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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23
    후반작업을 하면서
    무탄트
  2. 2006/06/09
    긴 여정...
    무탄트
  3. 2006/04/11
    절망의 깊이,,,(1)
    무탄트

후반작업을 하면서

요즘은 ‘새만금 이야기 1-절망과 희망의 기록(2002 ~ 2006)’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녹취를 하고 있지요.

새만금과 인연을 맺은 2002년과 방조제공사가 끝난 2006년.

구성의 문제,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의 골격을 산발적으로 메모하고 있습니다.

회상(回想)-새만금을 둘러싸고 각기 다른 위치에서 움직였던 사람들의 기억과 변화.

지역주민, 환경단체의 활동가, 학자, 새만금을 반대하는 사람, 새만금을 찬성하는 사람... 물론 저도 있지요. 이들이 회상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보충촬영의 내용.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내 느낌의 범위일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그간 내가 안고 담아낸 만큼의 깊이와 감동이면 좋겠습니다. 부담 갖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자전적 영상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한올한올 촘촘히,

근데 테이프가 왜 이리 많은거야... 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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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정...

6월 2,3,4일 새만금에 다녀왔습니다. 근 두 달만인 듯 합니다.

일상으로 드러나는 세계는 예전과 별다름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고 자연은 그들대로 의연한 듯 했습니다. 은식형도 정우형도 종덕형도 용석형도 어머니들도 상용도..., 그 자리에들 있었습니다.

상용이가 차려주는 맛난 저녁을 마치고 초승달 아래로 은식형과 살금갯벌로 향했습니다. 짱뚱어가 우뚝 서 있었고 갯벌바닥의 감촉은 딱딱했습니다. 난생 처음 은식형의 통곡을 들었고 그렇게 밤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카메라를 짊어지고 갯벌에 들어 섰습니다. 채 두 달도 되지않아 갯벌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습니다. 갯골은 메워지고 채워져 하얀 염기의 흔적만이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시간 가량 걸어걸어도 발바닥 아래 갯벌은 발가락 사이 부드러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갯일 나가는 경운기는 먼지 풀풀 풀어제키며 바다를 향할 뿐이었습니다. 난생처음 자동차가 갯벌 위를 질주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부르릉”에 엉킨 먼지는 우리 시대가 낳고 있는 비극의 질주인 듯 했습니다. 작년 여름 갯일 나간 경운기에서 30분가량 누워있다가 눈 부스스 뜨면서 사방팔방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게들과 갯벌생명체들의 살아 생동거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움직임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살며시 뻘에 발 내려놓을라치면 주변 10미터는 순식간에 도미노효과처럼 조용해 졌습니다. 감수성이 아주 뛰어난 친구들이었습니다. 조심조심 걸어가면 내 주위는 폭탄을 맞은 듯 잠잠하지만 10미터 원 밖의 세상은 여전히 그 친구들의 일터일 뿐입니다. 지금은 황폐의 경계선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조금씩조금씩 바다를 향해 움직일 뿐입니다. 맨발로 돌아 나왔습니다. 그레 한쪽에서는 정우형 은식형 상용이가 작년에 짓다 만 화장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샤워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레 앞 텃밭에는 옥수수와 콩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갯일 나갔던 경운기가 딸딸딸 소리내며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레 앞 나무의자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슬픔과 아픔, 절망이 가득한 일상을 그래도 우리 모두가 살아낼 수 있는 건 “새만금 방조제는 곧 허물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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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깊이,,,

 

지난 토요일 계화도를 다녀왔습니다.

오후에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에 상경한 빠듯한 일정이었습니다. 일요일 12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낙기선생 취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 몇시간을 제외하고는 술을 마셔댔고 육신은 혼미했지만 마음은 슬프고 우울했습니다.

지난 3월 16일의 대법원 판결과 19일의 집회 취재 이후 지역상황은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서울에서는 ‘새만금 운동의 성찰,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대화마당이 있었습니다. ‘다시 시작’이라고들 하지만 그 의미도 명확히 다가서지 않았고 서럽게서럽게 짓밟히고 부서진 희망 위에 바로 이어지는 ‘다시 시작’은 너무도 가혹하다 싶었습니다. 절망을 안는 것도 삶의 위치와 모습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절망의 깊이, 내 삶의 위치와 모습, 내게 있어‘다시 시작’을 되짚어야 했습니다.

4년 간의 발걸음이었지만 부안행 차표를 손에 받아 쥔 순간 두려움이 찾아들었습니다. 부안에서 계화도행 버스정류장을 향하면서 계화도 어머니와 형님들을 만날까 두려웠습니다. 계화도 입구에서 정우형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그레를 향하면서 바다와 갯벌내음이 두려웠습니다. 갯벌에서 경운기 몰고 나온 욕쟁이 용석형 얼굴에서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한때 얼굴 좋아보이던 술 좋아하는 형의 얼굴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편히 농담던지듯 소주값 빌려달라는 형에게 소주잔 내밀 수 없었습니다.

은식형이랑 양지포구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재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술 마시는 것 말고 뭐가 있겄는가?” 눈물이 고였습니다. “형,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죠” 내가 형에게 한 말입니다. 내 두려움의 치유없이 내뱉은 말, 슬펐습니다. “내 역할을 다 한 것이제, 이젠 다 놓아부려야 돼”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3월 19일 집회에서 형수님의 말씀이 계속 내 가슴을 내리찍고 있었습니다. “은별이가 그래요. 엄마,,, 새만금 막히면 우린 뭐 먹고 살아요?” 그때 형수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은식형 앞에서 눈물이 고였습니다. 술자리 파하고 그레가는 길, 상용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눈물 흘렸습니다.

끝내 내 카메라 가방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난 새벽에 서울로 왔습니다.

4월 24일 방조제는 바다를 생명을 갯벌을 틀어막을 것이고 우리는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안을 수 있는 절망의 깊이는 어디까지인지 두렵기만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들과 앞으로 더 상처받아야 할 마음들이 두렵기만 합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크기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네 삶의 원천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두렵기만 합니다. 새만금의 봄이 두렵기만 합니다.

(정우형과 용석형, 은식형은 계화도 주민입니다. 은식형과 형수님은 부부이고 은별이는 두분의 따님입니다. 상용이는 갯벌을 사랑하는, 계화도에서 갯벌 사랑을 실천하는 참청년입니다. 그레는 지역주민들이 만들고 가꾸어가는 갯벌배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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