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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기래선생 회고록

 

 

 

 

 

 

어린 시절

 

나는 1926년에 춘향이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가난과 질병으로 아이들이 많이 죽어가던 시대라, 태어나고 나서 1년 뒤인 1927년에 호적을 올렸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겠지만 우리 집 역시 가난한 소작 농가였다. 하루하루 뼈 빠지게 남의 농사를 지어주고 소작료를 내고 나면 아홉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도 평생 농사만을 천직으로 삼고 살아오신 아버님과 그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시는 어머님으로 인해 그나마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끔은 소작을 부치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운 적도 더러 있었다. 매번 내야 하는 소작료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왜 우리 부모님은 지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온 우리 부모님은 결코 지주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굶어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고리봉 산자락 아래 반다리에서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박휘석)께서 동학군으로 나가 전투에서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반다리를 떠나야 했다. 당시 동학군의 아들은 아무리 어려도 죽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젊은 여인의 몸으로 한 손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한 손엔 보따리 하나를 들고 한 밤중에 재를 넘었다고 한다. 당시 지리산 고리봉에는 호랑이가 살았지만 호랑이조차 쫓기는 모자를 불쌍히 여겨 범하지 않았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반다리에서 옹정리로 터를 옮긴 할머니는 아버지 박경안과 어머니 신선희를 결혼시켜 우리들 여섯 자손을 보셨다. 나의 어린 시절 가족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형님 두 분, 그리고 누님 세분 막내인 나까지 모두 아홉이었다.


여느 집안과 마찬가지로 우리 형제들도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농사를 돕거나 밥벌이를 나갔다. 하지만 막내인 나는 운이 좋게도 배움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님은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가난하지만 자식 중 하나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 막내 기래를 학교에 보내자.”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 가고 싶었던 나는 아버지 말씀에 너무 기뻤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성공해야지.’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1933년 나는 여덟 살에 금지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대부터 강화된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은 보통학교까지 영향을 미쳤다. 3학년이 되던 해, 일본총독부는 보통학교에서 진행하던 우리말과 우리역사 교육을 금지시켰다. 대신 일본말과 일본역사를 배우게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지만, 누구하나 저항하진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1939년 14세가 되던 해에 나는 금지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장을 집에 가져다 드렸을 때 아버님이 나에게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기래야 너는 공부를 잘해 졸업성적도 좋구나. 너를 중학교에 보내주고 싶지만 입학금과 수업료가 없어서 보내줄 수가 없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앞으로는 농사일을 배워 훌륭한 농민이 되어라.”
그러시면서 지게와 낫, 그리고 망태를 각각 하나씩 선물로 주셨다.
그 이후 나는 동네 머슴들을 따라다니면서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주경야독 일본생활

 

하지만 마음속에서부터 꿈틀거리고 있는 배움의 욕구는 나를 잠재울 수 없었다. 나는 농사일을 하다가도 쉴 때는 나무 그늘 아래서 한자펜습자본에 글씨를 썼다. 그 때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 너무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의 둘째누님은 매형과 함께 일본에 살고 있었다. 매형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건축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명절이나 집안행사로 누님과 매형이 집에 방문할 때는 나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많이 졸라댔다. 우리나라에서는 돈이 없어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일본에서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학교에 다니는 것이 당시 나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누님도 부모님께서도 허락하지 않았다.
 


15세가 되던 해 새벽, 나는 부모님 장롱을 몰래 뒤져 돈을 가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며칠 동안 노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 갈 방법을 연구하던 나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행에 오를 수가 있었다.
 


밀항선을 타고 처음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순간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누님이 사는 오사카까지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만큼이나 먼 거리였다. 나는 한 달 가까이 걸어서 그 먼 길을 주소 하나만을 달랑 들고 고생해서 찾아갔다. 가는 과정이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누님 집에 도착했을 때 매형은 내 모습을 보고 너무나 깜짝 놀라셨다.
 


매형은 나를 동네 철공소에 취직을 시켜주셨다. 나는 매일 새벽에 나가 작업장을 청소하고 기계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았다. 철공소 선배들이 누가 이렇게 기계를 닦아 놓았냐며 묻자 조선에서 온 소년이 이렇게 닦아 놓았다며 칭찬들을 하셨다. 한 달 동안 매일 이렇게 새벽에 나가 청소를 하자, 하루는 철공소 사장이 나를 불렀다. 사장은 기특하다는 말을 하면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철공소 사장은 나를 야간 학교에 보내 주었다.
 
 
그 때 부터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낮에는 후지모도 프레스(철공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이마미야 직공학교에 다녔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일본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다다미방에서 뜨거운 물을 담은 철통(유단포)을 헝겊으로 싸서 이불 속에 넣고 잤지만, 일어나면 책상 위의 잉크가 얼어 있었다. 추운 겨울을 유단포 하나만으로 버텨야 할 땐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 주시던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지친 몸으로 밤늦게 공부를 하다 잠이 들면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새벽에 다시 철공소에 나가 기계를 닦고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공부해서 나는 일본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특히 다양한 학과목 중 과학 분야에 많은 열의를 가지고 공부했다.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은 향후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오사카에는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나는 조선인 선배들을 많이 알고 지냈다. 누님과 매형이 있긴 했지만 적적한 타국생활에 선배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선배들 중엔 남원군 지주의 아들로 일본 명문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선배는 나에게 굉장히 친절히 대해주었고, 나 역시 그 선배를 많이 따랐다.


선배들은 유학 중에 여운형선생님과 김구선생님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선배들과 친분관계를 맺으면서 부탁을 많이 들어줬다. 대부분이 편지 심부름이었는데 그 당시는 그 편지가 어떤 내용인지, 누구에게 전달되는 건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귀국을 하고 그 선배들의 소개로 여운형 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많이 유포되어 있었다. 선배들로 부터 ‘일본은 망할 것이며 조선은 곧 독립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학습 서클에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무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나는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선배들과 함께 해방된 조국에 가서 일을 하자며 서둘러 귀국선을 탔다. 조선으로 돌아온 나는 고향에 들러 먼저 부모님을 뵈었다.
 
