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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26
    솔직하기에, 솔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
    하늘연
  2. 2005/08/26
    0825.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
    하늘연
  3. 2005/08/26
    모질게.
    하늘연
  4. 2005/08/21
    과거를 배반했다.
    하늘연
  5. 2005/08/21
    전화, 오해.
    하늘연
  6. 2005/08/18
    B급 드라마.
    하늘연
  7. 2005/08/15
    Fantastic, 4, us.
    하늘연
  8. 2005/08/13
    도망, 답변.
    하늘연
  9. 2005/08/12
    Z, AM. 11:47.(1)
    하늘연
  10. 2005/08/11
    울다, 웃다.
    하늘연

솔직하기에, 솔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

0.

 

늘상 해오던 고민을, 막상 언어화해서 늘어 놓으려 하니 머릿속이 오래된 기계마냥 삐걱대네요. 의도하지 않아도, 지치는 일이에요. 심지어 우리는 - 적어도 05 학번의 경우는 - 일부라도 자주 만나고, 뭔가 유사한 고민을 공유하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쯤 우리가 와 앉아있을 TS와 앞으로의 2학기가 매우 희망적으로 보이는 듯도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이 무용한 것이라는 달콤한 나른함이 손목과 눈두덩이를 휘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냥- 이렇게 어떻게든 굴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또 언젠가는 굴리는 사람들 - 흔희 말하는 주체들의 힘이 빠져 버릴 테고 또 다시 위기라는 말을 들먹일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지요. 그건 또 그 때의 학회원들이 감내해야 할 당연한 수순의 고민일까요.

 

 



 

1.

 

조금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봅시다.

 

우리는 왜 '학회'라는 공간에 모여 있는 - 혹은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건가요. 빨갛고 낭만적인 누군가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말로 어긋난 논리를 말할 지도 모르고, 자의식이 강한 누군가는 딱히 들어오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던 분위기의 3월을 탓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서, 학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당위인 것 같기는 한데 왜 그래야 하는 건지, 혹은 지금 학회를 하고 있는 - 혹은 하려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조금만 더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학회의 특정인을 생각하고 쓴 글은 아닙니다만, 어느 부분이 자신에게 더 와닿는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학회는 미련, 혹은 책임 - 조금 더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기억 - 인지도 모릅니다. 과거로부터 해 왔다는 일정 정도의 관성과 함께 당위에 당위가 얹혀진 느낌이랄까요. 어쨌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학회라는 공간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기억들 - 논쟁들, 관계들, 주체화의 과정들 - 이 얽히고 버무려져서, 이 공간의 위기와 부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것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만큼 자신과 동일화될 지도 모르지요. 거기에, 이제 막 학회라는 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경험과 기억을 주고 싶다거나, 아직도 학회라는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그녀에게 학회를 계속 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학회의 당위가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누군가에게 학회는 그야말로 학과 회를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도 교육을 통해 충족시킬 수 없었던 공부를 세미나를 통해 얻고, 과반 단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충족시키기 어려웠던 인간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게 해 주는 공간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지요. 하지만 한 학기 동안 학회를 경험하고 나니, 막상 학회는 그렇게 원하는 자원들이 어느 때나 캐갈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원조차 주체적으로 생산해내야 하는 공간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원을 어떻게 생산할까, 혹은 과연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있는 것일까 하고 고민을 하는가 하면, 어떻게 파 나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라며 삽을 먼저 드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만들든 파내든 일단 뭔가 나오면 가서 같이 나누자고 해야지, 라며 상황을 재고 있는 사람도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무척 단편적인 상황들이고, 또한 이 속에서 무수한 곡해들이 난무하고 상처들이 덧난다 할지라도, 자신이 왜 학회를 붙들고 있는지 - 혹은 놓고 있는지 - 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다면 늘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포기될 뿐이겠지요.

 

저의 경우에는, 학회는 제가 바라던 공동체의 이상적 실현태였습니다. 아니, 그러길 바랬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요. 늘 제 한계를 넘을 것을 요구하는 공부와 그에 수반된 실천을 통해 제가 거듭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물론 이건 지금에 와서는 무척 맹목적이고 그야말로 이상적일 뿐더러, 이기적이기까지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햑회는 물론 '나'가 존재하고 있기에 '나'에게 의미를 갖는 공간이겠지만, 타인의 존재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 공간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또 무엇을 실천하며, 무엇을 통해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 공동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왜 학회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오직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 나를 구성하는, 내가 구성하는 실체인 '학회'와 '학회원'들에 대한 동등한 물음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왜 학회를 할까요.

