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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깊이,,,

 

지난 토요일 계화도를 다녀왔습니다.

오후에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에 상경한 빠듯한 일정이었습니다. 일요일 12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낙기선생 취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 몇시간을 제외하고는 술을 마셔댔고 육신은 혼미했지만 마음은 슬프고 우울했습니다.

지난 3월 16일의 대법원 판결과 19일의 집회 취재 이후 지역상황은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서울에서는 ‘새만금 운동의 성찰,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대화마당이 있었습니다. ‘다시 시작’이라고들 하지만 그 의미도 명확히 다가서지 않았고 서럽게서럽게 짓밟히고 부서진 희망 위에 바로 이어지는 ‘다시 시작’은 너무도 가혹하다 싶었습니다. 절망을 안는 것도 삶의 위치와 모습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절망의 깊이, 내 삶의 위치와 모습, 내게 있어‘다시 시작’을 되짚어야 했습니다.

4년 간의 발걸음이었지만 부안행 차표를 손에 받아 쥔 순간 두려움이 찾아들었습니다. 부안에서 계화도행 버스정류장을 향하면서 계화도 어머니와 형님들을 만날까 두려웠습니다. 계화도 입구에서 정우형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그레를 향하면서 바다와 갯벌내음이 두려웠습니다. 갯벌에서 경운기 몰고 나온 욕쟁이 용석형 얼굴에서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한때 얼굴 좋아보이던 술 좋아하는 형의 얼굴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편히 농담던지듯 소주값 빌려달라는 형에게 소주잔 내밀 수 없었습니다.

은식형이랑 양지포구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재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술 마시는 것 말고 뭐가 있겄는가?” 눈물이 고였습니다. “형,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죠” 내가 형에게 한 말입니다. 내 두려움의 치유없이 내뱉은 말, 슬펐습니다. “내 역할을 다 한 것이제, 이젠 다 놓아부려야 돼”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3월 19일 집회에서 형수님의 말씀이 계속 내 가슴을 내리찍고 있었습니다. “은별이가 그래요. 엄마,,, 새만금 막히면 우린 뭐 먹고 살아요?” 그때 형수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은식형 앞에서 눈물이 고였습니다. 술자리 파하고 그레가는 길, 상용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눈물 흘렸습니다.

끝내 내 카메라 가방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난 새벽에 서울로 왔습니다.

4월 24일 방조제는 바다를 생명을 갯벌을 틀어막을 것이고 우리는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안을 수 있는 절망의 깊이는 어디까지인지 두렵기만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들과 앞으로 더 상처받아야 할 마음들이 두렵기만 합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크기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네 삶의 원천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두렵기만 합니다. 새만금의 봄이 두렵기만 합니다.

(정우형과 용석형, 은식형은 계화도 주민입니다. 은식형과 형수님은 부부이고 은별이는 두분의 따님입니다. 상용이는 갯벌을 사랑하는, 계화도에서 갯벌 사랑을 실천하는 참청년입니다. 그레는 지역주민들이 만들고 가꾸어가는 갯벌배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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