 


건준위 활동
 
 
36년이라는 오랜 기간 일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 굉장히 어수선했다. 조선 총독부에 근무했던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이 해방과 함께 모두 도망을 간 상황이라 치안을 담당할 사람들도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 온 나도 청년들을 조직하여 자치 경찰 치안대를 조직했다. 나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전남 구례에 무기들을 숨기고 간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구례까지 가서 병기고에 남기고 간 총을 꺼내 무장을 했다. 당시 그 무기들은 남원 일대 일본지서(경찰서)를 접수하고 친일파를 축출하는 등 치안확보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은 그 동안의 억압과 식민지 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해방 후 불안정한 정국을 관리한다는 목적으로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미소양국의 주둔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 환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쪽에 주둔한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재정비해 미군정청을 창설했다. 그리고 일제보다 더 강력한 군정을 실시하며 조선민족을 압박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우리민족은 건국의지가 강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김구선생님과 국내에서 조선 건국을 위한 활동을 펼치던 여운형선생님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박사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조선 재건국을 위한 활동들을 활발히 펼쳤다. 이 시기에 전국에서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도 많이 생겨났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일본에서 알고 지낸 선배들과 함께 여운형 선생님을 뵈었다. 여운형 선생님은 당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위)는 우리나라 각계각층 사람들이 총망라된 조직이며, 친일파·민족반역자 등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우리나라는 건설한다는 취지로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는데 앞장서며 통일운동까지 관여하고 있었다. 나도 여운형 선생님을 도와 건준위 활동에 가담했다.
 


우리민족은 조선 재건국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일제 36년간의 식민 지배도 우리 역사에서 큰 오점이지만, 이 식민 지배를 어떤 방향으로 청산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당시 조선건국활동을 하는 주요 인물이었던 김구. 여운형, 이승만, 박헌영 이 네 사람의 입장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면서 조선재건국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남북의 자주적인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여운형, 김구선생님과는 달리 이승만 박사는 당시 미소 양국이 그어놓은 3.8선을 마치 우리나라 국경처럼 인정하고 미군과 입장을 함께 하며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주장했다. 그러다 두 진영이 완전히 대립상태가 되고, 감정대립으로 변질되면서 여운형, 김구선생님이 암살되는 결과까지 가져 왔다.
 


이승만 박사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 갔다가 8·15 해방 이후에 미군을 따라서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한 일화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 아래, 교포들의 성금으로 독립자금을 거둬 자기 개인의 용도로 탕진하고 미국정부의 비위를 맞추기에 정신없었다는 말도 있다.

 
나는 여운형 선생님을 정말 존경하였다. 1947년 7월 19일 낮에 혜화동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서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차 안에 있던 여운형 선생님이 쓰러졌다. 나는 그 장면을 목격했고 아직도 그 때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여운형 선생님 장례식을 치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김구선생님 장례식 때도 그랬지만, 여운형 선생님 장례식 때 나는 직접 상여를 메고 우이동 묘지까지 가면서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다.


나는 당시의 분노를 잊을 수가 없다. 의견대립이 생기면 법이나 대화를 통해서 방향을 모색하기보다 비밀리에 공작을 해서 암살을 하다니, 그것도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아온 분을 누가 무슨 자격으로 암살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여운형 선생님은 오직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려고 노력하셨을 뿐이다.

 

이승만 박사가 조선독립을 할 사람이냐,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 애국자이고 독립운동가인 김구, 여운형 선생님을 외세와 결탁하여 암살한 사람들에 대해 나는 깊은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 우리는 여운형 선생님께서 못다 하신 뜻을 이루고자 김구 선생님께로 갔다. 그러나 1949년 4월 남북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다녀오신 두 달 후, 김구 선생님마저 반통일 세력에 의해 또다시 암살되고 말았다.

 

 

대학시절

 

나는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민족분단과 같은 비극을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내 욕구를 그다지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일부 교수님들 중에는 우익 보수 세력과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강의시간에서도 이념 대립이 있었다. 정치활동 보다는 학문을 제대로 연구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지만 현실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948년 5월에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크고 작은 투쟁들이 많이 벌어졌다. 대학가 역시 이런 사회적 흐름과 함께 단독정부 반대와 남북한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컸다. 나도 학과수업이 끝나면, 동기생들과 선후배들과 함께 도서관에 모여 토론도 하고 집회도 많이 참가했다. 
 


고려대학교와 홍익대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나는 당시 중앙대 뒤편 언덕에 자리 잡은 흑석동 하숙집에서 생활했다. 다행히 학비와 생활비도 지인의 소개로 흑석동에서 가정교사를 하여 조달할 수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경제학과 교수님의 댁도 흑석동에 있어서 자주 찾아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교수님은 전쟁 이후 북의 김일성 종합대학의 경제학부 교수진의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중앙대 후배 중에 한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수대와 반포로 이어지던 수많은 갈대밭에서 가슴 설레며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지지 않는 그 사랑도 전쟁으로 인해 이룰 수 없었다.  
 


당시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나를 비롯한 많은 대학생들은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감했다. 남쪽에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3․8선을 경계로 남북 간의 잦은 군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내부의 반란 사건과 양민학살사건 등 남한에는 많은 유혈사태도 있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군인이 양민들을 폭도로 몰아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사살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6.25 한국전쟁

 

여운형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나던 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나는 대학 3학년생이었다.

 

인도교가 끊기자 강북에서 중앙대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피난을 왔다. 그래서 강북 쪽에는 배가 거의 없었으나 노량진과 흑석동 주변에는 배가 정말 많았다. 나와 중앙대학교 동료들은 그 배들을 타고 강북으로 향하였다. 남들이 내려올 때 우리는 반대로 강북을 향해 노를 저었다.

 

어느 학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대학생 수 천명과 함께 ‘해방전쟁 승리 궐기대회’에 참여하였다. 당시에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가장 많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의정부에 있는 어느 훈련소에서 며칠간 약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우리는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총도 부족하고 차도 없어서 천안, 익산, 광주까지 걸어서 노숙을 하며 행군을 했지만 젊은 지식인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 의기는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훌륭한 기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사랑했던 여학생도 함께 입대 했었는데, 그녀는 간호병으로 가게 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그때 나의 마음은 완전한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불타는 열정과 절박한 심정뿐이었다. 전라남도 진도까지 내려와 무기로 무장한 우리는 어느 섬에 머물면서 진지를 구축했다. 밤을 세워 미군의 상륙을 저지했지만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인천항으로 상륙해 버렸다. 미군의 상륙은 조국의 금수강산을 피의 강산으로 만들었다.  

