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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받아 주겠다”…검찰청사서 수갑 “추방”

돈 받아 주겠다”…검찰청사서 수갑 “추방”

[한겨레 2005-04-11 09:03]  


[한겨레] 파키스탄인 무하마드 사르다(36)는 지난해 6월 공업용 재봉틀에 왼손 넷째손가락을 찔렸다. 근육이 크게 상해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큰 부상이었다. 그가 일하던 경기도 의정부 ㅇ섬유 사장은 산재 처리는커녕 덜렁 800만원만 합의금으로 준 채 그를 내쫓았다. 퇴직금도 주지 않았다.
1999년 ‘코리안 드림’을 안고 입국한 그는 이 회사에서 거의 날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다친 손가락 때문에 다른 곳에 취직도 못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간절했다. 하지만 그가 매달 보내는 100만원으로 살아가는 부모님과 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 그리고 아내와 4명의 자식들 얼굴이 어른거렸다. 받은 합의금은 갑자기 뇌를 다친 딸의 치료비로 대부분 들어갔다. 그러나 딸은 죽고 말았다. 그는 친구 집을 전전하면서 퇴직금이라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외국인 노동자 단체의 도움으로 지난해 10월 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다. 그런 노력 끝에 올 1월 말 체불임금 확인원을 받아냈다. 740만원의 퇴직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증명서였다.

그러나 체불임금 건이 검찰로 이첩되면서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의정부지검의 중재를 통해 1일 사업주로부터 640만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퇴직금을 받아들고 환한 얼굴로 지검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검찰 직원과 파견나와 있던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불러세웠다. “당신은 불법체류자라서 여기서 나갈 수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곧바로 수갑이 채워졌다. 그리고 경기도 화성에 있는 외국인노동자 보호소로 옮겨졌다. 추방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다. 검찰로부터 체불된 퇴직금을 받아주겠으니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역시 한국은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검찰청사로 갔기 때문이다. 추방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비극적인 결말에 외국인 노동자 관련 단체들도 당황했다. “아무리 불법체류자라도 권리 구제를 받기 위해서 검찰에 온 외국인 노동자를 이렇게 냉혹하게 처리해서야 되겠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최근 사르다를 면회한 노동인권회관 ‘외국인 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한분수 상담국장은 “검찰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떤 외국인 노동자가 권리 구제를 요청할 수 있겠느냐”고 한국의 낮은 인권의식을 비판했다. 그는 “사르다는 현재 빨리 풀려나서 다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사르다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노동부의 안이한 대처와 사업주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고용행태 때문이다. 현재 불법체류자들은 권리 구제를 받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다.

사업주들은 밀린임금을 요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하거나 실제로 신고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0월에는 한 중국인이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사장의 집을 방문했다가 사장이 불법체류자로 신고하는 바람에 강제출국됐다. 또 같은 달 필리핀 이주노동자 2명이 퇴직금을 받기 위해 수원지방노동사무소에 진정을 냈다가 지방노동사무소가 출입국관리소에 불법체류 사실을 신고해 강제 출국당한 사건도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 관련 단체 사이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불법 체류 노동자들이 사법 당국으로 가지 않고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현재는 외국인 노동자가 밀린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노동부에 진정을 하고, 노동부는 진정 이후 조사를 벌인 뒤 체불임금 확인원을 떼어 준다. 이후 노동부는 이 사건을 검찰의 손으로 넘긴다. 사실상 추방과 체불임금 해결을 맞바꾸고 있는 제도인 것이다. 이형섭 기자 ublee@hani.co.kr>sublee@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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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 단속보다 더 중요한 인권

[한겨레 2005-04-10 20:21]  

[한겨레] 최근 파키스탄인 이주노동자가 밀린 퇴직금을 받기 위해 검찰에 갔다가 퇴직금을 받은 직후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비록 체불 임금을 해결해주려 불렀지만, 법적 체류 기한을 넘긴 사실을 알면서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는 게 검찰 쪽의 말이다. 법에 정한 대로 집행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이 노동자를 체포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체불 임금을 해결해줬으니,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권보호라는 법 정신을 생각할 때 이런 대응은 가혹하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권리를 구제받고 추방되거나, 추방을 피하기 위해 권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이래서는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 지원 인권단체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개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권단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부의 이주노동자 단속이 강화되면서 비슷한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주노동자들이 소매치기나 도난 신고를 위해 경찰서에 찾아가도 합법 체류자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전에는 자유롭게 경찰의 도움을 요청하던 이주노동자들이 경찰서 가기를 꺼릴 수밖에 없다.

