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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인터뷰 녹취를 하고 있지요.
새만금과 인연을 맺은 2002년과 방조제공사가 끝난 2006년.
구성의 문제,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의 골격을 산발적으로 메모하고 있습니다.
회상(回想)-새만금을 둘러싸고 각기 다른 위치에서 움직였던 사람들의 기억과 변화.
지역주민, 환경단체의 활동가, 학자, 새만금을 반대하는 사람, 새만금을 찬성하는 사람... 물론 저도 있지요. 이들이 회상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보충촬영의 내용.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내 느낌의 범위일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그간 내가 안고 담아낸 만큼의 깊이와 감동이면 좋겠습니다. 부담 갖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자전적 영상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한올한올 촘촘히,
근데 테이프가 왜 이리 많은거야... 으으으,,,
요 며칠전부터 시작된 나와 아내와의 대화방법입니다. 소통의 한 방식인 셈이지요.
곰곰 돌아보니 아내와 인연맺은 게 지난 1993년, 후년이 되면 결혼 10주년이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누구나 으레 다 그러하듯 연애와 결혼 초기의 애틋한 신뢰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마모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부부싸움도 하게 되고 가족의 구성원으로써 아옹다옹 뒤엉킨 삶을 살기 마련이지요. 헌데 살아오면서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두고 아내와 난 어느정도의 막힘없는 소통을 하고 있는지, 참 어려운 화두였습니다.
지난 휴일 아내에게 공책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칭찬하고 싶은 것, 감사하고 싶은 것, 서운한 것, 불만인 것, 고쳤으면 하는 것, 변했으면 하는 것, 하고 싶은 말말말...... 공책에 적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해명, 변명, 주장, 생각 등의 댓글을 적고......
아내의 마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연애 초기의 가슴으로 아내를 보고 싶었습니다. 곰곰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즉자적인 반응으로서가 아니라 아내가 말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고민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아내에게 내보이기!
아침 출근길, 아기자기 고운 필체로 씌여진 아내의 글은 기쁨바이러스였습니다.
요 근래 연말 핑계대면서 술독에 빠져지내는 정신없는 시절을 이야기할라치면 참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불현듯 며칠 전부터 멍한 뇌리에 스치는 것들이 줄줄 있었습니다. 스물네시간 아이랑 지내는 아내의 일상이... 불혹을 바라보는 내 삶의 모습을 성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삶의 행복과 가치의 반경을 문득... 이후 20여 년 동안 무엇을... 그 이후는 또 무엇을... 정답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인생이 사지선답형의 딱 부러지는 문제라면 좋겠다는 가벼운 상상을 펼쳐본 것도 아니고 간혹 복잡할 때 일기처럼 끄적이는 노트에 순간순간 마음에 새겨지는 잡다함을 훅 뿌려대는 것에 만족했지만 내게는 심상치 않은 화두였습니다. 인간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회귀본능을 자극받는가 봅니다. 어떤 이는 보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간혹 본적이 있지만, 무슨 말인고 하면 나, 가족, 가까이 있는 주변을 점점 더 세심히 바라보게 되더라는 겁니다. 가족이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나누며 식사하고 텔레비전의 일일드라마를 보며 미소짓고 품에 안은 아이가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버리는 순간 온 몸으로 느끼게 되는 새근새근 아이의 호흡소리는 내 안의 평온을 이루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일상의 소소함이 이처럼 위대할 수 있음은 비단 나만의 깨달음일런지?
아님 나만이 잊고지낸 소중함일런지? 그것이야 어찌되었건 가장 가까이에 있음으로 해서 소외시되었던 내 안의 망각을 꼼꼼이 되살려 볼 작정입니다.
창밖에서 휘이잉 불어대는 바람의 시작은 지구 반대편 혹은 열대지방의 후끈거림일 수도 있으나 지금 내 살갗을 스침은 찬공기의 엄혹일 뿐.
2006년 7월 19일 비 갠 날 문득...이후 생긴 넓디넓은 공백 후에 채워지는 간만의 여유로움입니다.
사무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어둠침침합니다.
사람들의 발걸음과 얼굴표정은 늘 그러했듯 일상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문득 제각각의 삶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의 세계를 보고싶다는 욕망이 솟구칩니다.
한평생을 살아내면서 짊어져야만 하는 인생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평온한 영혼의 안식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말입니다.
삶의 길을 떠올려 봅니다.
그 길에서 마주했고 마주하고 있고 마주해야 할 길 위의 동무들을 그려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옷깃만 스쳐 지나칠지언정 둥글둥글한 부드럽으로 길 위의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품고 살아내는 것이, 뾰족한 날카로움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쿡쿡 찌르는 일상의 조급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말입니다.
내 조급함이 길 위의 동무들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 돌이켜 봅니다.