 

담양까지 쫓기다 퇴로를 차당 당한 우리는 대나무 숲 사이에 굴을 파고 얼마동안 굴 속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지리산 활동에 관한 기록은 하지 못함-편집자 주)

 

어느날 깊은밤 총소리에 쫓겨 무덤 뒤에 숨었는데, 얼마간 총소리가 나지 않자 옆에 있던 동지가 무덤위로 머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총알이 날라왔다.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 동지를 두고 나는 기어서 몸을 숨겼다. 칠흙 같은 밤이었지만 산길이 눈 앞에 환히 펼쳐졌다. 그 때 산길이 환히 보였던 것은 아마도 조상님들이 나에게 길을 밝혀 준 것이리라.

 

농민복을 얻어 입은 나는 지게를 지고 고리봉 산자락 아래 반다리로 들어 왔다. 반다리는 할아버지가 나서 자란 곳이어서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약방을 하시던 형님께서 나를 숨겨주시고 밥을 가져다 주셨다.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 전쟁이 3.8선을 허물고 남북통일의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통일에 대한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전쟁이 끝나고 사랑했던 여학생이 부산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부산으로 내려 갔다. 나는 부산에 머물면서 그녀를 빼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면회 때 전향을 하면 살 수도 있으니까 나와서 나와 결혼을 하자고 애원도 했다. 그녀는 울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말했다. 우리는 머리카락을 한 웅큼 잘라 나누어 가졌다. 죽더라도 잊지 말자고...

 

얼마후 거제도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거제도로 가서 철조망 먼 곳에서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몇날 며칠을 포로수용소 주변을 돌며 철조망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결국 그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분단은 나의 첫사랑까지도 이렇게 앗아가 버렸다.

 

 

혁신청년동지회

 

전쟁이 끝났지만 나는 학교로 복귀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모든 삶이 척박한 시기였다. 1954년 오수 국민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어렵게 결혼은 하였으나 생활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던 나는 임신한 아내를 고향집에 잠시 머물게 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첫아기를 잃고 말았다.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다. 고민 끝에 '화성고무공업사'를 설립하여 '혁신청년동지회‘ 활동 자금도 벌고 생활비도 조달할 수 있었다. '혁신청년동지회'는 이승만대통령의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남북통일에 뜻을 함께 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꾸린 전국 조직이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대통령은 독재와 반공을 앞세우며 대한민국 건국의 기반을 다졌으며, 공공연히 북진통일의사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반하는 평화적 남북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 탄압을 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견딜 수 없는 고문에 시달렸다.

 

1956년 진보당을 결성했던 조봉암 선생에게 이승만 정권은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평화통일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나 혁신정당 활동은 위축되었다. 나 역시 그 탄압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해 위장이 필요했다. '혁신청년동지회‘를 조직하고 그 속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해왔던 나는 겉으로는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내부적으로 혁신청년동지회 소속 회원들을 교육하고 함께 투쟁방향을 잡는 활동에 주력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이었지만 목표가 분명했기에 할 수 있었다.나의 목표는 완전한 조국 해방과 하나된 조국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절박한 심정 뿐이었다.

 

 

4.19 혁명

 

1960년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견디지 못해 곪아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부정선거를 통해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의 이 폭거를 좌시하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이승만 정권 규탄집회가 벌어졌다. 대구에서 2·28 학생데모를 시작으로 마산에서 규탄집회가 크게 벌어졌다. 국민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에서 ‘이승만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노를 분출했다.

 

마침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 참가 후 실종됐던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어 시위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시체에는 돌멩이가 매달려 있었고,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바로 이 김주열군은 나와 같은 고향인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자라난 후배였다.

 

중앙대학 후배들 역시 경무대(당시 청와대) 앞으로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진격투쟁을 벌였다. 시위대를 저지하고 있는 경찰에 의해 중앙대학 후배 14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나는 그때 중앙대학교 도서관에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그 소식을 들으며 분에 겨워 펑펑 울었다. 사대주의에 젖은 반통일 독재정권을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는 의지도 불끈 솟았다. 후배들이 시신을 수습해와 학교에서 장례를 치렀다. 아직도 중앙대학교에는 그 14명의 후배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보존되어 있다.

1960년 4․19 항쟁으로 이승만대통령은 결국 하야했다. 무자비하게 총과 권력으로 국민들을 탄압하던 이승만대통령도 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평화적으로 장면정권으로 교체됐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4·19를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 장기집권에서 벗어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컸다. 4.19 이후 그해 7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나는 사회대중당 국회의원 박환생을 남원에서 당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부정선거를 한 투표함을 불태우고 재선거를 하여 어렵게 당선시켰다. 

 

 4.19 이후 그해 7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자유당은 겨우 두 석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민주당은 남북통일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혁신적인 학생과 노동자, 농민, 시민 단체들은 통합당을 결성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하였다. 

 

 

5.16 군사정변과 민주수호동지회

 

1961년 박정희 군수사령부 사령관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우리나라는 다시 비극적 도탄에 빠지게 된다.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대통령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 비해 10배가 넘는 민주화인사를 구속, 수감했다. 탄압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심각했다.

 

나는 탄압폭풍을 피해 잠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가 1961년 5.16 혁명이 일어난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서울 형님 집에서 전주에 있는 나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미리 아내에게 '12시 풍년호 도착'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전주역보다 한 정거장 전인 이리역에 도착했을 때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화급히 내려야 한다며 숨이 넘어 갈 듯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전주역에서 내가 경찰들에게 잡힐 것을 알고 미리 나를 피신시키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리역으로 온 것이었다. 나는 이리역에서 내려 어두어지는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처가댁이 있는 덕진으로 갔다. 아내는 나를 처가 집에 숨겨두었다. 집에 사복경찰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하루는 아내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나에게 오는 길에 미행을 당했다고 한다. 아내는 바로 오지 않고 몇 군데를 돌고 돌아 들려서 나를 다시 사촌 형님 댁으로 옮겼다.

 

아내는 1961년 그해 6월에 아들을 낳았다. 혁신동지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대중당 활동에 관여 했던 나는 탄압 국면에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동안 숨어서 지내다 1963년 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민주화와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과거 대학 동창생들과 '민주수호동지회'라는 비합법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강을성과 김태열, 박석주 등 조국의 민주화와 자주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동지들이 뜻을 모았다. 강을성 동지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국방부문관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이웃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었다. 그러면서 나와 함께 민주수호동지회 활동을 했었다. 내가 가입을 권유했다.