단속에 걸려 외국인 보호소에 수용된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정부는 체불 임금과 산재로 피해를 당한 불법 체류 외국인에게 출국을 유예해주거나 ‘보호’를 일시 해제해주는 조처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보증인까지 세워야 하는 등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서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게 인권단체들의 지적이다.

아무리 ‘불법체류’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숨죽이고 지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고도 문명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정부는 별 실적도 거두지 못하면서 인권탄압만 유발하는 이주노동자 내몰기를 중단해야 한다. 인권보호보다 불법체류 단속이 우선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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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맛세상] 안산 ‘국경 없는 마을’

뒷골목 맛세상] 안산 ‘국경 없는 마을’

[서울신문 2005-01-07 10:15]  


파키스탄사람 압둘 살람이 주인 겸 주방장인 ‘파라다이스’의 상차림. 무튼카레라는 양고기요리와 탄도리라는 화로에서 즉석에 구워내는 밀빵인 로티 등 20여 가지의 파키스탄식 요리를 선보인다.

[서울신문]지하철 4호선 안산역을 빠져나와 지하도를 건너면 원곡동이 시작된다. 이 원곡동이 몇해 전부터 ‘국경 없는 마을’이 되었다. 안산역을 뒤로 한 채 ‘원곡본동사무소’라는 팻말을 따라 광장약국 골목에 들어서면, 소규모 건설업체들이 일괄적으로 지은 2,3층짜리 다세대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비슷한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데, 여기가 바로 ‘국경 없는 마을’이다.

●97개국서 모여들어 주로 3D업종 종사

‘국경 없는 마을’은 과연 이름에 어울리게 이색적인 간판들이 골목 여기저기에서 쉽게 눈에 띈다. 코스모·타즈마할 등의 파키스탄식품점, 누산트라·마타하리인도네시아·모나스 등의 인도네시아식당, 랑카푸드라는 스리랑카식품상점, 몽골라이프라는 몽골식당, 파라다이스라는 파키스탄식당, 네팔식당, 베트남쌀국수 외에도, 왕중왕관점(王中王串店)·산동제일가(山東第一家)·연길랭면 등의 중국식당과 미처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중국식품점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국경 없는 마을’은 안산지역의 반월공단이며 시흥공단, 그리고 가까운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이룬 마을이다. 그러고 보면 ‘국경 없는 마을’은 안산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외국인노동자 거주지역인 셈이다.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노동자들이 소위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해 시나브로 우리나라를 찾기 시작하여 2004년 8월 현재 42만 여명에 이르고, 이중에 안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만 5만 명에 가깝다. 안산시의 총인구가 65만여 명이니 거의 8%를 차지한다. 저마다 출신별 나라도 다양하여 가장 많은 중국동포를 위시하여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스리랑카, 러시아, 몽골, 인도, 베트남,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나이지리아 등 모두 97개의 나라에서 골고루 들어와 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왜 이렇듯 안산지역에 집중된 것일까. 부끄럽지만 대답은 너무도 명확하다. 안산의 반월·시화공단은 소위 3D로 불리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업종인 피혁, 도금, 조립, 자동차부품, 섬유, 신발, 가구공장 등이 다른 곳보다 비교적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 3D업종을 내국인 대신에 외국인노동자들이 기꺼이 떠맡은 것이다.

원곡본동사무소 어름에 있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를 찾아보면, 환영의 말이 인상적이다.‘잘 오셨습니다. 종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빚어 센터를 건축하고 의자를 마련하여 주님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병을 앓았습니다. 우리도 가난을 걸어갔습니다. 우리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가지고 있고, 모든 것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없는 이 엄청난 자유인의 비밀은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국경 없는 마을’에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말고도 여러 종교단체며 인권운동단체에서 ‘코시안의 집’‘외국인노동자컴퓨터교실’‘안산노동인권센터’‘안산여성노동자회’ 등을 설립하여 외국인노동자들을 돕고 있다. 코시안은 코리안과 아시안의 합성어인데,‘코시안의 집’은 외국인노동자와 내국인과의 결혼을 통해서 만들어진 코시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 가족의 여러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일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연말연시에 몰려온 한파 속에서, 이 땅에서 가장 춥고 허기진 이들은 다름 아닌, 외국인노동자들일 터이다. 그중에서도 소위 불법체류자로 몰려 더 이상 일할 곳도, 그렇다고 돌아갈 곳도 잃어버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일 터이다. 작년 연말에 외국인고용허가제가 실시되면서 오히려 더 늘어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물경 20만명에 육박하고 있으니, 총 외국인노동자의 절반에 가깝다.

