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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의 딜레마

 

한참 논술 알바를 하고 있다. 이걸 하면 할수록 대학 논술 시험 대비는 학생 혼자서는 제대로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수능 시험에는 정답이 있지만 논술 시험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이 동영상 강의나 책을 보고 직접 문제의 답안을 작성해 보아도 그걸 평가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학생의 실력은 늘 수가 없다. 그리고 동영상 강의든 책이든 다 돈 주고 사야하는 것들이다. 물론 대학물 제대로 먹고 나이 들어서 다시 대학에 가는 사람들이야 예외겠다.

 

결국 학생과 학부모들은 논술 시험 대비를 위해 사교육비를 추가 지출해야 한다. 이는 대학의 입학전형이 자율화 될수록 사교육비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학, 혹은 대학교수 입장에서는 A를 읽어 보라고 하면 B로 이해하지 않고 A로 독해하고, B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C가 아닌 B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을 가르치고 싶어할 것이다. 논술 시험은 대체로 이런 걸 묻고 있다. 각 대학의 논술 시험 문제들 중에는 가증스럽거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도 있지만 논술 문제의 답안을 잘 작성할 수 있다면 확실히 대학에서 공부할 준비가 어느 정도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논술을 잘 할 정도라면 살아가면서 스쳐가는 정보들, 텍스트들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는 자질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소양을 갖춘 시민으로서의 자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논술을 잘 한다는 건 100%는 아니지만 살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교육 시장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학생들이 세상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소양을 갖추길 바란다. 정의롭게 살고자, 사회가 더 정의로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돈도 벌면서 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가 논술을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이를 비판하거나 한탄한다.

 

논술을 가르치는 학교들도 있지만 충분한 교육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논술을 제대로 가르칠 교사가 별로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육과정에 없기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에 대해서 사교육 시장에서 일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야유를 보낸다. 교사의 질을 우습게 안다. 정말 자질 없는 교사 수두룩하지만 자질 없는 학원 강사도 수두룩한 것 보면 교사 자질을 도마에 올리는 건 본질적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자기 가치를 올리기 위한 방법이다. 교사를 깎아 내려야 강사가 상승한다. 이는 윤리적 차원에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라는 게, '경쟁'이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두번째 이유인 교육과정 문제가 사실은 더 중요하다. 수능과목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도 학원 강사가 교사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그러고 보면 교사보다 잘 가르치지 못하는 학원 강사는 형편없는 초짜이거나 사기꾼이다!), 교육과정에도 없는 논술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는 학원이 학교보다 백 배는 경쟁력 있을 것이다.

 

교육과정에 없다면 그걸 담당하는 교사를 양성하지 않는 게 교육행정이다. 그러니까 학교가 논술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게 교사들이 자질이 없어서라고 한다면 교육현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교육과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논술의 딜레마는 바로 이것이다. 논술 능력은 대학생 뿐만이 아니라 시민에게도 필수적인 소양임에도 불구하고 그 배양을 사교육시장에 맡겨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요한 걸 학생들에게 아니 배우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 돈 주고 배우라고 할 수도 없다. 이 딜레마를 대학입시 제도 개혁, 혹은 그것을 포함한 대학평준화로 풀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대학평준화는 입시 압박을 없앤 중등교육까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자체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등학교까지의 교육은 경쟁적인 대학 입시에 기괴하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대학입시 경쟁을 없애버리면 중등학교까지의 교육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교육운동 진영을 아주 거칠고 무리하게 나눈다면 한 편은 대학개혁 쪽에 무게를 두고 있고 다른 편은 교육과정 정상화나나 학내 민주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양쪽 모두 논술의 딜레마를 풀기에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교육운동 진영의 코어 중 일부는 대학문제와 교육과정 문제, 나아가 여타의 교육 문제를 분리하지 않고 일관되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대체로 이들의 고민이나 나름의 대책들은 교육운동 진영, 더 확장된 진보운동 진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교육운동 진영에서 확산되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운동 주체들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고, 진보운동 진영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육운동 주체들의 정치적 레토릭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평준화가 무상교육과 함께 진보적 교육정책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는 대중들의 정치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복잡한 대안 교육 정책 중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진다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해결을 촉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코 이것과 무상교육만으로 교육문제가 높은 수준으로 해결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다른 교육 부문과의 충돌로 결국에는 이들도 좌초할 수 있다.

 

논술의 딜레마에서 깨달아야 할 점은 이렇다. 하나는 논술교육을 '학교가 못하는 걸 학원에서라도 한다'가 아니라 '학교에서는 못하게 하고 학원에서 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중등교육까지의 교육과정 개편 없이는 교육을 통해 실질적이고 궁극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목표인 '민주적 시민 양성'에는 다가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학평준화' 구호는 그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정치적 레토릭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