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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7
    야성의 꽃다방2(3)
    껌뻑
  2. 2008/06/12
    보고 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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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깃발 아래에도, 모든 깃발 아래에도
    껌뻑
  4. 20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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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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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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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11/15
    성소수자 생존의 문제-차별금지법 1인시위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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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11/14
    차별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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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꽃다방2

야성의꽃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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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읽기 1

어제는 아라리오 서울에 가서 이지현이라는 작가의 개인전을
오늘은 갤러리 루프의 한일 교류 미디어 전시를 봤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아라리오 천안에 가서 중국 작가 치우지에의 전시를 봤구나.. 치우지에는 보다가 너무 웃어서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남성작가의 자기 연민, 그것도 국가의 정체성과 자신을 거침없이 동일시하며 역사와 자신의 삶을 보는 방식, 별 다를 것도 없는 자위성 변주가 치우지엔의 작품에서도 또.!(정말 촌스라와~) 스위스에서  조부모와 함께 고립된 유년시절, 유학생활을 한 작가는 소위 1세계에 대한 엄청난 열등감과 비하를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치환한 듯. 그런데 그 방식이 또 여성을 대상화 하는 거다. 중국의 급속한 자본주의를 재현할 때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창녀'의 이미지 인데다가 '목화밭의 마오(2007)'라는 작품은 어떻고.. 헐.. 게다가 작가 자신은 카메라와 붓을 벗삼아 중국 회화의 화려한 풍경 속에 시선의 주체가 되어 있다. (얼씨구) 작품의 밀도나 형식의 새로움도 그것이 담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 자체를 미화시킬 수는 없는 게다.  그나마 1993년 작품(제목이 잘 생각이 안나네)이 제일 나았다. 목화밭의 외롭고 가녀린 소년인 작가는 타자로써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빽빽한 목화밭 속에서 그는 이국의 문물과 떨어져 잠시 몽상에 빠져 있고 자신이 만든 '중국'이란 가상의 공간 한 역사 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있었다. 오로지 이 작품만이 나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안전한 거리에서 쿨~한 척 무언가를 비판하는 관조자가 아닌 그림 안의 대상으로 자신이 만든 세상을 용감하게 보여주며 '소통'이란 걸 시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명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의 이지현 개인전은, 애초에 관조자로 주체(작가)가 있지 않았다.  일상의 물건들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에 거대하게 나타나고 사적/공적 공간의 위계를 과감하게 허물어 버리고 있다. 작품의 형식에 이런저런 미학적 수사를 달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걸 다 빼고서라도 이지현의 작품은 타자로써 위치지어져야만 하는 주체의 고민, 사적/공적 영역의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않은 작가 자신의 곤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런 질문들을 담은 작품이야말로, 삶에 관여하고자 하며 자신의 위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불완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시선이 아닐까.


미디어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기술적인 현란함만을 좇는 작가들이 많은 듯 하다.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군이 미디어 작품들인 것 같다. 매체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고,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와의 유기적인 연관성에 대해 고민이 적을 수록 어정쩡한 조합이 나올 확률이 많다. 신기함, 볼거리가 아닌 미디어가 가진 급진적 소통방식을 감동이라는 정서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음...


그래도... 이 모든 작품들, 전시회에 감사를!

마음이 많이...좋아졌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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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깃발 아래에도, 모든 깃발 아래에도

어제  집회에 갔다.  

익숙한 얼굴을 만나 같이 걸으며  담배를 피고 수다를 떨다가, 그들과 헤어지고 난 이후엔  

인사동과 광화문에 새롭게 선 보인 컨테이너 설치물을 관람했다.

 

거기에 바른 기름을 만지며 말도 못할 느끼한 상상을 떠올리며  한껏 웃다가, 기어이 컨테이너를 타고 넘어 보겠다는 어떤 사람의 몸부림이 퍼포먼스처럼 느껴져셔 잠시 감상도 했다. 사람들의 '내려와'라는 구호는 단막극이 넘어가는 효과음 같기도 했다.

 

 

뭔가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남들이 쓰다 만 하얀 분필로 조계사 앞 도로에 잠시 낙서를 하고 씨네 큐브 앞까지 걸어가서는 잠시 담배를 피기도 했다. 그러다가  번듯한 흥국생명 건물의 가로등에 서서 오줌을 지리는 한 사람의 뒷태를 보면서 통쾌함과 불쾌함을 동시에 느끼며, 그것도 재미있다면서 잠시 즐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장 흥미로왔던 건 내가 어디에선가 만났던 사람들, 한 자리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각기 다른 깃발들 아래에서 볼 수 있었던 거다.

 

 

퀴어로써 영화를 만드는 어떤 사람은, 한독협 깃발아래에서 볼 수 있었고

여성주의자이며 대학원에서 공부중인 어떤 사람은 모대학의 깃발 아래에서

청년회 회원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인 어떤 친구는 지역의 깃발 아래에 서 있었다.

노동자이며 성소수자인 그녀는 무지개 행동의 깃발아래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고

노동자이며 여성주의자인 지인은 산별노조의 깃발 아래에서 비장한 모습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나도 어딘가에 서고도 싶기도 했지만

나의 머리와 다리는 계속 머뭇머뭇거렸다.

 

어디에 속할 만도 한데 그러기엔 머리 속에  많은 모순적인 구호가 들어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집단을 뒤집어 쓰지도 못하니 자신있게 말하기도 쑥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간극과 틈들,  많은 차이들과  느슨한 연대의 공간은

 내게  어떤 깃발 아래에도 설 수 있는 자유를 주기도 했다.

 

 

어떤 깃발과 함께든,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결코 섞일 수 없었고, 법접할 수도 없었던 (없다고 생각했던)

어느 지역의 이성애 가족 모임의 어머니, 아버지, 자녀들 안에서

레즈비언 커플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화물연대 사람들의 정연한 대오에 끼어 들어 애인과 함께 과격한? 민가를 한 소절 따라 부르기도 했다.

 

 

항상 레즈비언이거나,

여성이거나, 

아이를 가지고 싶은 비혼이거나,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활동가이거나

지역의 주민이거나

등등

 

그 중 하나로써 내 삶의 모순과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구분과 단절, 분열적인 존재로써의 내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로 내가 흐르고, 모든 위치들을 넘나들며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어제 집회는 해방적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물론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서운하다는 눈빛을 보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의식'의 내용이란 무얼까.

 일상적 영역에서 변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존재의 모순을 통합하고, 내 안의 분열을 치유하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런 질문을 떠올리게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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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반 세대를 잇는 캠프 <육색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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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미니스트 전파 프로젝트 '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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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라디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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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나로는 충분치 못한 해

여전한 나를 옹호하는 건, 나를 연명하는 데, 삶의 이유를 끌어 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

그렇지만, 다음 해와 그 다음해 ,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까지

여전한 나로는 충분치 못한 것 같고

변하고 나아가고 부딪히고, 상처를 받고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한 나는 이제 나도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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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음악

갈증나고 까실까실한 삶에 음악이 있다는 건 축복이야.

 

새로운 음악이 듣고 싶다.

재즈, 언니들이 부르는.

 

다행인지, 전에 몰랐던 음악 샘을 하나 찾았다.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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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생존의 문제-차별금지법 1인시위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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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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