●추위보다 더 무서운 불법체류자 단속



베트남 이주 노동자출신으로 한국남자와 결혼한 네티 하이투가 운영하는 ‘베트남쌀국수’집의 쌀국수.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어진 여느 쌀국수와는 달리 철저하게 자국인 위주의 맛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국경 없는 마을’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들 중에서도 절반에 가까운 수가 불법으로 몰린 셈이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의 날씨도 날씨지만, 날씨보다 더 추운 것은 국경 없는 마을의 골목마다 꽁꽁 숨어서 출입국관리소 직원이라도 나타나지 않나 하고 바깥을 살피는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떨리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뜻이야 좋다지만, 이들의 춥고 허기진 시선을 외면한 채 과연 외국인고용허가제가 성공할 수가 있을까.‘코리안드림’을 위하여 1000만원 가까운 엄청난 빚을 내어 이 땅에 들어왔다가 미처 빚도 갚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기한을 넘기거나 역시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사업장을 옮기면서 불법체류로 몰려 끝내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고용허가제 때문에 더 이상 일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추위와 허기 속에 팽개쳐진다면, 그래도 이들을 위한 법이라고 강변할 수가 있을까.

외국인고용허가제가 실시되고 난 후, 외국인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식당이며 상점들이 절반 넘어 문을 닫고 말았다. 어렵사리 문을 열고 있는 식당이며 상점들도 숫제 손님을 구경할 수가 없다. 어쩌다 낯선 이가 나타나면, 주인 되는 이들마저 아연 긴장을 하여 날카롭게 눈빛을 세운다. 골목골목에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아직까지도 흘리고 있는 ‘피와 땀과 눈물’이 외국인노동자센터의 과거형 수사와는 달리 어디에서든 현재형으로 선연한 자국을 남기고 있다.

‘…우리도 병을 앓았습니다. 우리도 가난을 걸어갔습니다. 우리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환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외면하는 법이 있는 한 ‘우리의 무서운 죄’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닐 터이다.

●전문점의 30~40% 비용이면 거뜬

흔히 여행의 참다운 목적은 자신이 머무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제까지 머무르던 곳의 소중함을 새롭게 확인하는 데 있다고 한다. 만일 그대가 새해 벽두부터 문득 자신의 일상이 초라해 보이거나 자신이 지닌 어느 하나마저 무의미하게 여겨진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안산으로 떠나자. 서울에서 지하철을 탄다면 불과 한 시간 안에 그대는 ‘국경 없는 마을’이라는 낯선 곳에 다다를 것이다. 낯선 이들이 만든 낯선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며, 그렇게 낯선 이들이 추위와 허기로 빚어낸 ‘피와 땀과 눈물’을 만나면서, 그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머무르던 곳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대는 그런 자기 확인의 과정에서 아무런 낯선 식당에라도 들어가, 겉모습이야 허름해 보이는 이국적인 식당들이 추위와 허기에 지친 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공간이 되는지도 함께 확인하자.

‘파라다이스’(031-491-3145)는 파키스탄인 압둘 살람이 주인이자 주방장인 식당인데, 그는 1999년에 내국인인 손효정씨와 결혼을 하여 딸까지 둔 소위 코시안 가족이다. 그 역시 외국인노동자로 들어와 10년 가까이 알루미늄 공장이며 새시 제작, 페인트공, 설비공 등을 거쳐 마침내 내국인과 결혼하여 식당을 차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파라다이스는 파키스탄의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사진들을 사방의 벽에 빙 둘러가며 장식하여, 비단 파키스탄 출신뿐만이 아니라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야말로 국경 없이 즐겨 찾는 곳이다.

●자국인 위해 정통의 맛 철저히 고수



베트남쌀국수집에서 내놓은 별미 중 하나인 부화된 오리알 ‘쭈비론’. 오리알이 부화돼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려는 찰나에 삶은 것이다.