 

나중에 진두현이라는 동창생도 가담했다. 진두현은 중앙대학교 재학시절 좌익운동을 함께 하다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와세다대학에 다시 입학하여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가 재일거류민단 부단장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초청되어 몇 번 한국에 오게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진두현 동지의 방북이 문제가 되어 '민주수호동지회'는 재판과정에서 ‘통혁당 재건위’로 명명되었다.

 

 

구속

 

서울로 와서 1974년까지 10여 년 동안 민주화와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민주수호동지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나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진두현 동지가 10월 1일 제헌절 행사에 초대되어 한국에 왔다가 갑자기 구속된 것이다. 이어서 강을성 동지가 갑자기 군기무사에 의해 구속이 되었고, 그 친구가 구속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기무사에서 또 나를 구속시키겠다고 찾아왔다. 나는 그때 추석날 즈음이어서 집에 없었다. 형사들 20명이 들이 닥쳐서 그들은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면서 내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나중엔 아내를 데려가 대신 서빙고에 가두었다. 보름 후 나는 혹시 그들이 돌아갔는지 알아보려고 집에 가서 점심을 먹어도 되냐고 어떤 학생에게 부탁을 해서 전화를 했는데 딸아이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가택수색을 해서 딸아이는 헌법을 보여주면서 영장을 가져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영장이 없었다. 딸아이가 협조하지 않자 내 전화를 받도록 하기 위해 아내를 다시 풀어주었다.

 

나는 광주에 사는 김태열 동지를 만나 함께 피신을 하였다. 그러나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지고 고향에도 갈 수가 없는 나는 김태열 동지와 함께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나는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태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군기무사에 끌려가보니 엄청난 조작극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을성 동지는 민주수호동지회 활동을 하면서 국방부 내에 토요회라는 친목모임을 꾸리고 있었다. 몇 번 모임을 가졌나본데,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군 기무사에서는 나 박기래가 강을성 동지를 지시해 군부 내에 비밀조직을 결성한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비밀조직의 목적은 현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군부혁명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통일혁명당 재건당의 지령으로 내가 그런 활동을 한 거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허위조작 사실을 가지고 나를 협박했다. 강을성 동지는 그때 구속되고 나서 군부 내 반란음모로 2년 만에 총살형을 당했다. 내가 강을성 동지를 민주수호동지회에 가입시킨 것은 맞지만, 나는 토요회라는 모임도 알지 못할뿐더러, 통일혁명당 재건당의 지령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이다.

 

군기무사에서는 극본을 미리 짜놓고 끼워 맞추기 위해 엄청난 고문으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기고문, 물고문, 비행기고문 지금 생각하면 그때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처음에는 부인했다. 사실 토요회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부인을 하니 계속 고문을 했다. 몇 달에 걸친 고문 끝에 나는 허위로 "네" "네" "제가 했습니다."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때는 사실 죽을 각오로 허위자백을 했다.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도저히 괴로워서 못 견딜 때, 나를 차라리 죽여라 하는 각오로 허위자백을 했다. 그리고 난 죽음을 예고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로 기무사에서 짜놓은 각본대로 자백을 한 나는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오히려 태연했다.

 

더 이상의 고문이 없었기에 몸은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억울함을 가눌 수는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나의 아내도 지프차에 실려 왔다 갔다 수 없이 끌려 다니며 검찰청 조사까지 받았다. 그리고 나의 친구 진두현과 강을성, 김태열, 그리고 8촌 동생 박석주와 친지들도 구속되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하는 날 우리는 버스에 줄줄이 묶여 끌려갔다. 일제 식민지 지배의 비극은 해방 후에도 이렇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재판결과는 1심 2심, 고등법원, 대법원까지 모두 사형이었다. 몇 차례의 재판을 거쳐 76년 사형확정선고를 받았을 때 난 오히려 태연했다.

 

강을성 동지는 구속된 후 이미 군사재판에 회부돼 총살형으로 죽은 뒤였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체념했다. 사람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집착이 생기고 힘들어지지만 체념을 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그때 그랬던 것 같다.

 

 

옥중생활

 

사형수로 있던 8년간은 수갑이 항시 채워진 상태로 나는 지내야만 했다. 사형수로 확정이 되고 미결수로 구치소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방학 때만 면회를 왔다. 여름방학 때보다 겨울방학 때 조금 더 커서 오고 또 다음해에는 훌쩍 커서 오고……. 이렇게 철창 안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하고 무서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아내는 내가 서대문 구치소에 있던 9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번도 빠짐이 없이 면회를 왔다. 봄 한복 두 벌과 여름 한복 두벌, 초겨울 한복 두 벌, 추운 겨울 한복 두 벌을 교대로 빨아서 넣어 주었다. 사형수는 집행이 되는 순간에 기결수가 되는 것이어서 계속 미결수 상태에 있는 것이었다. 미결수는 한복을 입도록 되어 있다. 장사하면서 아이들 키우면서 아내는 그 일을 모두 감당해 왔던 것이다.

 

전기고문과·비행기고문 등으로 인한 후유증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 고문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대퇴골 수술, 척추골절 수술 등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장기수들 역시 고문 때문에 죽기도 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기나긴 옥중생활은 정의와 진리를 깨닫게 해 준 시간이기도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나는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책들을 이 자리에 소개하려고 한다. 나는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이와나미 출판사의 「신과학」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 동안 우주 속에 태양은 하나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는 태양의 7.5배 광열량을 가진 '안드로메다'라는 새로운 태양이 있다고 밝히고 있었다. 지금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과학지식을 얻게 해 준 책이었다.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일이다. 나는 사형수에서 무기로 감형되면서 독방생활에서 벗어나 합방을 하게 됐다. 그때 내가 있던 방에 스님 한 분이 들어왔다. 그 스님이 나에게 책을 권해주어 나는 열심히 읽었다.「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는 '우주 삼라만상 '무시무종, 무색무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우주 삼라만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색깔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라는 뜻이다.

 

나는 그 전에 내 구명운동을 해준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으로 구약, 신약성경을 5번 읽었다. 성경에서는 우주 삼라만상 '유시유종'이라며 창조설을 진리라 말한다. 한때는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반야바라밀다심경」은 그것과 상반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밀다심경이 진리를 말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 당시는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설도, 불교에서 말하는 유시유종도 참 진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8․15 해방 이후 여운형 선생님을 통해, 그리고 대학시절 동기,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익힌 철학만이 모순으로 둘러싸인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감옥에서 나의 철학이 더 확고해진 것이다.

