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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8
    나의 친구
    하루

나의 친구

'남다른 그들'이 영화를 찍다
액션! 하기도 전에 카메라 돌리고
NG 또 NG '실수 연발' 지적장애인들
● 7명 함께 제작·출연한 '나의 친구' 29일 상영
"아무도 우리 얘길 안들어" 학창시절 '왕따' 경험 다뤄
일 끝난 뒤나 주말에 촬영
학교마다 촬영 거부로 차질 20분짜리를 열달 만에 완성
"우리가 이걸 찍다니" 감격
조백건 기자 loogu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진석아, 카메라 쳐다보지 말라니까. 자 다시 간다. 액션!"

감독 손미숙(여·30)씨의 지시가 떨어지자 검정 점퍼를 입은 오진석(27)씨가 뚜벅뚜벅 지하철 역사(驛舍) 안을 걸었다. 황창현(18·서울관광고 3년)군이 옆을 지나치자 오씨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잘 지냈어?"

"NG! 진석아, '오랜만이야'라는 대사를 빠뜨렸잖아."

24일 오전 9시 서울 봉천동 지하철역 안에서는 영화촬영이 한창이었다.

촬영에 참가한 7명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이들은 전문 배우와 감독이 아니었다. 감독 손씨와 주연인 오진석씨, 각본을 쓴 조규준(37)씨, 촬영을 맡은 곽수호(30)씨, 음향을 담당한 한정제(31)씨 등 7명은 모두 지적장애인이다. 오씨는 2급 지적장애인이고, 나머지 6명은 증상이 경미한 3급 지적장애인이다. 지적장애 3급은 지능지수(IQ)가 50~70이며 2급은 35~40에 불과하다.

이들이 모여서 직접 각본을 쓰고 연기와 촬영, 음향, 감독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날은 지적장애인인 주인공이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특히 괴롭혔던 한 친구를 만나는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영화로

장애인단체 '함께 사는 세상' 회원이었던 이들이 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1년 지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부터다. 화면에 자신들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던 이들은 돈을 모아 10만원짜리 중고 디지털 카메라를 산 뒤 직접 서로를 찍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는 영화 제작 강의도 들었다.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업체인 '푸른영상'의 류미래(여·37) 감독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강의를 들었다. 류 감독은 "워낙 끈질기게 졸라서 강의는 했지만 이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3년간 '영화 만들기 수업'을 받은 이들은 지난 3월부터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이들은 저마다 세차, 우편물 발송대행 등의 생업을 갖고 있어 촬영은 주로 일과 후나 주말을 이용했다. 제작비용은 서울시로부터 지원받은 장애인 인식개선 지원사업비 2000만원을 '밑천'으로 삼았다. 영화 제목은 '나의 친구'. 20분짜리 단편 영화다. 한 지적장애 고등학생의 학창시절 이야기다.

영화 속의 사연과 장면엔 이들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수시로 불량학생에게 돈을 뺏기는 장면은 곽수호씨의 사례다. 친구들이 "바보야!"라고 호칭하는 것은 오진석씨와 조규준씨 경험이다. 한 친구가 주인공에게 "힘들면 나에게 이야기해"라고 격려하는 장면은 초등학교 때부터 간질을 앓아왔던 한정제씨가 한 친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장면이다. 한씨는 "수업시간에도 발작을 일으킬 때가 있어 친구들이 모두 나를 멀리했는데 한 친구는 내 옆에 앉아 '발작이 오는 것 같으면 내 손을 꼭 잡아'라고 나를 위로해줬다"고 말했다.
▲ 24일 오전 서울의 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서 지적장애인들이‘나의 친구’란 제목의 영화를 찍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10개월 만에 만든 20분짜리 단편영화

시나리오 작성에서 촬영까지, 영화를 만든 지난 10개월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각본을 쓴 조규준씨는 "이야기를 엮는 것 자체가 내겐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7월까지 연기와 촬영 연습을 하고 바로 촬영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두 달 이상 늦어졌다. 학창시절을 그린 영화여서 학교와 학생들을 섭외해야 했는데, 연락을 하는 학교마다 "(장애인 영화 찍으면) 학교 이미지 안 좋아진다"며 거절했기 때문이다. 서울 봉천동에 있는 서울관광고등학교가 10월 14일 촬영을 허락해줬다.

촬영에 들어가서는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연인 오진석씨는 장애 정도가 가장 심하다. 그는 촬영이 시작됐는데도 연기는 않고 카메라만 멀뚱히 쳐다보기 일쑤였다. 다른 동료들이 "진석아, 여기 봐!"라고 손을 흔들어야만 시선처리가 됐다. 고함 지르듯이 대사를 해 감독이 "조용히 말하라"고 하면, 카메라 앞에서 "조용히, 조용히"라는 대사만 반복하기도 했다. 세 문장으로 이뤄진 대사를 외우지 못해 4시간 동안 같은 장면만 촬영하다, 결국 한 문장으로 대사를 고친 적도 있었다.

감독과 스태프들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적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집중력과 기억력이 다소 떨어진다. 감독인 손미숙씨는 "액션!"이라고 연기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자주 카메라 촬영 버튼을 눌렀다. 촬영 장비를 현장에 두고 철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카메라 충전하는 것을 깜빡해 다음 날 촬영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태프들은 "왼손에 붐마이크, 오른손에 카메라"라고 되뇌며 장비를 챙겼다.

왜 이들은 그토록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대본을 쓴 조규호씨는 "우리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영화가 아니면 아무도 우리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영화를 찍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장면 촬영을 마친 이들은 편집을 거쳐 29일 대학로에 있는 '하이퍼텍나다'에서 완성한 영화를 첫 상영한다.

모니터로 자신이 찍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던 곽수호씨는 "내가 이 장면을 찍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며 웃었다. 웃고 있는 곽씨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입력 : 2008.12.25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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