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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27
    집에 가자
    하루

[펌]버스 안에서

그 옛날 알엠 시절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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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려는데 어떤 여자가 디지털 카메라로 차량번호, 운전사 이름 등이 적혀진 버스정보푯말을 찍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고, 그가 봤든 안봤든 이제 사진은 불편사항의 내용과 함께 해당 버스회사로 전해질 것이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 또한 그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역시 이 땅은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 업은 여자,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노인, 장애인은 버스운전사의 밥이거나 화풀이 대상이다. 거의 대부분 아기를 업고 버스를 타야하는 나는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그 모습을 드러내면 일단 긴장하기 시작한다. 이 도시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속도전의 전사가 되어야한다. 빨리 타고 빨리 내리지 않으면 핀잔을 듣기 때문이다.

내가 최초로 버스번호를 적었던 건 내 어머니를 닮은 한 할머니가 구박당하는 것을 본 날이었다. 운전사가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려하자 그 할머니는 버스 앞을 막아섰고 할머니를 태울 수밖에 없었던 운전사는 심하게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다음 버스를 타면 될 거 아냐? 죽을려고 환장했구만”

할머니는 바로 전 버스도 그냥 지나가버려서 그랬다고 더듬더듬 변명을 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운전사는 계속 화를 냈고 할머니는 조용히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무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절뚝절뚝, 비틀거리며 뒷자리로 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심하게 갈등했다. 할머니 편을 들어서 한 판 싸움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입 닥치고 모른 척 조용히 갈 길을 갈 것인가. 결국 나는 비겁한 침묵을 선택했다. 변명을 하자면 아이 업고서 하는 싸움은 힘들다. 자칫 등에 업힌 아기가 울음이라도 터뜨리게 되면 곤란할 뿐 아니라 괜히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버스 번호와 운전사 이름을 외워두었다가 내리자마자 수첩에 적었다. 집에 도착하면 꼭 신고하고야 말리라.

하지만 나는 신고하지 못했다. 대신 몇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버스 운전사들이 행동이 느려터진 우리들을 못마땅해하는 건 시간에 쫓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버스 운전사들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 걸까? 밥은 먹고 다닐까? 운전사들이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끼어들기를 하고 행동이 느린 우리들에게 화를 내는 건 원래 성격이 못돼먹어서일까?

하기사 언젠가는 그런 일도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모르지만 버스를 타고 보니 중년의 남자승객이 버스 운전사에게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내내 화를 내던 승객은 내리면서 “평생 버스 운전이나 해라”라는, 아마도 자신이 최악이라고 생각했을 악담을 퍼부었고 묵묵히 문을 닫고 버스를 출발시키던 운전사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저런 놈들이 알고 보면 다 버스기사예요.”

나는 지금 버스운전사들이 다 못됐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어릴 적 내 친구들의 꿈 중에는 버스운전사도 있었다. 항상 붙박이로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미지의 어떤 곳에서 와서 또 미지의 어떤 곳으로 떠나는 버스운전사들은 멋져보였다. 저마다 하나씩의 사연을 안은 여행객들, 그들의 여행을 책임지는 버스운전사는 분명 멋진 직업일 수도 있다. 수많은 곳을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지각색의 사연들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버스운전사는 낭만적인 직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05년의 이 도시에서 버스 운전사들은 한 사람의 피고용인일 뿐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려는 버스회사 사장에게 승객은 단지 머리수로 계산될 뿐이고 버스 운전사 입장에서는 정해진 배차간격을 지키는 것이 최대임무가 된다. 이렇게 자본에 포섭된 노동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을 수밖에 없다. 개인은 시스템 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폭운전의 책임을 버스 운전사에게만 물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그들을 시간에 쫓기게 만든 배차간격이 문제이고 노동조건이 문제인 것이다. 노동조건에 대한 개선 없이 교통불편신고엽서로 운전자 개개인의 성과를 따지자는 건 승객들더러 감시자가 되라는 말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노동자감시시스템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등에 업힌 아기와 함께 울며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감시자나 밀고자가 되고 싶지 않다.

노동에 지친 버스 운전자들은 만만해보이는 노약자에게 화풀이를 하고, 대놓고 싸울만한 강심장을 갖지 못한 나는 자주 교통불편신고엽서를 떠올린다. 그러나 결국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나 또한 노동자감시시스템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자본의 힘을 빌려 복수하려는 거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야겠다.   2005년 5월 8일 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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