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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머리하고는...

 

6월 15일. 어떤 이들에게는 대단한 명절이었을른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짜증 점철 신경질 만땅, 그런 날이었다.

 

 

1.

 

요즘 계속 그러했듯이 해가 딱 중천에 떠 있을 때 잠에서 일어나 보니 그새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민주노동당 총무실장.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점심 먹으러 나갔는지 받지를 않는다. 그래 점심 시간은 피해야지. 또 상상. 혹시 이 인간 4월에 준 파일 어디가 내팽겨쳐 놓아서 퇴직금액 정리한 거 다시 달라는 얘기하려고 하나? 입금했다고 친절하게 전화할 사람은 아닌 듯하니 이게 젤루 좋은 소식이긴 하다. 기대. 기대. 기대.

 

말걸기가 언제부터 '긍정적 사고'를 했다고 이 따위 기대를 했는지. 참, 어리석고 순진한 놈. 점심 식사를 다 했을 법한 시간에 전화를 했다. 사무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했다. 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뭐야? 전화해 놓고선 전화도 안 받고. 끊자마자 전화가 왔다. 잠깐 일처리한다고 전화 받는 타이밍을 놓쳤나보다. 그래, 일하다 보면 전화 못받을 수도 있지.

 

총무실장이 퇴직금 지급을 미뤄달랜다. 국승 때부터 일한 L씨도 퇴직금 1,300만원을 청구했는데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다. 당 사정 잘 알지 않느냐. 돈 없다. 7월에 중앙위와 당대회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약속을 지키세요. 이미 그런 사정 다 감안하고 약속한 거잖아요."

 

"총장님은 지급해 주겠다고 하시던데요."

 

돈 관리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고려할 것도 많고 어쩌고 어쩌고.

 

"하루 지났습니다. 지급해 주시죠."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잉?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지. 전화 돌려서 의견을 다 확인할 수밖에.

 

"전화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선거라고 연락도 잘 못하고 지낸 사람들에게 이제야 안부도 묻게 되었다. 전화통에 대고 5명과 수다 진하게 떨었다. 다들 그러지. "뭐 하자는거야!"

 

띠리링띠리링.

 

"다들 오늘까지 지급해달라고 하네요. 4시 30분, 그러니까 은행업무 마감시각까지 넣어주세요."

 

씨발씨발. 혼자서 성질을 버럭버럭 내면서 빨래 개고 설거지하고 있던 차, 4시 경 우수사랑이 전화를 했다. 돈은 역시나 안 들어왔단다. 말걸기는 총무실장하고 통화한 후에 총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때 주요행사가 있었을 터이니. 우수사랑이 총장이랑 얘기해보겠다고 한다. 다시 우수사랑이 전화. 총장이 미안하단다. 지금 지방에 있어서 그러는데 16일(이게 오늘이지 아마?)에 서울 올라가서 바로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단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면 하루는 참아줘야지 뭐. 설거지 끝내고 우체국 가서 내용증명 보내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래도 신경질은 이빠이다.

 

 

2.

 

15일에는 하늘이 예뻤다. 날씨도 좋았다. 무엇보다 전날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에 시야도 깨끗했다. 이런 날 사진 찍으러 나가야 했었다. 청명한 날 기다렸는데 이게 뭐람. 오후내 한참을 전화 붙들고 있었으니 사진도 못찍고. 이게 또 성질머리 건드린다.

 

성질나 죽겠는데 사진은 무슨 사진! 이런 날 사진 찍다가 성질 못이겨 D200 부셔버릴지도 모른다. 덜컥 겁이 나더라. 이때부터 집안의 물건들이 말걸기에게 소리친다. 혹은 눈치를 본다.

 

"제발 저는 집어던지지 마세요. 저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ㅠㅠ."

 

이 불쌍한 것들은 말걸기와 함께 있다가는 박살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고 있었다. 폭력의 충동은 자신에게도 괴롭다. 순간 머리 꼭대기에 기가 몰리면서 미쳐버린다. 그 직전에 스스로 제어한다. 그 제어는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고 식은땀도 난다.

 

지난 2월부터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물건 집어던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힘이 세지 않길 다행이지.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파괴의 짜릿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약자를 폭행하겠지.

 

스스로에게 겁을 먹은 말걸기는 무작정 집을 나갔다.

 

 

3.

 

놀자. 그래도 사람들하고 노는 게 좋겠지. 전화 한바퀴 돌렸다. 전화 안 받는 사람. 일하는 사람. 이미 멀리 집으로 가버린 사람. 대놓고 '싫어' 하는 새끼 등등. 그래 일을 안하니 놀아줄 사람도 없구나. 이땜에 또 성질이 버럭버럭. 말걸기 이 새끼는 인생을 어떻게 산거야? 바보 새끼.