파라다이스는 메뉴 또한 다양하여 무튼카레라는 양고기요리에서부터 치킨카레라는 닭요리, 갈라카레라는 소심장요리, 케밥, 야채요리인 베지터블, 커스터드며 랏시 같은 우유음료며 티라는 전통차에 이르기까지 20종에 이른다. 이중에서 양갈비에 특유의 향신료며 카레를 넣어 볶아낸 무튼카레는 7000원이면 둘이서 충분히 먹을 만큼 양이 풍부하다. 이 무튼카레에 소위 탄도리라는 화로에서 즉석에 구워내는 밀빵인 로티를 곁들여 먹는데, 로티는 한 장에 1000원이다. 만일 서울의 인도나 파키스탄 요리 전문점에서 같은 양의 무튼카레를 맛보려면 적어도 서너 배는 족히 넘는 비용이 들 것이 틀림없다. 이밖에도 닭고기볶음인 치킨카레(6000원)를 위시하여 케밥(6000원)이며 베지터블(3000원) 등도 우리의 입맛에 거슬리지 않게 부드러운데,6000원짜리 메뉴는 모두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요리를 먹고 나서 커스터드(2000원)’ 랏시(2000원) 같은 우유음료며 티(1000원)를 후식으로 즐기다 보면 그대의 짧지만 의미 깊은 여행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 터이다.

‘베트남쌀국수’(031-492-0865)는 베트남 이주노동자 출신인 네티 하이투가 주인인데, 그녀 역시 한국인과 결혼하여 딸만 둘을 둔 코시안이다. 그녀는 1994년에 한국에 들어와 안산의 염색공장에서 근무하다가 같은 공장에 근무하던 최을식씨와 1998년에 결혼을 하였다. 베트남쌀국수는 요즘 들어 전국의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요리가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곳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어 맛이 얼마쯤 달라진데 비해, 이 곳은 손님들의 90% 이상이 베트남인들인 만큼 철저하게 정통의 맛을 고수하고 있다.

원래 ‘포’라고 불리는 베트남쌀국수(4000원)는 소고기뼈로 국물을 고아내고 역시 베트남 특유의 향초와 갖은 양념을 넣어서 간을 맞춘 다음에 소고기와 쌀국수에 부어내는데, 특이한 것은 녹두나물을 데치지 않고 날로 넣어서 함께 먹는다는 점이다. 쌀국수의 고소한 맛에 녹두나물의 싱그러운 맛이 겹쳐지고, 소고기 국물의 진한 맛이 특유의 향초와 함께 입안에서 어우러지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반다넴(6000원)이라는 베트남식의 만두도 있다. 돼지고기와 목이버섯, 당면, 양파, 당근, 달걀 등으로 만두속을 만들어 쌀죽을 써서 종잇장처럼 얇게 말린 만두피로 감싼 다음에 기름에 튀겨낸 원통형 모양새다. 반다넴은 양이 넉넉하여 둘이 먹어도 충분하다.

이밖에도 특이한 메뉴로는 쭈비론이라는 삶은 오리알이 있는데, 여느 오리알과는 달리 약간 부화시켜 껍질 안에 있는 흰자와 노른자가 저마다 세포분열을 거쳐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려는 찰나에 이른 것이다. 식물로 표현하자면 씨앗들이 어느 정도 발아한 새싹과 비슷한데, 요즘 유행하는 새싹비빔밥이나 새싹쌈 등을 연상하면 된다. 부화된 오리알이라는 선입감만 극복하면, 뜻밖에도 입안에 찰싹 감쳐드는 별미를 맛볼 수 있을 터이다.

■ 쌀밥+육류요리 만물상

‘뉴산타’는 인도네시아 식당 겸 카페인데, 뜻밖에도 송영민이라는 미혼의 한국 여인이 주인이고, 주방장이 부하리라는 인도네시아 출신이다. 그의 여동생은 같은 건물에 있는 아바시 커버레이션이라는 무슬림 식품 수입회사의 사장인 파키스탄인과 결혼을 한 코시안 가족이기도 하다. 송씨는 식당에 대한 정성이 남달라서 여느 식당과는 달리 넓은 홀에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 한편에는 노래방 기기까지 마련하여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주방장인 부하리는 반월공단에 있는 리모컨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요리를 배워 마침내 요리사가 된 부지런한 젊은이다.

