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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13
    말해주세요
    하루

2016/06/29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막내가 쓴 계약서.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건 각서라고 부를 거같다.

막내는 정말 대단한 아이다.

늘 새롭다.

 

월요일 저녁, 마당에 열린 매실을 따서 씻고 있는데

옆에서 퀵보드 타고 놀던 막내가

갑자기 생각난 듯 이런 저런 질문 및 다짐을 하더니

내 반응이 시원찮았는지

(매실 닦는 데 몰입해있느라)

혼자 계약서 까지 작성한 후

뽑아달라고 함.

 

내가 감격해하며 오빠가 도와줬어? 하니

그냥 "순하게" 증인을 서줬다고 한다.

(순순히 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

 

꼭 지켜질 약속이네.

화를 안내도록 노력하겠지만

화를 내더라도 미안하다고 하겠다니까.

 

사실 어제 밤에 큰애에게 화를 냈고 마음이 불편해서 이 사진을 보며 위로받았다.

사실 화는 아이가 나한테 냈다.

3월부터 진행했던 40차시 강의의 마지막 날이었고

나는 수고한 강사들에게 저녁을 대접한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나보다 더 지친 상태로 큰애를 데리러 간다길래

좀 안돼보여서 내가 가겠다 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앉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집을 나와 운전을 해야했다.

밤의 온수리는 여전히 내게는 무섭다.

그래서 늘 바깥길로 다니는데

큰애의 학원은 내가 사고를 당했던 골목 바로 전 블럭에 있어서 늘 긴장된다.

그런 긴장을 감수하면서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데려오는데

큰애가 집에 가서 또 공부를 하겠다는 거다.

내가 "빨리 자야 키가 커"라고 했더니

갑자기 큰애가 "아, 공부해야 한다고!"라고 화를 냈다.

나도 화가 났다.

 

"우리는 각자의 스트레스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니

니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엄마인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여러 일들을 잘 처리하고 와서

지친 몸으로 너를 이렇게 태워주는데

내 하루의 마지막을 니가 망칠 권리는 없다."

 

여기까지 말한 후에도 걔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나는 다시 화가 났다.

 

"나는 너가 학원다니는 것도 맘에 안든다.

나는 사교육금지 원칙을 지키고 싶었지만

니가 하도 졸라서 학원을 보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수업받고 또 8시반까지 자율학습하고

다시 또 학원에서 10시까지 공부하는 건

내가 보기엔 미친 짓이다.

그리고 집에 가서 공부를 또 한다고?

공부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거 아니니?"

 

역시나 아무 대답이 없길래 나도 입을 닫고 그냥 집에 와서 씻고 잤다.

이런 관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던 거다.

돌아와서 하루 전에 막내가 내게 건넨 계약서를 보니 잠시 위로가 됐지만

뭐  그애도 자랄 것이고 멀어질 것이고 또 떠나겠지.

 

큰애를 키울 때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그리고 그 애 또한 나를 사랑했기에

우리는 참 사이좋은 모녀였다.

4살 때였던가 말을 시작하고 종알종알 사랑스럽게 떠드는 아이에게

"나중에 너 언니들만큼 크면 엄마가 미울 때가 있대. 그 때 나 미워하지 마!"

라고 부탁을 했고 아이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 때 한창 모성이데올로기와, 사춘기 여자애들은 왜 엄마를 그렇게 미워하나,에 대한

책들을 보고있을 때였거든.

막내의 계약서는 잠깐의 위로, 그리고 긴 쓸쓸함을 남김.

다 그런거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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