 

물론 정답도 없고, 답변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장황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겁니다. 고민을 계속하면서 고민 자체가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사람도 있을 테고, 이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조차 1학기로부터 가져오지 못한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기에, 서로에게 학회를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때문에 늘 이 질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물음이 그 어떤 수능 언어영역 문제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 - 유치한 비유지만 - 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저로서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학회 '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꽤 많이 했었습니다. 그건, 지금 이 학회가 저에게 즐거움이며 생산이 아니라 부담이자 소모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부담과 소모의 원인은 외부보다는 오히려 저 자신에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학회를 그만두거나 혹은 자연스레 다른 대안을 찾는 방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회라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 혹은 할 수 있다는 원인모를 희망이 아무리 짓밟혀도 죽지를 않더라는 거지요. (참, 우습지만요..)

 

그러나 이 희망은 학회를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을 구현해낼 공간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학회가 한 사람의 지향에 온전히 들어맞는 모양새로 변화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학회원들 개개인이 바라는 학회의 상 - 그것이 이상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 은 학회원들의 머리모양 만큼이나 다를 겁니다. 학회가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출석을 체크하고, 세미나와 뒷풀이를 강제하는 곳이 아닌 자발적 공동체인 이상, 이는 학회가 하나의 정형으로 틀지어져 있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학회는 학회에 대한 바람의 집함이 아니라, 학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실천의 집합, 그 이상이어야 할 것이며 그 실천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접점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공유 지점을 만들어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능한' 학회의 모습입니다. 이 '가능한' 학회의 공유 지점들 속에 나의 지향, 곧 하고 싶은 것들을 구현해내기 위해 (그 구현 정도는 다르겠지만) 학회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를 통해 내가 학회 안에서 즐거움과 충족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제가 가졌던 희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학회 안에서 어떤 실천을 해 나갈 수 있을까요. 또 해야 할까요. 흔히들 학회를 학(學)과 회(會)의 합이라고들 말합니다. 또한 전반적인 학회의 상황들 속에서 학은 세미나, 회는 뒷풀이로 도식화되는 경향도 존재하구요. 하지만 그런 안일한 인식들 가운데서는 우리 학회의 현재를 조망하고 앞으로를 이야기할 방향성을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학회에서 하는 세미나가,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전문적인 계획을 통해 진행되는 수업이나, 보다 목표점이 명확한 스터디나, 혹은 보다 분명한 논쟁점을 가지고 있는 토론회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만일 이 다른 점, 혹은 (어떤 의미에서든) 보다 '나은' 점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세미나를 하는 이유를 잃게 됩니다. 단순히 사람들과 모이기 위해 세미나를 한다고 했을 때, 그 모임의 장소가 왜 학회가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 논리는 무너지게 되고 마는 것이구요.

 

과거에 좌파 학생들이 제도권 교육에서 배제된 맑스주의와 정치경제학 비판을 공부하기 위해 학회 학술 운동을 조직했다고 한다면, 더이상 사회 변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닌 우리들이, 제도권 교육으로 포섭된 학술을 바라보며 세미나가 무엇인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보편적인 시대적 고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학회 세미나를 학교 교육을 보완 또는 보조하는 수단으로 파악하거나, 흥미나 취미 위주의 내용으로 우회하거나, 혹은 학술 자체를 버리고 '회(會)'만을 남기는 변화의 흐름들을 마냥 거부하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과거와의 차이를, 혹은 다른 모임들과의 차이를 '목적 의식의 부재'라고 둔다면 잘못된 문제 설정일까요. 세미나를 통해 학회 차원에서 획득할 수 있는 정체성이나 지향점이 없고, 개별 학회원들이 얻고자 하는 학술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모여있다는 것,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거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 대다수의 학회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 학회 세미나의 목적이 '교양 학회'로서 대학생이 알아야 할 제반 교양을 자생적이고 대안적으로 학습하고 논쟁한다는 것 정도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관념들의 다발만으로는 - 즉, 실체가 없이는 - 여전히 온전한 의미의 목적이 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제별로 텀별로 진행되는 세미나에 각자의 목적 의식을 투영하면서 우리의 학술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그것들이 수렴될 수 있는 학회의 방향성을 설정해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방향성은 이념적이거나 (소위 말하는) 정치적인 그것이라기보다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정도의 공동체적 정체화 과정의 한 도달점이자 진행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속에서, 왜 학술을 하는 곳이 학회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그저 그 답을 학회는 학술을 하는 곳이라는 순환 논리에서 찾고 있었다는 점과, 개인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학술과 학회에서 지향하는 학술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점은 제가 간과한 점이네요.)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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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5.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

 

 

[WORKERS] Going up the Serra Pelada mine, Brazil, 1986

 

 

내가 세상에 없었을 지도 모를 때, 혹은 동일한 규모와 조건의 노동이 우리나라의 어느 조선소에선가, 공장에선가 행해지도 있었을 때.

 

사진은 기억이다. 작가와 대상 뿐 아니라, 제3자의 기억을 담는 미디어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하는 사진들에게서 나는 막연히도 안타까움과 경탄, 눈물겨움이 이지러진 감정을 발견할 따름이었다.

