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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힘을 아껴봐

대학병원 밖을 나와 소아재활원과 루스채플을 거쳐 청송대나 우중의 노천극장을 지나기도 한다. 폭양 뒤에, 마치 전쟁과 같은 빗속을 지나 맑게 개인 저녁 하늘의 신선함, 혹은 무거운 청어(靑魚)의 은빛과 검정빛의 칼날 같은 비늘, 그것을 연상시키는 구름들과, 그 구름 위에서 빛나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너는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온통 불명확한 것 투성이다. 나의 생, 혹은 문학, 진로, 학업, 관계, 사랑, 미래, 시간, 공간......모두가 알 수 없는 실체들로서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불명확한 것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어떠한 극복들을 내가 마주서야 할 때 나는 비틀거리는 층계 어디쯤에서 불현듯 위기감을 느낀다. 어떤 확실한 것, 즉 사소한 '확실함'이 하나라도 나에게 다가온다면 나는 요즈음의 전 생애를 그것에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우울해 하곤 하였다. 편지 잘 받았다.

(....)

위대한 정신들이란 순수한 관념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성에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은 가장 위험한 경험들로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이 예감이므로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고 멀리서 보고 차라리 '기다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는 아마 7월 20일경 갈 것 같다. 내려가면 연락하마. 아직도 나는 작은 충격들만으로 충분히 그곳의 추억들을 호출할 수 있다.

1984.2.7

<기형도 산문집>, '편지 1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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