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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2/22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지요?(1)
    이유
  2. 2007/02/19
    영화 보고싶다(3)
    이유
  3. 2007/02/09
    규민 어록 5(4)
    이유
  4. 2007/02/07
    "엄마들은 다 딸내미 시집 안 보내려고 하지 않아요?"(2)
    이유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이지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소개와 같은 것.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를 듣는 것처럼 계속하여 상대를 듣는 것.

누군가 자기소개를 할 때, '내가 더 잘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자기소개 그 어딘가에서 그 사람은 빛나고 있다. 듣는 이는 그 사람이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을 기다린다.

 

 

 

---- 오늘 듣게된 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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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고싶다

명절은 난감하다.

가족에 집중하라고 버젓이 법정공휴일을 삼일이나 연속으로 잡아먹고 있는.

(이것때문에 다른 공휴일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식목일도 없어지고, 한글날도 없어졌다.(다시 내놔라, 이놈들.))

한 번 와그장창 깨어진 적이 있었던 가족은, 어째 세월이 지나도 그 깨어진 자국이 날로날로 선명해져 이런 명절이면, 난감하다.

 

나는, 여전히 엄마아빠 앞에서는, '그러게 누가 결혼하고 싶었댔냐고'류의 주장이지만, 명절만큼은, 내가 결혼을 했고 애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나의 결혼과 나의 아이가 수행해준 엄연한 가족 재생산의 역할 덕분에.

 

올 설에 아빠는 유난히 많은 세뱃돈을 주셨다.

태어나서 아빠로부터 이렇게 많은 세뱃돈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나 역시 아빠에게 그토록 인정받고 싶었던 딸이었는데, 이제서야 인정을 받는가보다.

결혼을 해주었고, 손녀를 낳아주었다. 더구나 내가 어디에 시집을 갔는가. 신정을 설로 쇠는 집안에 시집을 가서 설엔 손녀를 데리고 친정엘 올 수 있는 딸이란 말이다.

 

 

인간은 역할을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택하면서 진화하였을까.

진화가 과연 앞으로 나아간 것인가, 종종 의심하지만, 나는 늘 나의 '역할' 이 내 몸에 맞지 않다고 느낀다.

역할을 몸에 맞는다, 맞지 않는다,라고 느낄 수 있는 의식, 진화라면 아마 그것이 진화이겠지.

 

몹시 영화가 보고싶었다.

책을 보고 싶었고,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떠올리며, 나는 이제 내가 원했던 삶을 살지 못하겠구나,라는 예감이 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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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 어록 5

 

"엄마, 엄마, 고마워."

"내 마음에 딱 드는 아빠와 결혼해줘서."

"아빠, 아빠, 고마워."

"엄마한테 나를 낳으라고 씨를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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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은 다 딸내미 시집 안 보내려고 하지 않아요?"

 

결혼이란 절대 해악이라고 믿었던 시기를 극복하고(세월이 약이다), 나도 역시 나이 먹으니 내 서방과 내 자식이 (정신적, 정서적) 비빌 언덕인가?라며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내 딸이 보물이다.

다시 없을 것 같은 존재를 만나고, 나는 인생과 인간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배우며 다시 태어나............암튼 씽글의 친구들에게, '절대적으로'  비혼을 주장하기가 약간은 혼동스러운 상태.

 

주로, '결혼은 아니더래도, 아이는...(혹은 딸아이는)'이라는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서른후반의 나이를 먹고도 그것을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비겁하다.  더구나 내가 비혼모도 아닌데.

 

나의 결혼관의 정체는 무어냐.

나는 가끔 규민에게 결혼을 허락할 것인지(예전에는 죽었다깨어도, 혈서를 쓰는 한이 있어도, '제발 그냥 같이 살아라, 결혼은 절대 안된다' 주장이었다.), 혹은 권할 것인지(서른아홉의 씽글인 규민 앞에서 나는 그녀의 결혼 가능성에 초연할까?) 고민한다.