내 길만을 바라보고 다른 길을 보지않은 협소함이 아니었는지 곰곰 되돌아 봅니다.
....................
....................
....................
음,
음,
음,
높고 깊은 흐린 하늘 뚫어져라 응시해 하늘의 참뜻 담아내고 싶은 오늘입니다.
일상으로 드러나는 세계는 예전과 별다름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고 자연은 그들대로 의연한 듯 했습니다. 은식형도 정우형도 종덕형도 용석형도 어머니들도 상용도..., 그 자리에들 있었습니다.
상용이가 차려주는 맛난 저녁을 마치고 초승달 아래로 은식형과 살금갯벌로 향했습니다. 짱뚱어가 우뚝 서 있었고 갯벌바닥의 감촉은 딱딱했습니다. 난생 처음 은식형의 통곡을 들었고 그렇게 밤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카메라를 짊어지고 갯벌에 들어 섰습니다. 채 두 달도 되지않아 갯벌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습니다. 갯골은 메워지고 채워져 하얀 염기의 흔적만이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시간 가량 걸어걸어도 발바닥 아래 갯벌은 발가락 사이 부드러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갯일 나가는 경운기는 먼지 풀풀 풀어제키며 바다를 향할 뿐이었습니다. 난생처음 자동차가 갯벌 위를 질주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부르릉”에 엉킨 먼지는 우리 시대가 낳고 있는 비극의 질주인 듯 했습니다. 작년 여름 갯일 나간 경운기에서 30분가량 누워있다가 눈 부스스 뜨면서 사방팔방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게들과 갯벌생명체들의 살아 생동거림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움직임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살며시 뻘에 발 내려놓을라치면 주변 10미터는 순식간에 도미노효과처럼 조용해 졌습니다. 감수성이 아주 뛰어난 친구들이었습니다. 조심조심 걸어가면 내 주위는 폭탄을 맞은 듯 잠잠하지만 10미터 원 밖의 세상은 여전히 그 친구들의 일터일 뿐입니다. 지금은 황폐의 경계선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조금씩조금씩 바다를 향해 움직일 뿐입니다. 맨발로 돌아 나왔습니다. 그레 한쪽에서는 정우형 은식형 상용이가 작년에 짓다 만 화장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샤워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레 앞 텃밭에는 옥수수와 콩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갯일 나갔던 경운기가 딸딸딸 소리내며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레 앞 나무의자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슬픔과 아픔, 절망이 가득한 일상을 그래도 우리 모두가 살아낼 수 있는 건 “새만금 방조제는 곧 허물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점심을 먹고 저녁 6시무렵 퇴근시간이 되면 배는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그 반응은 곧바로 뇌로 전달된다. 밥이 아니라 술,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코올중독 초기증상이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하지만 그 걱정으로 인해 스트레스증후군은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고?-기억상, 슬픔과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퍼부은 기억이 딱히 기억되지 않기 때문. 술은 내게 언제나 에너지의 창조였다.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누구는 내게 말했다. 조선시대 선비 가라사대 척했겠지만 한량의 테두리는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맞는 말이다. 그 누구는 계화도의 정우형이다. 요즘은 막걸리가 나를 희롱한다. 술이 나를 희롱한다. 그래서일까? 내부의 목소리는 가끔 술을 놓아버리라고 한다. 그 울림은 희롱의 정도가 지나친 것에 대한 반작용의 수위를 넘어서는 진지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진지해지고 있다. 술을 놓아야 되겠다는 진지함. 술 마시는 오래된 습관을 하루아침에 놓기는 힘들 듯 하다. 술 자체도 좋지만 술과 내 육신과 영혼, 나와 술과 사람들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은 힘듦을 더 힘들게 한다. 대안도 생각 안해 본 것이 아니다. 희롱당하는 횟수를 줄인다든가 술 대신 차를 마신다든가 술 종을 획기적으로 바꾼다든가, 여하튼 대안이 어찌 없겠는가. 문제는 내부의 목소리에 따라 손과 발이 움직이고 몸이 꿈쩍해야 하는 일일진대. 화면 우측 하단에 4:27의 숫자가 떠 있다. 배는 반응을 보이기 위해 준비운동 중인가 보다.
