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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소통, 현실의 공유

평화캠프부터 제주도 워크숍까지 일주일을 숨가쁘게 달리고 나니 이제 곧 새로 시작될 일상이 또 기다리고 있다. 뭔가 변화의 시기이긴 한 것 같다. 아무렴 뭐 무기력하게 가만 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차분하게 그리고 즐겁게.

 

전교조 제주지회 선생님들과 비폭력대화 워크숍을 합께 했다. 자신들의 행동이 다 학생들을 위한 것인데 학생들은 그걸 몰라준다며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생님들을 보다보니 어렸을 적 내가 공부방 교사를 하던 시절들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들은 '기여'의 욕구에서라고 말들을 하지만 막상 들여다 보면 선생님들 본인의 기준에 맞추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전제하고 있는게 나에겐 빤히 보이는데. 역시나 본인들에겐 그걸 자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듯. '욕구'와 '수단/방법' 그리고  '부탁'과 '강요' 사이에서 자신이 취한 입장과 행동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두기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에 대한 기여 욕구, 좀 더 친숙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게 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거야"라는 식의 언설들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행동에 대해 자기 스스로 이미 전제하고 있는 고정틀이 있다는 점에서 관계에서의 활력을 불어넣기가 어렵다.

 

(워크샵을 통해 정리된 생각 ;)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동기가 관계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면 그 관계는 온전하게 유지되기가 힘들어진다.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욕구가 자신에게도 있는 욕구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 욕구들을 모두 충족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수단/방법은 자연스레 따라나온다. 진정한 유대가 아닌 상대의 변화가 목적이라면 이미 상대는 자신의 눈만 보고도 관계에 대한 나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가 있다.  

 

아이가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건 혹은 아이를 좌파적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를 시키는 것이건 이러한 일종의 수단/방법적 차원의 행위가 자신의 욕구인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 관계는 미끄러지고 비극이 시작된다. 공부방 아이들이 혹은 대학 후배가 공산당 선언을 나와 함께 읽었을 때 내게 충족되는 진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소통과 이해, 현실인식의 공유 뭐 이런 욕구가 아니었을까. 꼭 광역화 반대 투쟁을 함께 하고 맑스 세미나를 함께 해야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학 때 교육세미나를 하면서 기존의 권위적 교사-학생 관계를 부정하고 전복시켜보고 싶은 마음에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늘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 속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혹은 후배들이 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의식화 교육을 하는 것만이 나의 욕구라고 착각을 했었고, 한편으론 그렇다고 내가 비판하던 교사들처럼 권위적으로 학생들에게 '참교육'을 주입할 수는 없다는 자각도 하고 있었기에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교육'의 장으로부터 좌절하며 도망쳐 나오는 것이었다. 관계란 것이 늘 상호간에 영향과 자극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과정이거늘 나는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그 관계에서 아예 손을 놓아버리고 떠나버렸고 더 가관인 것은 그러한 나의 행위를 '평등한' 관계라고 일방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한번 다시 만나보고 부딪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들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수단/방법을 마치 보편적인 욕구인양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먼저 아이들을 공감하기 위해서 존재를 던져 노력을 해볼 것이다. 소통, 이해, 현실의 공유라는 나의 욕구를 섣불리 '기여'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나만의 수단/방법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기여'라는 욕구는 의도의 차원에서라기 보다는 그냥 다른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성질의 욕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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