지배란 사랑이 병든 현상이다. 지배자에게는 사디즘으로 피지배자에게는 마조히즘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사랑은 공포의 행위가 아니고 용기의 행위인 만큼 다른 사람들을 향한 투신이다. 억눌린 자들이 그 어느 곳에서 발견되더라도, 사랑의 행위는 그들이 대의, 즉 해방이라는 대의에 뛰어드는 투신이 된다. 그리고 이 투신은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적이 된다. 사랑은 용기의 행위인 만큼 결코 감상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하나의 자유 행위와 사랑이, 기만의 핑계 구실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반드시 또 다른 자유행위를 생성시켜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이 못된다. 억압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사랑을 본래 모습으로 바꾸어 놓으려면 그 억압 상황을 뒤엎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 내가 만일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일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대화에 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대화는 겸손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세계에 '이름 붙이는' 일이란, 인간들이 끊임 없이 세계를 재창조해 나가는 일로, 결코 어떤 오만의 행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배우고 행동한다는 공통과제로 연결되는 인간들이 만나는 행위인 대화는 대화자들(혹은 그들 중의 하나)이 겸손하지 못하면 결렬되고 만다. 만일 내가 자신의 무지는 깨닫지 못하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의 무지를 탓하려고만 든다면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 그들 속에서는 다른 '나'를 찾고 인정할 수 없는 그저 '그것들'-과는 별개의 인간으로 간주한다면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순수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내(內) 일원으로, 진리와 지식을 가진 자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사람들' 혹은 '하층민들'로 간주한다면 어떻게 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만일 내가 세계에 '이름 붙이는' 작업은 엘리트가 할 일이며, 역사 속에 민중이란 존재는 마땅히 피해야 할 저질의 표시라고 전제하고 있다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의 공로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그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만일 내가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 해서 괴로워하고 나약해진다면, 어떻게 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오만과 대화는 병존할 수 없다. 겸손이 결여된(혹은 그것을 상실한) 사람들은 민중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그들의 동료가 되어 세계에 '이름 붙이는'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자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만남의 장소에 가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사람이다. 만남의 자리에는 철저하게 무지한 사람도 완벽하게 현명한 현인도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이 현재 알고 있는 것보다 좀 더 배우려고 함께 노력하는 인간들이 존재할 뿐이다.
나아가서 대화는 인간들에 대한 강한 믿음, 만들고 제조하며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인간 사명(어떤 엘리트의 특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이 천부적 권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곧 대화에 필요한 선험적 요구이다. '대화적 인간'은 심지어는 서로 얼굴을 맞대기 전부터 다른 사람들을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고지식한 것은 아니다. '대화적인 인간'은 비판력도 지니고 있고, 소외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창조하고 변혁하는 일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면서도 그 힘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해를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는 가운데 이 가능성을 맞서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창조하고 변혁하는 힘이 비록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방해받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되살아날 소지가 있음을 확신한다. 노예 노동을, 생의 의미를 맛보게 하는 자유 노동으로 대체시키는 가운데 이 같은 재생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대화는 부권주의적 기반으로 타락하는 어릿광대극이 될 수밖에 없다.
대화가 사랑, 겸손 그리고 믿음을 그 바탕으로 하게 되면 자연히 참석자들은 서로를 신뢰하는 수평 관계를 맺는다. 사랑하고 겸손한 마음과 믿음으로 충만된 대화가 상호신뢰의 분위기를 만들어 민중들로 하여금 보다 밀접한 협력관계 속에서 세계에 '이름붙이는' 일에 임하도록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 된다. 은행예금식 교육방법이 갖는 <대화 배척>의 성격에서는 분명히 이같은 신뢰를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대화에 필요한 선험적 조건인데 비해서 대화로 인해서 확인되는 것은 곧 신뢰이다. 만일 대화로 신뢰가 확인되지 못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선결 조건이 미비됐기 때문이다. 거짓된 사랑과 위장된 겸손, 인간에 대한 빈약한 믿음은 신뢰를 낳지 못한다. 한 인간이 자기의 진실하고 구체적인 의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는 증거로 부수되어 나오는 것은 오직 신뢰밖에 없다. 그가 입으로 한 말이 행동과 부합되지 않을 경우에는 신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처사는 결코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민족주의를 찬양한다면서 민중들의 입을 틀어막는 짓은 광대놀이에 불과하다. 휴머니즘을 떠들어대면서 인간을 부정하는 자는 거짓된 자이다.
대화는 또한 희망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희망이란 인간의 불완전성에 뿌리박고 서 있는데 사람들은 끊임없는 추구 -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 속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추구- 속에서 움직여 그 불완전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절망은 침묵의 한 형태요, 세계를 부정하고 거기로부터 도피하는 도피행각이다. 부조리한 질서에서 빚어지는 비인간화는 절망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불의로 말미암아 부정되는 인간성을 부단하게 추구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희망의 동기가 된다 그러나 희망이란 팔짱을 끼고서 그저 기다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투쟁하고 있을 때 나는 희망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내가 희망을 품고 싸울 때 나는 기다릴 수 있게 된다.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려는 사람들의 만남인 이 대화는 절망이라는 풍토 위에서는 이루어지지가 않는다. 대화에 참여하는 자들이 자기네 노력에서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들의 만남은 공허하고 헛되고 형식적이고 지루한 만남이 되고 말 것이다.
끝으로 진정한 대화는 비판적인 사고 즉, 세계와 인간을 이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식별하는 사고, 현실을 정지된 실제로서보다는 과정이자 변형으로 인식하는 사고, 사고 그 자체를 행동에서 분리시키지 않고,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현세에 깊숙이 파고들기를 마지않는 사고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비판적인 사고는, '역사의 시간을 하나의 무게로, 누적된 습득물로, 과거의 체험들로' 보고 거기서부터 표준에 맞추어지고 '행실이 방정한' 현재가 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사고와는 대조적이다. 고루한 사상가에게는 표준에 맞추어진 '오늘'에 적응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비판적인 사상가에게 중요한 일은 지속적인 인간들의 인간화를 위해서 현실을 끊임없이 변혁시키는 것이다. 삐에르 푸르터는 말하고 있다.

이제는 보증된 공간을 파악하여 현세의 위험물을 줄여 보자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오히려 공간을 현세화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 우주가 나에게는, 적응할 수 있을 뿐인 거대한 '현재'를 떠맡기는 공간으로서가 아니고, 내가 거기에 적용함으로써 형성되는 하나의 범위요 영역으로 보인다.

고지식한 사고에 따르면 분명히 이 보증된 공간을 꽉 붙잡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현세를 부정하는 것은 목표 그 자체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오직 대화, 비판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대화만이 비판적인 사고를 산출할 수가 있다. 대화 없이는 의사소통이 안되고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참된 교육이란 있을 수 없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모순을 해소시킬 수 있는 교육이란, 학생과 교사 양자가 모두, 중재를 받는 대상을 그네들의 인식 대상으로 삼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 지니는 대화적 성격은, 교사-학생이 어떤 교육학적 상황 속에서 학생들-교사들과 마주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전자가 후자와 가지게 될 대화가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하는 데서 표출된다. 그리고 대화 내용에 대한 편견 또한 실제로는 교육 계획 내용에 대한 편견이 되는 것이다.

[페다고지 -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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