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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키우기란'

씨리즈를 기획했다가 3탄 쓰고 꺽어졌던 게 기억이 난다.

 

할 말 다 한 것은 물론 아니고, 이렇게 욕바가지 퍼붓는 식은 아니겠다, 싶었던 것도 있고, 아이가 시시각각 자라면서 보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내 생각도 시시각각 색깔이 달라졌던 것도 있고.

하여간에 아무튼 난 여전히 속에 할 말이 많다.

 

오늘 한겨레 신문의 오한숙희 인터뷰를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인터뷰는 오한숙희 쯤 되는 유명인이니까 통하는 거지, 그야말로 애 둘 있는 (그 중 하나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사회적 의미를 더 가질 수도 없는) 아무개씨였다면 인터뷰가 나올 리도 없고(왜 인터뷰가 안될까, 이 인터뷰가 홍승현 녹음테이프보다야 불행히도 정치적 쑈로선 덜 유행하겠지만, 적어도 생방송에서 바지 내렸단 얘기보다는 재밌고 사회적 의미 인간학적 의미 오만배 더 많은데), 그냥 어느 수다 이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미성숙과 그로 인한 사회적 인간적 역사적 불행과 비애가 고대로 드러나는 것인 것을....

 

 

규민이 어린이집의 장애아 통합교육 소위원회에 끌려들어갔다. 생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저녁에만 모일 수 있는 모임 성격때문에 내 일은 아니고 남이 알아서 잘 해주길 바라는 일이었다가(저녁 시간이 자유롭다는 그 사회적 의미여!) 어찌어찌...

거기서 나는 많은 충격을 경험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비장애의 몸을 갖고 삼십년을 넘게  한국사회에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살면 장애에 관한 모든 것이 충격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이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0% 동감할 것은, 그 아이가 건강하다는 것 하나로 새삼, 새사 새오 새륙 ...새오천만팔십구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는 것일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 그 자체는 물론 긍정도 만점짜리, 인간 인생의 요소이지만, 그것이 결여됨은 일파만파 엉뚱생뚱 다르고 다른 맥락으로 파생하여 그 사람이 사는 데 불편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이미 아니다.

 

아이를 키우고 난 후에 생명에 대한 사랑, 존중, 공감의 깊어짐을 말한다.

사실이다.

이라크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전쟁을 반대한다는 모성애를 암시하는 평화운동은 욕을 먹기도 하고 욕을 먹을만 하기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모성애가 특정 성(性)(혹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굳어져서 문제이지, 모성애는 실재하는 심리이고, 아름답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고 나니, 아이를 키운다는 게 무언지 알고 나니 이렇다.

기형아검사, 유전질환검사, 나는 다음에 또 임신이 되어도 그런 검사들을 받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대단히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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