인도네시아식 일색인 메뉴로는 나시오또아얌, 나시소토아얌, 나시렌당다킹, 나시그라이캄빙, 나시하티, 나시 글라이캄빙, 나시핏겔, 나시고랭, 박스믹 등이 있다. 요리 이름 중에서 앞에 붙은 나시란 쌀밥을 뜻하는데, 이 쌀밥에 곁들이는 닭고기, 양고기, 쇠고기 등 육류에 따라 뒤에 붙은 이름이 달라진다. 이들은 모두 4500원으로 값이 같다. 이중에서 나시고랭은 대파며 고추, 양파, 생강, 양배추 등의 야채에다가 인도네시아식 향초를 넣어 볶다가 미리 튀겨낸 닭고기를 잘게 썰어 넣어 다시 볶은 다음에 소스와 달걀, 쌀밥을 넣어 마지막으로 볶아내는 식이다. 나시고랭은 인도네시아인들은 물론 필리핀이며 태국인들도 즐겨 찾고 있다. 이밖에 나시소토아얌은 닭고기에 당면, 카레, 월계수잎 등을 넣고 국물을 넣어 걸죽하게 끓여낸 것으로 밥과 함께 먹는데, 이때 새우냄새가 나는 뻥튀기 비슷한 크로푹에다가 양배추며 오이를 곁들인다, 나시오토아얌은 나시소토아얌의 재료를 국물이 없이 카레로 만들어서 밥과 함께 먹는 식이다.

[저작권자 서울신문사]



뉴산타’의 인도네시아식 요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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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rantWorkerTeleVition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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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la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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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Crackdown Band

Son Hyeon Sook and Stop CrackDown Band

(Soe Moe Thu, Harry Ken, Soe Thi Ha, Mino Moktad, Ko Nay)

 

http://www.mixrice.org/stop/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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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위한 '문화가이드북' 발간

이주노동자 위한 '문화가이드북' 발간
http://mct.news.go.kr/warp/webapp/news/view?section_id=p_sec_2&id=57fac972298bc267df30485e

"식용유 색깔 노랗잖아요? 그래서 같은 색깔 나는 것을 사서 계란프라이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릇 닦는 세제였어요."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한국사람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한국 사람들 결혼식, 장례식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와 같이 낯선 한국 땅에서 문화적 차이로 스트레스를 겪는 40만 외국인노동자들의 한국 생활을 돕기 위해 문화관광부가 외국인 문화가이드북 제작기획위원회를 구성, '문화가이드북'의 연내 발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이드북은 비교적 오랜 한국생활로 익숙한 이,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응해가는 이, 그리고 막 입국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노력하는 이 등 각 나라별 노동자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제공한다.

 아울러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소개, 의식주 및 의료와 교통 등 일상 편의 사항, 그리고 한국에서의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 놀거리, 또한 나라별 문화적, 종교적 특징 및 차이점 등이 상세히 담아 외국인 노동자의 한국생활 지침서로 활용되게 할 예정이다.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내용과 언어로 집필, 올해는 우선 10개국 언어(한국어,영어,중국어,몽골어,인도네시아어,태국어,베트남어,방글라데시어,필리핀어,우즈베키스탄어 등)로 각각 발행한 후 매년 순차적으로 언어권을 확대할 예정이다.

 또한 외국인노동자 출신 나라별 특징과 문화적 이해도 담길 이 가이드북은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하는 고용주들에게도 배포, 일상생활 및 직장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화적 갈등을 해소할 지침서로도 널리 활용될 전망이다.

 문의 문화관광부 국제문화협력과 김진곤 02) 3704-9577
 정리 문화관광부 공보실 임영하 02) 3704-9045

http://mct.news.go.kr/warp/webapp/news/view?section_id=p_sec_2&id=57fac972298bc267df3048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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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노동자 연영석 님

문화노동자 연영석 님
     닉네임은 '게으른 피'
     오랜 시간 연대해 온 이주노동자 사이에선 '간절히' 로 더 잘 통하는
     연영석 님의 4월 4일(월) 모처럼의 콘서트를 함께 다시 감상합니다.
     녹화했던 모든 내용을 차차 공개해 드리고, 요약분 영상 '코리안 드림'을
     보십니다.
     연영석 님 공연장에는 투쟁현장을 함께 한 만큼
     어렵사리 투쟁 중인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부터
     한국 땅에서 가장 차별받는 이주노동자, 장애인도 함께 했고
     음악관계자 그리고 연영석 님 매니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밴드와 함께 한 공연은
     행복한 공연이며, 투쟁현장 함께 했던 동지들이 관객이기에
     더욱 행복한 공연이었음을 공연자와 관람자가 공통으로 느낀
     소중한 순간입니다.

     이 날 함께 했던 공연실황 중
     천지인과 연영석 님 공연을 계속 이 곳을 통해 소개합니다.



♪ 연영석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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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 이주여성에 한국어교육, 출산도우미 지원

국제결혼 이주여성에 한국어교육, 출산도우미 지원

[일다 2005-04-05 06:00]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비롯한 여성, 인권단체에서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2005년 3월부터 11월까지 전국적으로 한국어 교육과 모성보호 출산도우미 지원사업을 실시한다.