 

이외에도 감옥에 있는 동안 다양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74년부터 83년까지 서대문구치소에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까지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수없이 들어오고 나갔다. 학생들은 흰 한복에 빨간 세모가 찍힌 수감번호를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빨간 세모 표시는 사형수에게 주는 기호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대학생 150여명이 수감됐는데 그 대학생들이 교도소 처우개선을 요구하고 집단행동을 벌였다. 그 덕택으로 전두환정권 시절에는 ‘자유급식’이 허용됐다. 그 전에는 공기밥으로 제한되어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어도 계속되는 허기는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유급식으로 바뀌고 나서는 양껏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단순한 생존의 요구지만 그 당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내 옆방에 여정남이라는 젊은이가 수감되어 있었다. 경북대학교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당시 서른 한 살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 청년은 최근 32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당사자 중 1명이었다. 지금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당시 여정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여정남은 1975년 봄 한 낮에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오후에 서대문구치소로 돌아왔다. 인민혁명당을 재건했다는 이유로…….그는 나에게 말했다.

 

"오늘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일 재심청구를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암 물론이지."

 

그러나 다음날 아침 7시에 문이 철커덕 열리고 간수들은 여정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끌려가면서 여정남은 큰소리로 외쳤다.

" 조국 통일 만세------! "

" 조국 통일 만세------! "

" 조국 통일 만세-------! "

" 조국 통일 만세-------! "

" 조국 통일 만세-------! "

" 조국 통일 만세-------! "

 

그의 외침은 죽는 순간까지 감옥을 울렸다.

 

그날 아침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 사건의 사형수 8명은 모두 처형되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채 24시간도 되기 전에 사형집행을 해버린 거였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기에 그렇게 급하게 사형집행을 한 건지…. 어떻게 인간들이 한 인간의 생명을 그리도 무참히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정남의 외침을 내가 죽더라도 나를 대신하여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의 아픔과 못다 핀 삶에 대한 열망까지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최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역사는 정의와 진실 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여정남을 죽인 사형제도와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고 있다.

 

1981년 한글날 서대문 구치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함께 수감 되어 있던 김태열 동지의 사형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서대문 구치소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중앙의 관리홀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옥사가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다. 이는 일본교도소들과 같은 구조이다. 서대문구치소는 독립문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기념관으로 보전 되고 있다. 사형 집행장은 일제시대에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많은 독립투사들이 처형된 장소이다.

 

얼마 전까지 한글날이면 소주 한 병과 과자를 사서 매년 사형 집행장에 찾아갔었다. 김태열 동지를 떠나보낸 사형 집행장은 아직도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곳은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과 대적하며 돌아가신 선열들의 고통과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1984년도에는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박석주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박석주는 나와는 8촌 형제로서 같은 사건으로 10년형을 받고 석방될 날을 몇 달 앞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교도소에서 의문의 살해를 당했다. 그가 수감되기 전 그의 아내는 뱃속에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석방될 날만 기다리던 아들은 10살이 되어서도 끝내 아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박석주는 전북대 공대를 졸업하고 한국기계에 다니고 있었는데 인품이 훌륭하여 학생회장으로 인기가 많은 누구나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끝내 그를 왜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구명운동과 석방운동

 

내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이 된 이후 나의 가족들은 민주화가족협의회와 더불어 석방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전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 어느 날 딸이 면회를 왔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버스를 대절해서 단체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어떤 소요사태가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전주 교도소장은 대표단 5명을 만나 요구조건을 듣고 수락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가끔씩 민가협 어머니들의 소요사태가 있고 나면 재소자의 처우가 조금 개선되었다. 사실 묶인 자들이 그 안에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밖에서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만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사람으로서 인식될 수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적인 사건으로 구금되어 있는 장기수들은 그 안에서 서화반에 들어가 활동을 한다. 왜냐하면 습자지로 사용하는 신문지가 서예방에 가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붓글씨 연습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신문을 보는 것이다. 장기수들은 서예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석방되던 한 사람이 모아서 가지고 나갔다. 아마도 딸아이가 그 작품을 받아 표구를 하고 전시회 리플렛을 만들어 안국동 백상기념관에서 ‘옥중동인 서화전’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개최하였던가 보다. 글을 쓰고 있는 작가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사진을 실었나 본데 나의 사진은 빈 공간으로 남겨 ‘전주교도소에 수감중’이라고 써 놓았는가 보다. 작가들의 이력도 함께 넣었는데 여기 올려 진 작가들이란 모두 20년씩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거나 아직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경성대를 다닌 사람 김책공대를 다닌 사람 등 대부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장기수들의 선한 얼굴들이었다.

 

 

석방

 

나는 감옥생활 18년만인 1991년 석가탄신일 특사로 석방됐다. 오랜 옥중생활에서 죽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출소하게 돼서 기뻤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나는 ‘민주수호동지회’를 중심에서 이끌었던 그때 그 마음 그 정신 그대로였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진보적 철학과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더욱 확고해진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출소하고 나서 둘째딸 집으로 갔다. 출소하고 나서 한동안 몸을 추스르는 중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중앙대학교 민주동문회 후배가 찾아왔다.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보호관찰로 인한 나의 신분적 처지로 인하여 걱정되기도 하면서도 반갑게 만났다. 후배는 자신의 선배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노라고 하면서 민주동문회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나의 삶에 대하여 회보에 실었으면 한다고 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나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살고 있는 젊은 후배와 오랜만에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열혈 청년이었던 과거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매우 감동적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후배에게 학교를 한번 가보고 싶었노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후배는 흔쾌히 동의를 하였고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실로 30여년 만에 모교인 중앙대학교에 발을 디뎠다. 가장 먼저 4.19당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한강다리를 건너 경무대까지 진격했다가 희생 당한 후배들을 기리는 4.19기념탑을 찾았다. 중앙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 탑은 내가 주유소 등 몇 개의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을 때 세운 탑이다. 4.19당시 후배들이 투쟁하다 희생될 때 도서관에 있었다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씻고 조국통일과 반독재 투쟁을 하던 후배들을 기리며 내가 할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주위의 동료들에게 제안하고 나도 많은 돈을 내서 62년(연대기억안남) 쯤인가에 그 탑을 세웠다. 당시 내가 있었던 도서관 앞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탑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당시 희생 당한 후배들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젖어드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학교 언덕을 오르니 한강과 인도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후배가 하는 말이 87년 6월 항쟁당시 중앙대학교 학생 수 천명이 인도교를 건너 투쟁에 참여하였노라고, 4.19때도 그랬고, 1980년 서울의 봄 때도 그랬다고, 그러면서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인도교를 건너면 정권이 바뀌었다고 그런 역사적인 투쟁을 하였노라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쟁 당시 인도교 주변의 일들을 깊이 회상하였다.