 

다만, 다만- 나는 사진을 통해 이들도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가 아니기에, 작가일 수 없기에, 감상에 빠지거나 냉소하거나 혹은 자책하지 않고,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을 위해 내가 발딛고 선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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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게.

나는, 내 몸은, 혹은 내 자아는, 참으로 많은 세력들의 각축장이다. 투쟁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나'는 다시금 - 혹은 처음으로 나를 지배하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의미의 피지배이면서, 나의 확장이기도 할테지만.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탈-' 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나'라는 공간을 설정하고 재정립하는 일이어야 한다.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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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배반했다.

무수한 이름들과 언어들, 별과 같이 반짝이던 사랑과 약속들, 불안하게 흔들리던 노래들과 편지들, 목소리, 공기, 잘못 건 전화, 동행하는 평면과 곡선속에서, 서늘하고 건조한 현실 속에서 눈물 훔치다.

 

때로는 죽음을, 때로는 사랑을, 어리광 부리며 울고 속삭이고 장난질치던 과거가 어른이 되어간다. 나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우는 데 성공한 건지도 모른다.

 

어리석다고 욕할텐가. I deserv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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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오해.

애써 붙들어 매지 않으면 금새 낡은 종이조각처럼 부스러지고 마는 관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산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 아닌가.

 

벨이 -  진동이 울렸을 때 번호를 확인할 수 있기 이전까지는, 나는 특정 시간대의 전화를 묵살한 적도 있었다. 나는 겁장이다. 거기에 이기적이기까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하기 싫은 일을 요구하는 사람의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건 지금에 와서도 끝이 다 털어내지 못한 숨막힘 중의 하나다.

 

그 행위에 핑계를 덧입히는 건 쉬운 일이지만, 얇은 장막을 벗겨내고 치졸함 - 혹은 극도의 자기방어적 나체를 발견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오해라는 건 관계맺음에 있어 그닥 특별한 양상은 아닌 것이다.

 

오해를 선사하고, 오해하며, 서글픔을 주고받으며 힘이 풀리는 손가락들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것. 뭐, 그렇다는 것. 방학이 끝난다고 해도 그게 가지런하게 배열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씁쓸하게 상처 위에 큐어 크림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것 외에는.

 

덧. 매듭같은 오해들이 나를 조롱하는 이외에는 그닥 의미있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도, 도망이 아닌 방어법을 찾기는 언제나 어려워. 플리즈 컴 백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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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드라마.

뭐, 나쁘지 않군- 이라고 해두고 싶지만 실은 시간이 그닥 많지 않다는 게 슬플 만큼 재밌군. 좀 더 연구해봐야겠다.

 

덧. 제목은, . BBC 제작의 드라마. 오랜만에 듣는 영국식 발음이 불친절하게도 귀에서 튕겨져 나가는 게, 마음에 든다. 기술은 B급인데, 의도적으로 보인다.

 

덧덧.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게,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를 위해서- 선풍기만큼이나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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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c, 4, us.

사실은 영화가 중요한 게 아닌 거다.

 

관계 속에서 희망을 얻고, 그곳에서 고민의 지점들이 교차하고 공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가 다시금 생성될 동력을 얻는 것이다. 거기에서 메카니즘을 찾아내고 싶다는 건, 어찌보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되었다.

 

내게도, 다시 흐물흐물해진 일상에 찬물을 끼얹고, 조금은 긴장할 기회가 왔다. Our time is running out- 그러나, 지나간 시간 또한 없었던 마냥 죽어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역사나 그랬듯이, 변혁과 시작에는 정체와 끝이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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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답변.

-

 

흘러간 시절을 노래하는 테이프 속 잡음처럼,

고민은 자꾸만 내 일상을 지배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늘어만 가는데,

정작- 그 범주를 설정하는 '나'가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지.

 

 

-

 

술자리에서 도망쳐오다.

 

택시비가 모자라 기사 아저씨께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혼자라는 것 쯤, 미안하다는 말로 덮어버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것도 딱 거기까지다.

 

힘들면 그만두라고 했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면 진작에 웃으며 탈탈 털어버렸을 거야.

비누칠로 씻어내며 콧노래를 불렀겠지.

 

나의 하루는 곧 나고, 내가 보내온 지난 5개월도 나다.

부정이 곧 소멸이 아니듯이, 나는 나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꾸만 모자를 눌러쓰게 돼요.

 

한 번 쯤은, 모자 속의 내 표정- 상상해 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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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AM. 11:47.

오늘만은 강박도, 증오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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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 웃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 본 막연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직한 희망들이 내게로 전염된다는 것, 어쩌면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동력을 구하려고 했기에 좌절하고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나와 나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 상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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