이 사업은 여성부에서 최초로 주최, 지원하는 국제결혼 이주여성 관련 프로그램이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총괄 하에 전국 6개 권역별 이주여성인권 관련 단체(서울외국인노동자 센터, 인천여성의전화, 충북이주여성인권센터, 전북여성농민회연합, 창원여성의전화, 부산여성회)가 실무를 담당한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는 전부터 ‘모성보호팀’과 ‘한글교사팀’을 꾸려서 국제 결혼한 이주여성들의 가정을 방문, 상담해왔다. 모성보호팀은 모성권과 자녀 건강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왔으며, 한글교사팀은 기본적인 정보 활용에 필요한 한국어교육을 담당해왔다. 이번 전국사업을 계기로 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는 4월 8~9일, 활동가 워크숍을 실시할 예정이다. 워크숍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4월 중순부터 지역에 내려가 본격적인 지원활동을 하게 된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 따르면, 국제 결혼한 이주여성들이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한국어다. 진통제 ‘펜잘’을 ‘벤졸’로 착각한 사례가 있었는가 하면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데 성장단계별 용량을 읽지 못해서 신생아 용량으로 계속 먹이다가 아이가 발육부진상태에 처한 사례도 있다.

이주여성의 눈에 맞는 한글 교육이 절실하지만, 이들이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 지역의 한글 교실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직접 방문해 한글을 가르치고 생활 상담을 해줄 교사들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재 센터에서는 한글교재연구팀이 한국어 교육교재를 제작하는 중이며, 시범 교재로 지역에서 교육을 실시한 후 피드백을 받아서 9월 중에 완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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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 인권논문공모사업(외국인과 인권)

http://www.humanrights.go.kr/nhrc/news/nhrc02_01_view.jsp?nhrc02_01_seqid=1704

국가인권위원회 공고 제2005-14호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지식기반 확충과 인권학술연구를 지원하고자 2005년도 인권논문공모 사업시행을 별첨파일과 같이 공고합니다.

접수일시 : 2005. 9. 12.(월) - 9. 16.(금)

별첨파일 :  인권논문공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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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제2005- 14호

「2005년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논문공모 사업」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지식기반 확충과 인권학술연구를 지원하고자 2005년도 인권논문공모사업을 아래와 같이 실시합니다.

- 아              래 -

□ 응모자격  
  ○ 인권문제 초기 연구자(대학생, 대학원생)
  ○ 인권시민단체 관련자
  ○ 일반시민
  ※ 박사학위 소지자 및 전문직종사자(변호사, 의사, 교수 등)의 논문과 석․박사학위청구 논문은 제외

□ 응모형태
  ○ 개별응모
  ○ 그룹응모
  ※ 그룹응모 시에도 논문편당 상금총액은 동일

□ 주  제
  ○ 군대와 인권                ○ 여성과 인권
  ○ 외국인과 인권              ○ 장애인과 인권

□ 접  수
  ○ 접수일시 : 2005. 9. 12.(월) - 9. 16.(금)
  ○ 접수방법 : 전자우편, 우편(2005. 9. 16.일자 소인에 한해 유효)
  ○ 접수자료 : 연구논문 4부, 전자파일 1부(전화번호, 이메일 등 연락처 기재)

  ○ 접 수 처
     ▶ 우100-842 서울시 중구 을지로 1가 16번지 금세기 빌딩 11층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 인권연구담당관실 인권논문담당자 앞
        02)2125-9741/9743, e-mail : research@humanrights.go.kr
     ▶ Homepage : www.humanrights.go.kr.
□ 응모요령

  ○ 논문분량 : 200자 원고지 300매 내외
  ○ 작성방법 : 별도의 양식 없이 글 워드프로세서 97 또는 2002로 작성

□ 수상자 발표

  ○ 발표일자 : 2005. 11. 11.(금)
  ○ 발표방법 :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게재
  ○ 심사기준 : 인권지향성, 주제의 독창성, 논리적 일관성, 연구방법의 적절성 등

□ 시  상  

  ○ 시상일 및 시상장소 : 추후 공지 예정
  ○ 시상내역

     구     분
수  상  내  역
최우수상(1)
상패, 상금 3,000,000원
우수상(2)
상패, 상금 2,000,000원
가 작(3)
상패, 상금 1,000,000원


□ 기타 사항

  ○ 공모논문은 국내외에서 발표된 바 없어야 하고, 학위청구논문이 아니어야 하며, 다른 논문에 대한 표절이 없어야 합니다. 이를 위반한 경우 수상이 취소됩니다.