1950년 나는 한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건너고, 후배들은 인도교로 깃발을 앞세우고 한강을 건넜으니, 후배들의 심정은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완전한 해방을 이루려는 나의 심정과 똑같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조국통일과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걸음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진실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되잡으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헤쳐 온 수 많은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가슴 설레고 두려웠던 그 시절 그 당시의 사람들과 산천이 어른거려 말을 잊고 오랜 시간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이때가 인연이 되어 출소 이후 서울에서 살아온 기간 많은 시간을 중앙대학교 젊은 후배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토론과 이야기들을 하였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 후배들을 보면서 참으로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전대협은 어떤 조직인지, 어떻게 운영되는지, 또 주요한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의 정세는 어떠한지 정말로 많은 질문을 후배들에게 물어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후배들은 거침이 없었다. 무엇이든지 질문하는 족족 그때그때 즉각적인 대답이 나왔고 겁도 없어 보였다. 그 힘이 무엇인지 곰곰하게 생각을 많이 하였다. 내가 활동했던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에 비해서 합법적 운동공간이 열려있어 그런 것 같기도 하였는데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철저하게 대중운동 지향적이라는 생각에 정말로 많은 부분들이 동의가 되었고 후배들의 실력도 너무나도 많이 성장되어 감탄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나 후배들 중 일부가 남북경제문화협력단을 만들어 이북과의 직접적인 교류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보며 통일을 위한 든든한 동아줄을 잡고 대범하게 사업을 하였고, 대통령선거에서도 통일민주전선을 구축하여 대중이 원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선거전술을 가지고 능동적 전략을 세우고 투쟁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가 민주동문회 송년모임에 참여한 당시 신한국당에 입당한 이재오를 즉각 제명하는 원칙을 보면서 아 참으로 ‘우리 조국과 민족의 미래가 매우 밝구나.’하는 생각에 가슴 설레며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징역을 살고 난 이후 서울의 생활은 나름 바쁘고 의미 있는 나날이었다.

 

 

'통일학교'를 시작하며…….

 

석방 되고 2년 동안 딸과 함께 살다가 딸이 안산에 집을 얻어줘 조그만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93년에 처음 안산에 왔을 때, 나는 내 손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방안을 고민했다. 성동메리야스 공업사를 운영할 때 일본을 자주 방문했었는데, 그때 어린이 놀이마차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잠깐 배운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나는 어린이 놀이마차를 3대 만들었다. 그리고 2대는 다른 사람에서 빌려주고 한 대는 내가 직접 운영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린이 놀이마차 수입은 생계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린이 놀이마차를 하겠다는 결심은 잘 한 것 같다. 출소하고 나서 5년 정도는 안산에서 어린이 놀이마차를 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당시 보호관찰법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보호관찰 담당자는 내가 놀이마차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상부에 계속 보고하였고 '목마를 태우는 할아버지'로서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큰 안심을 준 셈이다.

 

놀이마차를 운영하며 나는 단순히 생계만을 꾸리며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보호관찰로 인하여 활동이 제약된 상태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이 나와 처지와 조건이 비슷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한 무언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산지역에 ‘노인복지회’라는 단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놀이마차를 두 사람에게 임대를 해주니 그분들이 자연스럽게 회원이 되어 자주 만나 노인복지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보니 안산에 연고가 없는 나보다 오랜 기간 안산에서 살아오신 분들이라 그분들이 다른 사람들을 소개 시켜주었다. 세무사도 있었고 자그마한 기업을 운영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얼추 10여명이 모여 ‘상록회’라는 노인복지를 위한 봉사단체를 창설하였고 내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 일이 93년경이니 징역살이를 하고 안산에 내려온 지 1년 만에 다시 사회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안산의 와동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와동에 거주한 지도 어느덧 20년 가까이 되니 징역을 살았던 세월만큼 된 것 같다. 와동은 나에게 조국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제 2의 삶을 살게 해 준 따뜻한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이다. 이곳 와동에 거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찾아 사귀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집을 방문하였고 나는 안산지역에서 나름 조국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일들을 회상하니 참으로 감개무량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떻게 알았는지 안산지역에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찾아온 것이 이때부터이다. 처음으로 찾아온 후배는 안산지역에서 오래기간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노세극이다. 노세극 후배는 지금도 가장 많이 챙겨주고 함께하는 동지이기도 하다.

 

