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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①

 

1.

 

내가 그에게 장갑을 던진 건 어제 오후였다.

 

 

여긴 어릴 적 기억밖엔 없는 언덕인데도 와 본지 얼마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회색 하늘과 함께 으스스한 나무들은 소년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한 쌍의 총을 가지고 왔다. 한 손으로 쏠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운 것들이었다. 열 발자국 내에서는 뭐든 맞힐 수 있는 총이었다.

 

그는 그의 사촌이 발명한 총을 가지고 왔다. 그의 사촌은 바다 건너 대륙에서 야만인을 사냥하기 위해 많은 총을 만들었다. 그의 사촌은 총으로 야만인을 사냥할 뿐 아니라 칼로 야만인의 머리 가죽도 벗겨 수집했다. 머리 벗기는 기술은 머리 가죽을 수없이 제공한 야만인들도 배워서 이제는 자기네들 기술인양 수선을 떠는 것에 그의 사촌은 분개하고 있었다. 언젠가 TV 화면에서 본 칼을 든 살인 청부업자의 표정을 떠올랐다.

 

결투를 진행할 사람은 아내의 집에서 몇 블록 건너 있는 보석상 주인이었다. 그는 길드에 속한 보석 세공 장인이기도 했고 한때는 도제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었던 알부자였다. 그 때는 왕궁 사람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의 가게는 명성이 아직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융성을 잊지 못한 귀족들만 찾아오는 곳이었다.

 

아내의 목걸이를 그 보석상에게 판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영감은 돈이 궁한 사람의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투를 진행할 시간만큼 장사를 못한다기에 돈을 줘야만 했다. 첫눈으로 상대편 호주머니의 돈을 볼 수 있는 그 늙은이는 그가 부탁을 했을 때야 기꺼이 수락했다. 다른 증인도 없이 이 영감만 데리고 온 것이 왠지 석연치 않았지만 이런 일로 돈이 더 드는 것도 싫었다.

 

보석쟁이는 공평함을 위해서는 나와 그가 똑같은 총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가 가져온 총이 현대 과학의 혜택을 입은 첨단 기술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명중률이 내 것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콜트 45구경 권총은 다루기 쉽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보석상의 주장은 결국 결투는 한 번에 결판이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가져온 총은 아버지의 것보다 훨씬 더 작고 가벼웠다. 나는 ‘총알’과 ‘화약’이 한데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 봤다. 그는 ‘총알’과 ‘화약’이란 말에 코웃음을 쳤다.

 

“‘탄두’와 ‘장약’이 분리되지 않았다고 해야지.”

 

보석상 주인은 내가 가져온 총은 제쳐 두고서 그가 가져온 총을 들고 나에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괜한 짓을 한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들었다. 그 시간만큼의 돈은 아까왔다. 그 늙은이의 구차한 설명은 마치 화가의 명성 때문에 제값보다 돈을 더 얹어 지불하는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날 외출했던 아내는 그림 한 점을 품고 들어 왔다. 아내는 언제나 볼 수 있게 경대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액자에 넣어진 그림이었는데 파리의 풍경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그림은 여태껏 보던 그림과는 좀 다른 데가 있었다. 선이 보이지 않았다.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 그림에는 붓 자국도 연필 자국도 없었다. 색깔도 실제와 똑같았다. 파리에 가본 적은 물론 없었지만 그곳은 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친구한테서 선물을 받았다고 했지만 아내의 친구들이나 친구의 남편들 중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없었다. 내가 그 그림을 여기 저기 뜯어보며 신기한 그림이라고 했을 때 아내는 내 손에서 그림을 빼앗아 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이건 포토예요, 포토!”

 

아내는 나한테 이런 건 쳐다 볼 자격조차 없다고 했다. 나보고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뭐냐고도 했다. 그녀의 과장되고 신경질적인 반응은 너무 엉뚱했다.

 

오래 전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처음 본 순간 나와의 결혼을 결심했었다. 내가 캔버스에 붓질을 할 때면 아내는 자기의 몸이 물든다고 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은 언제나 나와 아내의 사이를 즐겁게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나의 붓질에 관심이 없었고 얼마 후에 그 그림을 가져왔다. 그 그림은 사격 연습하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보석상 영감은 이번은 사격 연습이 아니니까 각자 총을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는 영감을 의심하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이라며 손에 쥐면서도 총에는 눈길도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보석상으로부터 총을 건네받을 때에도 그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자신감 이상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게 뭔지 확실치는 않았다. 영감은 나와 그의 몸을 여기저기 살핀 다음 결투 방식을 설명했다. 등을 맞대고 서서 영감의 구령에 따라 다섯을 셀 동안 한 걸음씩 나아가다 다섯을 세는 순간 돌아서서 상대편을 쏘는 방식이었다. 너무나 흔한 방법이었고 경험은 없었지만 이런 장면을 천 번도 더 상상해 왔던 나로서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내의 인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건 아내가 그를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들었을 때였다. 아내가 하루가 멀다 쫓아다니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는 시 외곽에 별채가 여럿 있는 큰 저택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곳에는 그런 중세의 성 같은 집들이 꽤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대도시인 이곳에 회사를 차려 놓고 보통 사람은 셀 수도 없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곳까지는 지하철도 노선 버스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사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두려울 만큼 부끄럽게 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곳에서 살 리가 없었다. 어쨌든 사람들을 피하는 그들의 수치스런 생활을 전혀 수치스러울 게 없는 내가 구경할 이유는 없었다.

 

 

지난 주 동네 술집에 갔을 때, 세탁소 친구가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돈 세탁업자라 했다. 돈을 빨아 준다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동전이야 문질러서 광을 내주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만 지폐는 물만 묻혀도 냄새가 고약해지는데 그걸 빨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전이든 지폐든 깨끗하게 닦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대가를 얼마나 지불할 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런 일로는 그는 부자일 수 없었다. 그는 실제로 백만장자가 아닐지도 몰랐다.

 

“어이 짤순이, 자네에게도 세탁하라고 돈을 맡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세탁소 친구는 화를 냈고 그날 심하게 다투었다. 어리석은 농담이었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돈을 세탁할 세탁소 주인은 없었다. 다음에 갔을 때 그는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다른 사람들과 즐거운 척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