  ○ 접수된 논문은 반환하지 않으며 당선작에 대한 제반권리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귀속됩니다.

  ○ 심사결과 선정대상에 해당하는 논문이 없을 경우에는 수상작을 선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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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지난 3월 5∼6일에 ‘다함께’가 주최한 ‘진보적 대학생이 꼭 알아야 할 10가지 주제’에서 두 이주노동자가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두 사람이 전해 준 이주노동자들의 진솔한 삶과 투쟁 이야기는 많은 청중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라디카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저는 한국 땅에서 1992년부터 살고 있습니다. 20대 나이에 들어와서 30대가 다 됐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나이를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여러 방식으로 들어오면서 자기 살림과 자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 노동을 해 왔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오랫동안 한국에서 힘들게 살면서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한국 노동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일 빼앗긴다고 오해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이 일 빼앗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3D업체의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거에요.

3D업체의 일이라는 것은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노동자들이 안 하는 일이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14시간, 15시간 일하면서도 낮은 임금 제대로 못 받고, 강제로 일 하다가 다쳐도 산재 안 되고, 일하는 현장에서 폭행당하고 차별받아야 하고, 누구한테 맞아도 입 다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이주노동자입니다.

우리는 많이 고통받고 노예처럼 일해 왔습니다. 가족 생존권 위해 모두 아픔을 참고 일해 왔습니다. 언젠가는 한국 정부도 우리의 아픔을 알고 좋은 제도 만들거라는 기대감이 항상 있었어요.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마침내 2003년 7월 31일 국회에서 고용허가제가 통과됐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합법화될 수 있구나.” 기대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주노동자를 세 부류로 나눴습니다. 한국 체류 3년 미만자만이 합법적 신분을 얻었습니다. 4년 이상 불법 체류한 이주노동자는 모두 2004년 1월 15일까지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합법화된 3년 미만자들도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어 불법 체류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국 경제를 위해 일해 왔던 우리 이주노동자들을 아무 책임도지지 않고 나가라고 말하는 한국 정부 때문에 우리는 많이 고생했습니다.

고용허가제 때문에 너무 힘들게 일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로 합법화된 3년 미만자들도 체류 기간이 다 돼 불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12월 15일부터 지금까지 심하게 단속하고 있습니다. 단속을 언제까지 하는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잡히고 있습니다. 지난주 의정부에서도 우리 친구들이 많이 잡혀 갔습니다. 한 여성분도 잡혀 갔어요. 나이도 어린데요. 출입국 직원들이 그녀를 잡다가 그녀의 손을 부러뜨렸어요. 손 부러지고 그 분은 쓰러졌어요. 그런데 출입국 직원들은 그녀를 그냥 두고 갔어요. 그 책임은 누가 지나요. 공장도 책임 안 지고 출입국 사람들은 도망가고. 우리의 존재와 마음이 한국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생존권까지 걸려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무부는 왠지 단속·추방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3년 12월 15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들 80명과 20명의 한국 활동가들이 함께 농성했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단속·추방 저지,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사업장 이동 자유였습니다.

농성중이었던 2004년 2월 15일에 우리 농성단의 이주노동자 대표 연행됐습니다. 또, 같이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3명도 집회하다가 출입국 직원들에게 잡혀 갔습니다. 그 분들 석방을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도 했습니다. 그 분들은 보호소에서, 저와 이주노동자 3명은 농성장에서 한 달 동안 단식했습니다.


추운 겨울 농성장에 모인 우리는 서로가 국적도 민족도 피부색도 말도 달랐지만 1년 동안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하며 뜨겁게 투쟁했습니다.

1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강제 추방과 인간사냥 때문에 14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와서 돈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가족과의 약속은 단 1분 만에 무너졌습니다.

그 가족들은 얼마나 울었을까요? 아들을 잃어 버린 엄마,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 버린 아내, 하나밖에 없는 아빠를 잃어 버린 아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17년 전부터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탄압과 차별을 받으며 노예처럼 살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왔습니다. 바로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많이 이용당했습니다. 많은 이주 여성들은 성폭행도 당했습니다. 이렇게 입 다물게 하고 우리를 언제까지 써먹을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아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노동자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지역에서 수도권 노동조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이주노동자들이 지금까지 받았던 고통과 탄압에 맞서, 권리를 위해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숨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우리한테 큰 성과가 있어요. 왜냐하면 오늘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우리한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지금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40만 명이 넘어요. 바로 앞에도, 자기 동네에도 이주노동자들이 있어요, 자기 나라에서 자기 가족 다 놔두고 한국에 돈 벌려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 가족처럼 대우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지금 이주노동자들이 모두 합법화하면 자본가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이익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이주노동자들 한국에 들어오는 이유는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서에요.