얼마전 만났던, 그 엄마의 나이는 잘 모르겠고, 큰 딸 아이가 열한살이 된 (작은 딸아이는 네살) 여자가, 얼굴에 고민 한 가닥의 흔적도 비추지 않고, "엄마들은 다 딸내미 시집 안 보내려고 하지 않아요?"라고 해서, 꽤 안심(?)이 되기도 했었다. 결혼은 권할 것이(사랑하는 딸에게 권할 것이 절대) 못 되는 것 맞구나........

 

 

 

나의 남편과 나는 2007년, 결혼 9년차를 맞이하여, 앞서 밝혔듯이 둘의 관계를 위한 프로젝트를 발촉하였다. 둘다 그냥저냥은 참을 수 없는 예민하고 지랄맞은 성격이라(그냥저냥 넘어가는 성격이라면 이미 우리둘은 잘 산다; 함께 집안일도 잘 하고, 함께 나들이도 잘 하고, 집안 대소사는 반드시 둘이 상의하고 결정하고 등등등....), 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총력을 다해 극복해서 평화롭게 잘 살자며 결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놀랄만한 제안를 했었다.

 

내가 친구로 부터 들은 김형경의 <천 개의 공감> 이란 책의 내용을 잠깐 남편에게 수다떤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이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보고 자신도 큰 공감을 하며 책을 빌려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같이(동시에) 이 책을 보고, 함께 얘기하자고. 자신에 대해, 서로에 대해.(이 제안 뒤에 남편은 잠깐의 독후감을 얘기했는데, 자신에 대한 고백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에게 감동했는데, 내가 잠깐, 스치듯이 얘기한, 내 친구와의 수다 사이에 등장했던 얘기를 그가 도서관에서 찾아볼 만큼 진지하게 들었었다는 것에 무엇보다도. 그리고 자신과 솔직한 마주보기를 한 그 용기.)

 

오오... (그렇다, 우리 사이는 그냥저냥은 아주 좋다.)

 

 

나는 약속대로 그 책을 들춰본다.

(남편은 도서관 책을 반납하고 교보에서 직접 책을 샀다.)

 

 

 

 

나는 지금껏 남자들이, 그들의 엄마에게 고이고이 대접받고 숭배받으며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엄마 앞의 유아로부터 성장하지 못 하여, 그들 앞에 있는 여성이라면 다 엄마노릇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짐작을 하였다.

마누라가 바로 엄마의 연장인 것이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든다.

그들 중 어떤 개인은, 어느 개인이 그러하듯, 자신의 부모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지 못하여, 유아기 때 받아야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유아기 욕구의 충분한 충족을 하지 못한 어느 개인이 그러하듯, 성인이 되어도 그것을, 왜곡된 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럼 남자는 사랑을 받아도 어린애, 못 받아도 어린애????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역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부모 중 엄마가 보여주었던 역할을 점점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또 뻔하다.

우리 세대 아버지 중 얼마나 가족 중의 아버지, 부부 중의 남편이란 역할을 잘 해냈겠는가.

더구나 왜곡된 관계가 이데올로기로 강요되던 시대였다.

 

남자들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의 부부(나 뿐 아니라 인류전체) 관계가 나쁜 것은 온당하다.

(뭐, 새삼... 예전부터 짐작한 것.)

 

남자들의 과거를 생각하니 지금의 부부관계가 나쁜 것이 온당한 것 처럼, 지금 남자아이들의 모습을 둘러보니 미래의 부부관계도 온당 나쁠 것이다. 100% 확실하다.

 

여전히 남자들의 퇴근은 자정을 넘나들고(아버지와 남편은 여전히 부재중), 부부관계는 가부장적 어린애 식이다(부부관계 좋아보이는 사람의 비결은, (백에 아흔아홉) 큰 아들 치고 다 받아주라는....).(큰 아들 치라니, 남자들이여, 너무 모욕적이지 않은가.. )

 

 

나는 다시.... 규민에게 도저히 결혼을 권하지는 못 하겠다. 허락할 수도 없겠다. (엄마의 허락과 관계없이 결혼은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래, 해라, 하고나서 나더러 왜 허락했냐고 항의하지 말고.)

 

그래서, 규민이가 서른이 되기 전(설마 스물은 아니겠지) 나의 숙제;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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