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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주의자의 현실인식 - 파울로 프레이리

파벌심이 강한 인간은 어떤 신념을 지녔든지 간에 그 자신의 비합리성으로 가려져서 현실의 역동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곡해하기 마련이다. 혹시 그가 변증법적으로 사고한다면 그것은 다만 '길들여진 변증법'으로 이루어진 사고에 불과하다. 극우파는, 나는 이들을 '선천적인 파벌주의자'라고 명명한 바 있지만, 역사의 진행과정을 늦추어 시간을 '길들이고' 나아가서는 인간들을 길들이고 싶어한다. 극좌파는 현실과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려고 할 때 완전한 오류에 빠져들고 본질적으로 광신적인 입장을 취한다.
극우파와 극좌파는 서로 다른 면이 있다. 즉, 극우파는 현재를 길들이려고 시도하여 그가 바라는 미래가 이 길들여진 현재를 재생시키도록 획책한다. 극좌파는 미래는 이미 예정된 것, 일종의 필연적인 운명, 숙명, 인과(因果) 같은 미래로 생각한다. 극우파에게는 과거와 연결되는 '오늘'이 주어진 것이고 고정불변의 것인데 비해서, 극좌파에게 '내일'이란 사전에 결정이 나 있고 냉혹하게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극우파와 극좌파는 양자 모두 지극히 잘못된 역사관에서 출발하여 자유를 부정하는 형태들을 확산시키기 때문에 반동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한 쪽이 '잘 짜여진' 현재를 상상하고 다른 쪽이 '미리 예정된' 미래를 상상한다는 사실은 양자가 양팔을 끼고 방관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 현재가 계속되리라는 극우파와 이미 알려지고 예정된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는 극좌파는 다같이 자신들을 각기 빠져나올 수 없는 '확신의 틀' 속에 틀어박고 자기 나름의 진리를 만든다. 이 진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투쟁하고, 함께 미래를 받아들여야 하고, 주어진 것이 아닌 진정한 미래를 창조하야 하는 방법을 더불어 익혀 나가는 사람들의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 양 파벌이 조작해 낸 그 무엇이다. 이 두 파벌 형태들은 민중들과 등지거나, 역사를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결국 민중과 결별하게 된다.
극우파는 스스로를 '자기의' 진리 속에 폐쇄시켜 자신의 본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못하는데 비해서, 파벌주의적이고 경직된 극좌파는 자신의 본능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제각기 '자신의' 진리를 싸고돌면서 그 진리가 문제시되는 경우에 위협을 느낀다. 여행가인 알베스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향해 의심을 품지 못하기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해방을 위해 투신한 급진주의자는 '확신의 틀'속에 갇힌 포로가 되어 현실까지를 감금시키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그가 급진적이면 급진적일수록 현실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그 현실 속에 보다 완벽하게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더욱 훌륭하게 변혁시킨다. 급진주의자는 솔직하게 세계를 보고 듣고 대변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민중과 만나고 대화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사의 경영자, 인간의 경영자 혹은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민중 편에 서서 투쟁하기 위해서 역사에 투신할 뿐이다.

[페다고지 - 얼눌린자를 위한 교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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