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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인 혁명시기의 생산통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의 사무실과 빌라를 노동자 조직의 사무실로 이용하였다. 수도원은 학교로 사용되었다. 수녀원에는 노동자 대학까지 신설되었다. 농민위원회가 만든 민중 레스토랑을 민병대와 조직의 노동자들이 마음껏 이용했다. 상인들이 인플레이션을 노리고 비축해 두었던 생필품을 압수하여 민중들에게 배분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생산 부분에서였다. 수많은 기업가와 고급 기술자들, 이사들, 부동산 소유자들, 행정 관리들이 추방되었다.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섬유 노동자 조직의 보고에 의하면 기업가들 중에 절반이 그들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40퍼센트는 '사회 활동의 영역에서 멀여졌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10퍼센트는 노동자들의 피고용자라는 새로운 관계하에서 계속 일하겠다고 이미 선언했다고 한다. 노동자 자문기관 및 위원회가 기업을 통제하고 개인 소유의 상사와 회사를 압수했다. 중요한 생산수단 기구는 노조와 농장 협의회 그리고 도시 행정청에 위임되었다. 다만 소비성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만 개인 소유로 남겨두었다.
운수회사, 석유회사, 포드자동차, 스페인-스위스 합작 자동차 부품공장, 조선소, 발전소, 백화점, 극장과 영화관, 철도, 무기 생산 관련 금속공장, 농업 생산물 수출회사 그리고 대형 포도주회사는 물론 사회화되었다. 압류조치에 대한 법적 형식절차는 그때그때마다 달랐다. 기업은 지방자치의 재산으로 공유화된 경우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본래의 소유자와 새 계약이 체결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그저 단순히 압류되기도 하였다. 외국상사는 국유화되었고 기업 카르텔은 추방되었다. 모든 경우, 두 개의 거대한 노조조직인 무정부주의 노조와 사회주의 노조가 임명한 통제위원회의 관리 아래서 노동자 스스로 사업 경영을 떠맡았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계획도 수립되어 공장 안에 보건소와 학교가 세워졌다. 상품의 유통은 노조들과 협의하여 조절되었다.
- 앙리 라바세이

오늘 내가 방문하여 목격한 공장의 활기는 분명 CNT가 이룬 집단경영화의 성과였다. 시민전쟁이 발생한 이후 3주, 그리고 총파업이 끝난 후 2주만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공장은 다시 가동되었다. 나는 매우 질서 있게 가동되고 있는 한 공장을 방문했다.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들은 체계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회화가 이루어진 이후 여기서 버스 두 대가 수리되었다. 이전에 시작하다가 중단되었던 신축건물이 완공되었고, 새 모형의 차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이런 표어가 불어 있었다. '노동자의 경영으로 생산된 자동차'. 생산 관리 담당원은 신축건물을 완공하는데에 5일이 걸렸으며, 그것은 평상시보다 공기를 이틀이나 단축한 셈이라 고 말했다.
그 공장에서 받은 긍정적 인상을 이처럼 일반화하는 것이 물론 조급한 결론일지는 모르지만, 당시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집단이 공장을 인수하여 며칠만에, 아무런 문제없이 생산을 재가동했다면 그것은 분명 뛰어난 업적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카탈로니아 일반 노동자들의 재능과 바르셀로나 노동자 조직의 능력을 대변해 준 것이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공장에는 재벌의 총수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나는 공장의 급여명세서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총수, 경영진, 공장장과 기사라는 관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라졌다'는 것은 그들이 살해되었다는 것의 완곡한 표현이다.) 공장위원회의 회원들이 무심코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 회사 간부의 개인적인 친구들에게 '연금지불'폐지 건에 대해 함구하고, 한달 봉급의 상한선을 1천 페세타로 정하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안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공장으로 볼 때는 상당한 절약을 의미한다고 했다. 사회화 이후에도 봉급은 인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 프란츠 보르케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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