 

혼자서 무작정 종로로 나갔다. 무작정은 아니고 꼭 사야할 책(꼭 읽어야 한다기보다는)이 있어서 영풍문고 갔다. 책을 사고 여행 때 쓸 메모책도 사고.

 

짝꿍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동료네 문상을 갔는데 이왕 함께 간 김에 자주 모이지도 못하는 신규들과 놀겠단다. 다행이다. 짝꿍은 말걸기의 신경질내기, 짜증부리기에 참으로 인내를 잘한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괴로와하고, 그 다음 선을 넘으면 화를 낸다. 그럼 둘은 싸운다. 하루 이틀 말도 안할걸. 이 정도 상태면 짝꿍과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더라.

 

 

4.

 

시내를 뱅글뱅글 돌다가 영화나 볼까? 하필이면 시간이 맞는 게 엑스맨뿐이냐. 이거 혼자 먼저 봤다가는 짝꿍이 실망할텐데. 같이 보기로 했으면 같이 봐야지. 우이씨. 그래, 소위 예술영화 좋아하는 씨네큐브 가자. 15분 기다리면 되겠군.

 

영화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전화를 한다던 '각'이 전화를 하지 않는다. 행여 놀고 있으며 껴보는 것도 좋을 듯해서 영화표도 사지 않고 말걸기가 먼저 전화를 했다.

 

만화 보다 보면 '100t'이라고 써있는 망치로 맞는 장면이 있다. 딱 고장면. 시베리아-몽골 여행 멤버 하나가 7월 초까지 일해야 한단다. 여행 꽝내자는 거야? 뭐야, 긴 시간 여행이라 짝꿍이 섭섭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 예상보다 많은 돈 땜에 피가 마름에도 불구하고 가기로 했고, 이 동네가 워낙 까다로워 불안한 것도 많은 데다가 여행 정보 개판이라 진을 빼가며 예약까지 다 하고 준비물 목록까지 다 만들어 놓았는데 이제 와서?

 

파괴욕구 게이지 상승. 그래도 불쌍한 '각'을 위하야 차분차분 의견을 나누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28일에 함께 못 가도 7월 초에는 이르쿠츠크로 날라오라고 하자. '각'이 전화를 해보더니 16일(이것도 오늘이군)에 확답을 하겠다 했단다.

 

혼자서 게이지 관리하다가 씨네큐브에서 영화보는 것도 놓쳤다. 이날 참 전화도 많이 했네. 밧데리가 나갔다. 정동스타식스에 가서 영화볼 요량으로 그곳으로 향하던 차 편의점이 있길래 밧데리 충전을 맡겼다. 30분은 걸린단다. 스타식스에 가서 시간표를 보니 밧데리 충전 땜에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진짜 풀리는 거 없네. 우이씨. 맥도날드에서(진짜 오랜만에 갔다) 콜라 한 잔(오랜만에 마셔보네) 마시며 러시아 여행 가이드북을 찬찬히 읽으며 '기대'를 누리려고 노력했다. 약간 진정된 모드. 밧데리 찾고 다시 보니 스타식스 밤샘 패키지 상영이 눈에 들어왔다. 엑스맨이 껴 있을 게 뭐람.  봐 버릴까? 안 돼! 안 본 척하면 되지 않을까? 안 돼!

 

 

5.

 

뱅글뱅글 혼자서 돌아다니다 날이 밝은 다음에 집에 들어왔다. 맘이 편해졌다. 밝아져서 짝꿍 먹을 것도 챙겨주고 방긋 웃으면서 빠이빠이, 잘 다녀와 인사도 했다. 하룻밤 성질 죽일 시간을 허락해준 짝꿍에게 고맙더군. '집에 안 들어 올거야?' '집에 언능 와서 잠이나 자!'가 아닌...배려의 말과 함께...

 

 

6.

 

지난 밤 돌아댕기는 게 힘들었는지 오늘은 늦게 일어났다.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걸 보니 퇴직금 지급은 안되었군. 치. 에휴. 몰라.

 

우수사랑의 메시지가 여러번 왔다. 우수사랑은 지금 참 힘들게 생활을 꾸리고 있다. 하던 공부도 마저해야 하고 아이 둘도 자주 아파서 돌봐야 한다. 돈 벌기 쉽지 않다. 수개월 인내한 퇴직금이 당장 손에 들어와야 한다. 말걸기야 짝꿍한테 당분가 비비면 되지만.

 

이런 상황인데 진짜 안주네... 다시 성질 게이지 상승. 어쩔 수 없다. 갈 길을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