문득 어제의 술자리가 스친다. 별음자리표 형, 짱돌, 아나키스트 부부, 그리고 깊은 소개를 나누지 않았던 아나키스트 부부의 후배. 인사동의 막걸리와 삼합. ‘홍어가 막걸리를 만났을 때’-사장님은 인심좋은 대머리 형님이시다. 짱돌과 한 주전자 비우고 다른 분들이 들어오고 열한시 넘어까지 몇 주전자가 비워졌다. 그리고 신촌지하철역 근처의 맥주집에서 한잔 더. 별음자리표 형과 조직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직은 위대한 정신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또 다른 울타리가 만들어지고 그 울타리는 위대한 정신을 고립시키기도 하고 열린 소통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일반적이지만 한편 보잘것 없는 경험주의적 예시를 들먹거리면서.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건 힘이고 연대지만 한편...? 인간의 역할을 이야기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인간과 조직 그리고 변화 그리고 변화의 방향. 그러고보니 나는 언젠가부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듯 하다. 희망한다. 자유. 희망한다. 열린지평. 자유와 열린지평은 나의 한편, 속박과 닫힌세계의 또다른 한편이다. 이 난제를 위해 오늘도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일까?
6시가 되기도 전 이미 배의 반응은 뇌로 전달되었나보다. 밥이 아닌 술.
(짱돌은 만능활동가이고 별음자리표는 자칭 길거리 가수다).
지난 토요일 계화도를 다녀왔습니다.
오후에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에 상경한 빠듯한 일정이었습니다. 일요일 12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낙기선생 취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 몇시간을 제외하고는 술을 마셔댔고 육신은 혼미했지만 마음은 슬프고 우울했습니다.
지난 3월 16일의 대법원 판결과 19일의 집회 취재 이후 지역상황은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서울에서는 ‘새만금 운동의 성찰,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대화마당이 있었습니다. ‘다시 시작’이라고들 하지만 그 의미도 명확히 다가서지 않았고 서럽게서럽게 짓밟히고 부서진 희망 위에 바로 이어지는 ‘다시 시작’은 너무도 가혹하다 싶었습니다. 절망을 안는 것도 삶의 위치와 모습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절망의 깊이, 내 삶의 위치와 모습, 내게 있어‘다시 시작’을 되짚어야 했습니다.
4년 간의 발걸음이었지만 부안행 차표를 손에 받아 쥔 순간 두려움이 찾아들었습니다. 부안에서 계화도행 버스정류장을 향하면서 계화도 어머니와 형님들을 만날까 두려웠습니다. 계화도 입구에서 정우형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그레를 향하면서 바다와 갯벌내음이 두려웠습니다. 갯벌에서 경운기 몰고 나온 욕쟁이 용석형 얼굴에서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한때 얼굴 좋아보이던 술 좋아하는 형의 얼굴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편히 농담던지듯 소주값 빌려달라는 형에게 소주잔 내밀 수 없었습니다.
은식형이랑 양지포구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재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술 마시는 것 말고 뭐가 있겄는가?” 눈물이 고였습니다. “형,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죠” 내가 형에게 한 말입니다. 내 두려움의 치유없이 내뱉은 말, 슬펐습니다. “내 역할을 다 한 것이제, 이젠 다 놓아부려야 돼”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3월 19일 집회에서 형수님의 말씀이 계속 내 가슴을 내리찍고 있었습니다. “은별이가 그래요. 엄마,,, 새만금 막히면 우린 뭐 먹고 살아요?” 그때 형수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은식형 앞에서 눈물이 고였습니다. 술자리 파하고 그레가는 길, 상용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눈물 흘렸습니다.
끝내 내 카메라 가방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난 새벽에 서울로 왔습니다.
4월 24일 방조제는 바다를 생명을 갯벌을 틀어막을 것이고 우리는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안을 수 있는 절망의 깊이는 어디까지인지 두렵기만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들과 앞으로 더 상처받아야 할 마음들이 두렵기만 합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크기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네 삶의 원천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두렵기만 합니다. 새만금의 봄이 두렵기만 합니다.
(정우형과 용석형, 은식형은 계화도 주민입니다. 은식형과 형수님은 부부이고 은별이는 두분의 따님입니다. 상용이는 갯벌을 사랑하는, 계화도에서 갯벌 사랑을 실천하는 참청년입니다. 그레는 지역주민들이 만들고 가꾸어가는 갯벌배움터입니다)
민중탕제원, 그후 10년...은 비전향장기수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10 여년 전인 1995년 제기동 약령시장 한 구석에 민중탕제원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자리에 예전 그대로 있지만요. 민중탕제원과 인연맺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그곳부터 먼저 소개하는 게 나을 듯 하군요.