노세극 후배가 나를 자주 찾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대학교 민주동문회의 정연철 후배가 찾아왔다. 민주동문회를 통하여 안산에 대선배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출소 후 서울에서 활동하는 후배들과는 자주 교류를 하였지만 안산에도 후배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에 반가움이 더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많은 후배들이 정기적으로 나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부분이 노동자들로 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조합운동을 하던 후배들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일본에 들어가 철공소에서 쎈방과 보루방을 돌리던 이야기며 야학에 들어가서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 하면 두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후배들은 나에게 많은 질문들을 하였으나 나는 단 한 번도 자세하게 대답을 해주지 못하였다. 후배들은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곤 했는데 내 나름 사정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말을 참으로 많이 아꼈다. 나는 오히려 후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자 하였다. 노동현장은 어떠한지 노동자들은 통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고, 어떠한 실천하고 있는지, 지금의 정세는 어떠한지 등등 이곳 후배들도 전의 서울 후배들처럼 거침이 없었다. 대답도 잘하고, 열성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안산은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라는 두 개의 국가공단을 끼고 있는 노동자 도시로서 일찍이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있어왔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 뿐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민주화는 노동자들의 몫이라느니, 자신들은 우리나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주력운동세력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고 참으로 말만 들어도 내 자신 30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후배들은 나를 데리고 안산을 소개해 주겠다면 반월공단이나 시화공단을 구경시켜 주었고, 별망성이나 상록수로 유명한 최영신의 묘도 안내하고 설명도 해주었다. 대부도 바닷가에 가서 밤늦도록 소주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낭만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선배님이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소동락해야한다고 하면서 술잔을 들고 건배할라치면 후배들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후배들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안산이 나는 정말로 좋았다. 말로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고민하고 실천하는 후배들과의 만남은 나의 생활의 활력이었고 즐거움이라 나는 서울에 있는 예전의 동지들과는 어느덧 만남이 점점 뜸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후배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후배들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하겠다. 더 늦기 전에 젊었을 때 열정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미완의 과업을 실현해야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나를 얽어매는 족쇄가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가석방의 상태라는 것 그리고 보호관찰법에 의하여 항상 경찰의 감시와 정기적인 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여라도 후배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나 않을런지 노심초사하기도 하였다. 상록회는 있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친목회가 되어 내가 활동하기에는 부족한 조직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어 있는 정세와 함께 할 수 있는 후배들이 있는 상황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히 후대들을 잘 키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나의 생각을 많은 후배들에게 이야기 하였고 후배들은 그렇다면 통일학교를 창설하시는 것이 어떠냐고 하여 나는 너무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흔쾌히 동의하였다. 우리는 몇 번의 준비모임을 통하여 통일학교 창설에 대한 준비를 하였다. 통일학교는 조국의 평화적 자주통일을 실천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동자와 시민을 대상으로 통일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커다란 방향으로 잡았다.

 

한참 통일학교 창설을 준비하는 와중에 2000년 4월 10일 남과 북은 6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최고위급회담을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발표를 하였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이 이제 그 결실을 맺는 것인가? 과연 정말로 남과 북의 고위급회담이 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아온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국가보안법상 소위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대통령이 만난다면 그것도 평양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에 하루도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많은 지인들과 만나 향후 남북관계와 우리의 운명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나는 97년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정말로 당선되기를 바랐다. 후배들과도 토론을 많이 하였는데 내가 만난 대부분의 후배들은 당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선택하고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토론하며 나의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았지만 나는 대중의 정서가 분명히 김대중 후보를 원한다고 생각을 하였고 특히나 조국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남북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후배들에게 권영길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대중의 선택을 외면하지 말아야한다, 실제적으로 대통령이 당선되어야 통일정책을 일관되게 펼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젊은 후배들의 생각이 진보적이고 평화적이었지만 나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아 몇 번에 걸쳐 나의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국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는 지속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였고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대가 이제 현실화 되는가라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2000년 남북 첫 정상들의 만남으로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자 내 삶에도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통일이정표라 불리는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나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사면복권을 받았다. 박정희정권 당시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을 사면해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의 무죄를 인정해 준 것이다. 나는 그 동안의 목마를 태우던 일도 정리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바쳐 내가 꿈꾸고 바래왔던 지향을 실천하기 위해 나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통일학교 창설을 시급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후배들에게 전달하였고, 후배들도 적극 동의하여 준비는 보다 더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최고위급회담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통일하교 창설을 긴장되게 준비하였다. 조직은 학교이니만큼 교장과 교감, 교무 그리고 학생을 반별로 나누어 담임선생을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매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로 하고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하였고 강의는 대략 5강, 시기는 한 달 정도로 하며 중간에 수련회 등 1박 2일의 졸업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나는 통일학교 창설을 준비하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후배들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사천리로 준비하는 것을 보고 그간 통일운동의 힘과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고 특히 노동자들을 주요한 대상으로 한다는데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조국과 7천만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자주통일을 위해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몇 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우리는 드디어 2000년 5월 00일 제1기 안산통일학교 입학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후배들에 의하여 통일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나는 현재까지 사람들에게 안산통일학교 교장이 나의 주요한 이력으로 소개하고 있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밤새 통일학교 교재에 들어갈 인사말을 며칠 동안 쓰고 지우고 또 쓰고 해서 완성하였다. 내가 주요하게 이야기한 것은 “모든 역사와 사회는 시대적 모순이 포화상태가 되면 반드시 필연적으로 변화, 발전해가는 것이 진리입니다. 과거 로마제국도, 히틀러의 독일제국도, 도조 히데끼의 일본제국도 다 역사적, 사회적 모순이 포화상태가 되어 하루아침에 멸망해 갔습니다. 그러므로 지구촌 인류는 역사와 사회의 철학적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가를 항상 깊이 연구한 선각자들이 나와서 민중을 교육하고 계몽하여 새로운 시대를 창조 건설해가야 합니다. 바로 오늘 통일학교 입학하신 수강생 여러분들이 장래 우리 민족의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깊이 가져주기 바랍니다. 그 길이 바로 통일의 길입니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강의를 수강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조국통일을 향한 투쟁과 열정이 나에게서 멈추지 않고 비로소 후대들에게 전해지게 되고, 조국통일을 위한 대장정을 함께하게 되었다는 마음도 담았다. 입학식 장소는 안산역 건너편에 원곡동에 있는 경로식당인데, 이곳은 원곡동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안산시의 예산지원을 받아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사실상 관에서 관리하고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으로 20년간 감옥을 살고, 출소한 우리사회에서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그런 내가 관공서에서 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인사말을 하게 된 것이 시대가 변화해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꼈다. 감개무량하였다.

 

100여명 정도를 수용하는 식당에 거의 80여명의 수강생들이 모여들었다. 수강생들의 나이들도 다양하고 직업과 하는 일들도 다양하였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소속되어 현장에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도 하고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을 위하여 통일학교에 입학한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는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노동자 뿐 아니라 젊고 활기에 가득 찬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안산민주청년회와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청년과 대학생들은 우리 통일학교를 활기차게 하는 원동력 이었으며 학교를 운영하던 한 달 내내 이들의 문예공연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지역에서 노점상을 하는 노점상연합 회원 몇 명이 또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 사회운동 단체 중에 전국노점삼연합회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고, 또 그 단체도 통일운동연합단체인 범민련에 가입하여 통일운동이 자기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미 통일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나중에 이 단체는 한 달에 한번 자신의 영업을 하지 않고 몇 개 노점상이 한곳에 모여 장사를 하고 그날의 수익금을 나에게 후원하기도 하였다. 오랜 감옥살이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나의 생활에 무척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고마움에 감격하기도 한다.