그런데 한국 자본가들은 왜 이주 노동자를 고용할까요? 이주노동자들을 이용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에요. 그것은 또 한국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서에요. 이주노동자들이 장시간 일하고 적은 월급 받으니까 한국노동자들한테 “니네도 그렇게 해라.” 하는 거에요.

지금 점점 비정규직 늘어나고 있는 상태예요. 한국의 어느 집안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없는 집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조금 있으면 학생들도 잘 아시게 될 거에요.

이주노동자들이 합법화돼서 한국에서 일할 수 있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훨씬 좋아질 거에요.

건설 현장에 가면 거기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너무 적은 월급으로 일해요. 그래서 한국노동자들이 “니네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식으로 말해요.

한국 노동자들도 월급이나 일당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태예요. 우리가 허가 얻고 한국에서 제대로 당당하게 일할 수 있으면 한국 노동자들과 같이 그 사람들 월급 적으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같은 일하고 장시간 일하니까.

한국 노동자들도 지금 받는 착취가 덜해질 것 같아요. 이주노동자들은 일 잘하는 사람이고 일 잘하면 그 사람 대우받고 싶어하죠. 인간이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대우를 요구할 수 있어요.

난 한국 노동자들과 똑같은 월급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나도 노동자니까.

나를 이용해 한국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 않아요. 그 노동자는 내 형제예요. 그 분이 착취받는 것은 싫어요. 그렇게 안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투쟁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 가족의 교육 문제를 말해 볼께요. 1999년에 이주노동자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이 허용됐어요. 국제노동기구 협약에 의하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자기 가족들 데리고 와서 같이 살고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데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거기에 서명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리비아, 싱가폴 같은 데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가족을 데리고 가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데 한국은 초등학교밖에 안 돼요.

미안한 일인데, 제가 9년째 와이프와 떨어져 있는데, 얼굴이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해요. 데리고 오고 싶어도 돈 때문에 못 데려 오고. 우리 딸 데리고 와서 학교에서 교육시키려고 생각해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제가 일하는 것으로는 못 데리고 와요.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같은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적은 돈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 있어요. 고등학교, 대학교 가면 큰 돈이 나가겠지만요. 한국에는 아직까지 제대로 되는 게 없어요.


어떤 분이 외국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그 시행에 대해 질문했어요.

저는 방글라데시 출신이에요. 중동에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엄청 많이 가 있어요. 정부들은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 몇 만 명 필요하다” 하고는 데리고 가요. 거기서는 노동자가 일하고 싶은 공장에서 일해요. 자기가 너무 힘들면 자기 편한 데로 일자리 옮길 수 있어요. 사업장 이동 자유가 있어요. 싱가폴 같은 데도 비슷해요.

현재 한국에서는 내가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기분 나빠도 “오늘 일 못한다.” 이거 안 돼요. 나는 일 안하면 바로 잘려요. 잘리면 새로운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된 허가, 노동허가를 원해요.

동지들은 1970∼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독일에 가서 투쟁해 노동허가제를 얻어 놓은 것 알고 계세요? 그 때 간호원들이나 광부들이 독일에 가서 많은 탄압이나 차별받았어요. 투쟁하기도 했구요.

지금 한국에 있는 우리는 40만 명인데, 그 때는 2천5백 명이 투쟁해 노동허가 얻었어요. 독일 사람들이 미등록이나 차별받는 3D업체에서 일하는 분들과 적극 연대하고 도와줬기 때문에 빨리 노동허가 얻은 거에요.

아직도 그분들은 거기에서 살고 있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어요.

끝으로, 이주노동자들이 테러리스트 아니냐는 얘기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정부는 반전 집회에 외국인들이 나오면 사진 찍어요. 다 테러리스트로 몰아요. 우리는 한국에서 좋은 추억 갖고 가고 싶어요. 우리는 테러리스트 아니고요. 반한(反韓), 안 했어요.

또, 한국의 정당한 투쟁들을 다 지지하고 적극 연대하고 싶고요.

정부가 아무리 탄압해도 우리는 우리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길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거 보다 더 좋은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싸울 거에요. 동지들이 우리와 같이 있으면 우리가 더 힘차게 싸울 수 있습니다.



라디카, 마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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