얼핏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민중탕제원은 비전향장기수 선생님 세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권낙기, 임방규, 이두균 선생님. 두균선생은 찾아오시는 분들의 진맥을 보셨고 그 결과에 따라 침과 약으로 처방하는 일을 하셨지요. 낙기선생은 처방전에 따라 약재를 조제하시는 일을, 방규선생은 약을 다리고 포장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참고로 이분들의 호칭은 상호간 성함 뒤에 선생을 붙이더군요. 나이 불문하고 말이에요. 낙기선생은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 사이에선 막둥이였습니다. 통혁당사건으로 빵살이를 시작했으니 해방이후 또는 625이후 빵살이를 시작한 선생님들에 비하면 한참 아래였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젊음으로 인해 낙기선생은 일복이 터졌구요. 방규선생은 가장 나이어린 빨치산 정치담당 중대장이셨습니다. 두균선생은 625 이후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신 우리들의 기억 저 편에 붉게 물들어 있는 간첩이었지요.이분들과의 인연은 저를 비롯한 몇 명이 불시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 그 당시 저를 비롯한 몇 명은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기로 중지를 모았습니다. 일종의 워크숖이었던 셈이지요. 머리를 맞댄 결과 ‘민중탕제원의 삶과 희망’이라는 타이틀로 비전향장기수 이야기를 풀어헤쳐 보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6미리 카메라도 없었고 해서 슈퍼비디오테이프를 원본으로 하는 집채만한 카메라를 사용했지요. 당시는 고생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잊지못할 추억이 된 거지요. 불쑥 찾아 뵙고 저희 의도를 말씀드렸습니다. 참 어려운 결정이셨을 텐데 촬영허가를 해 주셨을 때의 고마움이란 아시는 분은 다들 아실 겁니다. 해서 2주 동안의 동고동락이 시작되었지요. 이때 푸른영상 촬영팀도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 행사장에서 간간이 만나기도 했습니다. 10년 후 김동원 감독님의 송환이 발표되었지요. 저는 아직 송환을 보지 못했지만 정성과 열정이 영상 한 장면장면에 배어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들의 영상물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민망했고 그럴 의도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들과의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어느새 10 여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에게도, 민중탕제원의 삶과 희망을 만든 저희들에게도, 사람 살아가는 세상도... 지금의 저는 사회로 진출하여 영상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두균선생은 송환되셨고 낙기선생과 방규선생은 이곳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계시구요.
이년전인가 삼년전인가 어느날 이사를 하면서 책들과 자료를 뒤적이면서 한 쪽 구석에서 먼지쌓인 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겉면에 민중탕제원01, 02, 03... 인덱스가 되어있는 비디오테이프였지요. 예전의 촬영테이프 원본과 편집본, 최종본이 그대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민중탕제원, 그후 10년은 시작되었습니다.
10년 전. 국가보안법과 한국현대사의 거창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의 시작은 그리 큰 거대담론은 아닙니다. 세 분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호흡하고 싶지요. 그분들의 일상 속 말씀과 흘러가는 움직임에서 우리가 안아야 할 한민족의 아픔과 이 시대의 자화상을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잔 비가 하늘을 거쳐 대지와 콘크리트 바닥으로 흩뿌리는 날입니다. 왠지 스산하기도 하지만 봄기운의 넉넉함은 내 마음의 따뜻함으로 자리잡기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길을 걷다 바로 옆의 가로수 가지가지에 몽골몽골 샘솟는 연두빛 고운 생명에게 방긋 미소지어주는 봄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트랜드의 불감증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가 봅니다.
인터넷을 활용한 시기도 그렇고, 메일을 사용한 시기도 그렇고,,,
언제 시작했느냐가 그 기준이 될 수 없을지언정 소통의 방법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블로그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변 말을 들어보니 아이러브스쿨과 싸이월드 등의 흐름 뒤에 단연 인기를 끄는 것이라던데 관심을 가지고 이러저리 뒤져보다 여기까지 이른 것이 바로 이삼일 전의 일입니다. 솔직히 손쉽게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나태함이 그 직접적인 요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이의 블로그를 기웃거리며 혼자서 이것저것 클릭하면서 새로운 기능들을 습득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거창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편안함과 솔직함으로 내 마음과 몸짓을 그때그때 날적이 할 작정입니다.
늦은 시간 나만의 공간인 일기라는 형식보다는 용기와 민망함을 더 머금어야 하겠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저와 인연을 맺고 있는 아니 인연을 맺어갈 이들 또는 우연히 이곳을 휘리릭 스쳐갈 모든 이들의 마음의 표현방식이 어떠하든 그 내면에는 따뜻함이 존재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탄트이야기는 말그대로 돌연변이 이야기입니다. 제 별칭을 무탄트 그리고 이곳을 무탄트이야기라고 지칭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미친세상을 미친 눈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식입니다. 무탄트로서 제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든 세상이든 무탄트의 껍질을 벗어내는 과정이 시선의 끝자락에 이르는 피할 수 없는 여정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새만금이야기와 민중탕제원 그후 10년은 지금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새만금이야기는 벌써 만 4년이 되었습니다.
민중탕제원 그후 10년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 차차 나누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완연한 봄날입니다.
콘크리트 뒤덮인 일상 속 눈망울 싹틔울 대지의 아들딸들에게 미소지어주는 잠시의 여유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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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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