 

입학식은 민중의례, 교장선생인 나의 인사말 그리고 민주노총과 안산민중연대 대표의 축사가 있었고, 통일학교 운영과 교사 소개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날 인사말에서 그동안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들을 많이도 했다. 태어난 이야기, 일본에서 노동자로 살며 고학을 하고 해방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했던 이야기들,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을 위해 통혁당 활동을 했던 이야기, 그리고 역사발전의 필연적 법칙 등을 역설하였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남북최고위급회담의 의미와 기대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주어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수강생들의 눈망울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그 후 내가 안산지역에서 통일운동에 헌신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입학식이 끝난 후에 첫 번째 강의가 이어졌다. 강사는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용은 당면한 정세와 통일운동의 길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특히나 최근 추진되고 있는 남북 최고위급회담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질문들이 쏟아졌다. 좋은 강의 내용과 활기찬 질문과 토론에 통일학교는 아연 활기를 띄며 진행되었다. 기억은 많이 나지 않지만 남북 최고위급회담은 남과 북의 정상 간의 회담이라고 규정하였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만난다는 이야기에 나는 다른 그 어떤 내용보다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정상이 만난다니.......... 그러면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을 향한 중대한 합의를 이룰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강사 역시 그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매우 시의적절하게 통일학교를 창설하였다는 생각을 하였고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강의가 끝난 후 반별 토론이 있었고 발표가 있었다. 매우 활기찬 토론과 발표의 장이었다. 그런 후 뒤풀이에 참여하였다. 나는 많은 학생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토론하고 노래하며 참으로 즐거운 뒤풀이를 하였다. 나는 ‘노소동락과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사를 하였고, 여기저기 후배들이 나의 자리로 와서 인사하며 따라주는 술을 마다 않고 마셨다. 평소 술을 즐기는 나로서는 출소 이후 이날 가장 많은 술을 마셨다. 그렇게 통일학교 입학식의 밤은 깊어갔고 나는 후배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면서 남북 정상회담과 통일학교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희망에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지기도 하였다.

 

2000년 5월 내내 남북정상회담은 숨가쁘게 준비되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준비할 정부의 실무진이 평양으로 출발하였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수행할 경제인 명단의 발표 등을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통일학교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학교 2강이 끝나고 역사적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서 악수하고 포옹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영되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는 기쁨의 환호와 더불어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양에서의 정상회담은 연일 방송이 되었고 6월 15일 공동선언이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우리는 통일학교 3강을 진행하였다. 모여드는 수강생들은 너도나도 다 같이 정상회담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공동선언 전문을 써서 붙이고 전체가 한목소리로 읽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로 시작되는 공동선언문은 평양상봉의 중대성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통일의 전망을 밝히는 5가지의 내용을 발표하였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 하나 하나 조국통일을 위한 남과 북이 지켜야할 원칙과 방향으로 소중하고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2차 정상회담을 기약하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2차 정상회담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이어졌으니 독일이 통일을 이룩하는데 정상회담이후 20여년이 걸렸으나 우리나라는 그보다 더욱 이른 시기에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그 후 통일학교는 강의를 입학식을 진행했던 경로식당이 아니고 원곡동 동사무소 2층 강당을 빌려 진행하였다.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관공서에서 통일을 이야기하고 분단의 원인과 극복방향에 대하여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 6.15선언으로 인한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는 우리 통일학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우리 통일학교는 가장 먼저 혜택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통일학교 교감과 교사들 그리고 참여 수강생들이 열심히 해서 5강까지 무사히 마쳤다. 내가 교장을 맡고 있던 통일학교에서 80여명에 가까운 통일일꾼들이 배출되니 조국과 민족 앞에 나의 할 일을 했다는 자부심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졸업식날 졸업장 수여식과 개근상과 모범상등의 시상식이 있었고, 졸업생 모두가 통일실천단이 되어 8월15일까지 현장과 거리,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지식으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하여 통일운동에 매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후 통일학교는 매년 5월과 6월에 걸쳐 2007년까지 총7기까지 진행되었다. 그동안 매년 50명이상의 수강생들이 참여하였으니 400명이상의 통일학교 졸업생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2004년 위암 수술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통일학교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 울 뿐이다.

 

 

8.15 민족통일대축전

 

나는 2001년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에 초대됐다. 8.15 해방을 기념하며 남북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역사적인 자리에 내가 초대될 줄이야. 나는 정말 벅찬 마음으로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해방 후 여운형선생님과 함께 가고자 했던 길, 대학시절 혁신청년동지회활동을 하면서 염원했던 민족통일의 꿈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힘들었지만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맞는 길이구나, 오랜 옥중생활에서 죽지 않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박 4일 평양에서의 잊지 못할 일정을 보내고 안산으로 돌아온 나는 더욱 지역통일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나의 인생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대로 살아온 삶이다. 우리 민족은 민족에 대한 자주의식이 부족하고 사대주의에 젖어있는 정치인들에 의해 많은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21세기 들어 조금씩 방향을 잡아나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내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어긋난 우리 역사를 정 방향으로 돌리는데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먼저 간 동지들의 명복을 빌면서…….

 

2009년 4월 안산에서

박 기 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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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전북 남원 소작농 가정에서 출생

1939년 14세에 도일-오사카에서 주경야독

주간:후지모도 철공소 견습공

야간:이마미야 직공학교 졸업

1945년 조국으로 돌아옴.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1947년 중앙대 법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1950년 의용군 입대.(전라남도 담양에서 미군에게 포위, 지리산 입산)

1954년 서순자 여사와 결혼

1957년 전국혁신청년동지회 결성

1960년 전주에서 동아일보 기자 활동

1964년 민주수호동지회 조직 결성

1968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1972년 민주수호동지회 회장

1974년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

1975년 국가보안법 사형선고 확정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0년 20년으로 감형

1991년 석가탄신일에 석방

2000년 사면복권,안산통일학교 창설

2001년 815민족통일대축전 평양대회 참가

2005년 금강산 방문

2008년 개성공단 나무심기 행사 참가

2012년 1월 13일 향년 87세로 영면

안산통일학교 교장

안산주민연대 고문

안산(한마음)통일포럼 자문위원회 의장

사단법인 민족화합운동연합 공동의장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경기본부 고문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안산본부 고문v

 

 

박기래 선생님의 결혼40주년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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