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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전

어제저녁 엄마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시간맞춰 퇴근을 못하면 대타 일순위가 엄마. 엄마에게 전화걸어 딸래미 데리고 와달라 부탁하고, 그러면 애 밥까지 먹여주시고, 나도 간 김에 밥 얻어먹고는 설겆이도 안하고 배째라 쉰다. 이 다음에 우리 딸래미가 나한테 그럴까 겁난다. 그 때가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잔뜩 피곤한 기색을 무기로 설겆이도 안 하고 배째고 규민이가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는 핑계로 길게 누워 쉬고 있었다.

테레비젼에서는 세네갈 대 한국 축구경기 중계.

한 골이 터졌네 으쌰하는 것 같더니, 좀있다 퍽, 테레비가 꺼지고 불이 꺼지고 삑삑하며 전화기가 꺼지고 냉장고 돌아가던 소리도 멈추고, 약 1초 후, 하필이면 이런 때,하는 우리 아빠의 탄식과 동시에 바깥 길거리에서도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정전이 시작됐다.

 

제일 신난 건 우리 규민이.

(규민이의) 아빠가 잽싸게 켜는 라이터불에 매혹되었다.

정말 불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난 후 얼마간 무서워하는 것 같더니, 할머니가 촛불을 켜주실 때는 촛불처럼 눈을 반짝인다.

 

테레비 소음도 없고, 냉장고 소음도 없고, 구석구석 환하게 여기저기 다 비추던 불이 없으니 식구들이 옆에 옆에 모였다. 규민이는 자기 둘레에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둘러앉아 자기만을 바라보니 급속하게 기분이 상승하는 모양, 벽에 생기는 자기 그림자를 이리저리 바꿔보며 춤을 추기 시작하다가 마구 상승하는 기분에 맞추어 뛸 듯한 춤을 춘다.

그러다가 깔깔 웃고,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돌아가며 뛰어다닌다.

 

그러다 삑삑 다시 전화기가 불을 켜고 냉장고가 웅 돌아가고 불이 타다닥 켜지고 아빠는 전기 들왔다,며 리모콘을 눌러 테레비를 켰다. 고사이 한 골 넣었다고 아쉬워한다. 한 골은 이미 아까 넣었었잖아??!! 그건 옵사이드였어. 나는 못 알아들음. 한 골 아까 넣었었는데.. 그런 옵사이드라니까. 대화가 안된다. 어엉.. 반칙해서 무효가 되었다는 소리인가보다,로 대충 알아듣고 대화 관둠. 그런데 또 퍽 테레비가 나가고 불이 꺼지고 삑삑하며 전화기가 꺼지고 냉장고 돌아가던 소리가 멈춘다. 우리 아빠, 우이 또,하고 탄식하나, 규민이는 으잇,하며 다시 신남.

 

솔직히 나도 신남.

시끄러운 테레비에서 해방.

구석구석 환하여 여기저기 분명히 볼 수 밖에 없었던 눈 앞의 것들로부터 해방.

냉장고, 전화기 끊임없는 소음으로부터 해방.

거기다 촛불은 왠지 낭만적이고 소박하고 따뜻하고 풍성하다.

 

이제 정말 잘 시간이라고 엄마집을 나섰다.

골목으로 나오니 가로등도 다 꺼져있다.

그런데 정말 환하다. 여름저녁 여덟시쯤 된 것 같다. 어둡지만 막 해가 져서 주변 사물이 다 보이도록 환한. 오늘은 보름달인가. 이제야 보름달이 진짜 보름달같네.

보름달이 환해서 옆에 걷는 남편 얼굴과 남편이 안고가는 애기얼굴이 다 보이는 건, 가로등이 다 보여주던 것과 다르다. 왠지 다르다.

한 골목길인데도 오십미터 쯤 지나니 가로등이 켜있다.

달과 별이 비추던 것을 가로등이 대신하니 맥이 빠진다.

달빛과 별빛이 희소하기 때문인걸까.

밤이 되면 불을 켜고 할 일도 많고 많지.

무얼 했던 걸까.

남편얼굴과 아기 얼굴에 닿던 달빛과 별빛이 누에가 짠 명주였다면, 가로등 빛은 싸구려 나일론이란 느낌, 어쩔 수 없이.

지금껏 내 돈과 내 시간과 내 정성을 들여 싸구려로 몸을 휘감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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