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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아룬타족

발도르프 학교가 다른 학교랑 다른 것 중 하나는, 2교시부터는 영어, 미술, 수학, 체육 등등 똑같은데, 아침 1교시에는 한 달을 주기로 달라지는 주제 공부 시간이 있다는 것.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3학년은 1학기 동안, 3월에는 창세신화를, 4월에는 텃밭가꾸기를, 5월에는 측량과 측정을, 6월에는 동화 속 인물을 공부하였다. 학년이 높아지면, 동물에 대해서 배우는 한 달이 있고, 기하학에 대해서 배우는 한 달이 있다. 역사나 지리 같은 과목도 고대역사, 한국역사, 아시아역사, 동네지리, 한국지리, 실크로드, 식으로 잘라서 한달 주기 공부시간에서 배운다. 내가 이 학교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인, 매력적인 수업이다.

 

 

수업방식은 매력적인데, 그러나 내용도 매력적일까.

이걸 정말 매력적으로 하고 싶었으나, 선생의 한계는 수업에서 고스란히 나온다.

결국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수업을 하다보니 내가 경험한 것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책 찾아보고 이것저것 뒤지고 그림에, 수수께끼에, 노래에, 게임에 벼라별 것을 아는 척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수업에 들어가지만, 애들 앞에서는 처음 말문을 열며 이야기를 해주고, 머리 속에 넣으라고 무언가(그림이나..)를 했다가 , 머리 속에 넣으라고 쓰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잘 넣으라고 마무리를 하는 식이다. 결국 뭐를 하든 '머리 속에 잘 넣으라'가 내가 하고 있는 짓이었다. 노골적으로 그런 식의 수업만 받아봤던 나로서는 아무리 쑈를 해봤자, '머리 속에 잘 넣으라'의 변주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전혀 받아보지 못 했던 류의 수업을 앞에 두면, 그나마의 경험 조차 없는 것이라 밑바닥만 박박 긁어대는 꼴을 보이지나 않을까 두렵거나, 아예 내 마음대로 해버릴 수 있는 새 기회라 반기거나 헛갈리는 감정이다. 이럴 때 좋은 자료를 만나면 좀 만만해지는 기분인데, 그런 걸 못 만나면 밑바닥을 긁는 게 아니라 아예 땅을 파고 무덤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다음 학기 수업에는 "집"이 있다.

이걸 두고 지난 학기 내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처음엔 아예 안 할 생각이었다.

학교 뜰 구석에 조그만 움막을 세우기도 한다는데, 나보고 그걸 어찌 하라고. 뭐, 하면 하겠지만,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하라고. (밖에서 뭘 하기만 하면 좋아하는) 남자애들을 생각하면 걔들하고 얼레발 설레발 한 달 떼우기 좋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도 드는데, 하여간에 그걸 어떻게 하라고.... 근데 웬 뚱딴지 같은 집이람.

 

그리고 어거지로 방학 중에 책 한 번 보겠다고 도서관에서 책 검색을 했다.

도서관 책 검색 주제어에 "집"을 치니, 검색된 책이 삼십 몇 페이지가 나온다.

그걸 어거지로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사과나무 한 그루의 내 영혼의 집"류라 페이지는 잘 넘어간다.

이러다가 적당한 책이 없겠지. 그러면 나도 자료 하나 없는데 수업 어찌하라구. 그냥 못 하지, 뭐. 하는 마음 자세로.

 

이십오페이지가 넘어가고, 제목이 냅다 "집"인 책이 하나 나왔다.

소제목으로 [6,000년 인류 주거의 역사]. 오호라, 이것이라면.

책은, 삼만오천원짜리로, 장장 오백팔십사페이지에다가, 싸이즈마저 에이 포로 크기도 크고, 껍데기가 대단한 양장이라 무겁기도 오지게 무거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누군가 평생을 '집'만 좇아다니다가 죽기 전에 그걸 죄다 쏟아놓고 죽은 모양이었다.

표지에 이렇게 써있다.

 

        건축과 역사와 인류학이 한데 어우러진 이 백과사전적인 책은 도시가 생겨나기 전 원주민이 살던 움막집에서부터 중세의 요새도시, 근대의 전원주택, 현대의 최첨단 아파트까지 전 세계와 전 시간에 걸쳐있는 집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안을 펼쳐보니, 크고 두꺼운 책에 글씨체도 작다.(여기서 글씨체 커버리면 사기지.)

촘촘히 적혀있는 글과 연필로 그려진 것들을 옮긴 듯한 그림들- 각종 집의 입면도 단면도 평면도 앞모습, 위에서 본 모습....

 

수업이고 뭐고 이런 책을 보면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평생을 손에 든 것인데...

 

당장 집으로 빌려와 본다.

지은이의 머리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주거는 예외 없이 동굴이었을 것이라는 완고한 통념을 헤쳐버리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동굴보다도 빈번하게 '움막'이 최초의 주거역할을 하였다. 예수회 성직자였던 로지에가 시적으로 연출한 것처럼, 한 남자가 방형의 원시 오두막을 발명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가장 초기의 오두막은 원형이었으며 대부분 여성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옮긴이의 머리말

       ........................새로운 눈을 열어준 지은이에게 경의를 표하며...............

 

중간에 재미있었던 것

호주 원주민 아룬타족 이야기; 아룬타족은 호주대륙 중앙 사막에서 사는데, 가끔씩 매우 추운 밤이 찾아오지만 아룬타족은 옷을 전혀 입지 않는다. 잠잘 때 역시 아무것도 덮지 않는다. 그러면 날씨가 너무 추우면 어떻게 하느냐. 온 가족이 개를 껴안고 잔단다. 아하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웃으면 안됨.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굉장히 진지한 생활방식임.  아룬타족이 바깥기온을 말할 때 그 단위는'개 몇마리'이다. 즉, 따뜻할 때까지 필요한 개의 마리수로 바깥 기온을 얘기한다는 것이다.

"오늘 밤은 너무 추워. 개 세마리 쯤이야."

"날씨가 많이 풀렸군요. 개 한마리야."

사막에 사는 그들은 물이 어디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수지식인데(그들뿐이랴, 누구나 그렇지), 하여간에 물이 굉장히 소중하다. 성년식의 시험문제는 부족 영역 내 샘물의 위치를 모조리 외우는 것이다. 그리고 벼라별 각종 방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아룬타족은 자신의 정맥을 잘라 피를 마신다고 한다. 허.

 

사실 아룬타족의 이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인데, 사설이 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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