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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나간 critical mass

정말 우연히 EM님의 블로그에서 <자본> 강독  모임을 알게 되어 지난 화요일에 사무실 일도 일찍 마치고 참석을 했다. 모임에 나가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 모임에 나간 건 <자본>을 읽고 싶은 욕구도 분명 있었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면도 컸던 것 같다. 런던에서 <자본>을 읽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라니 그냥 왠지 괜히 반가운 기분이었다랄까.-_-  내 깜냥엔 그냥 한글본을 봐도 독해가 잘 안되는데 그걸 영어본으로 본다니 역시나 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긴 하다. 사실 EM님이 소개해준 bbc 동영상을 더 재밌게 본 것 같다. The Victorians: Home Sweet Home 정작 런던에 와서 못 듣던 유창한 여왕 영어도 듣고 나오는 그림들과 설명도 재밌고 일타쌍피하는 기분이랄까. 암튼...지난 강독 모임이 끝난 뒤 뒤풀이 때 정신줄 놓고 놀아버려서 심지어 외박을 해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낯선 곳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 참 거시기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허허. 이래저래 민폐를 끼친 것 같아 그 날을 생각하면 약간 뒤가 구린 기분이다. 암튼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바로 출근을 했는데 하루 종일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 반쯤 졸며 일을 했다. 이러고 보면 나도 정말 한국 자본주의에 적합한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힘들면 그냥 집에 가서 쉰다고 하고 다음에 메꾸면 될 것을..굳이 꾸역꾸역 참아가며 남들 퇴근할 때까지 버티다니..나도 참... 남들이 상사 눈치 보며 그냥 시간 때우다 퇴근하는 거 뭐라 할 처지가 못 되지 않나..      

평일에 하루 그렇게 막 논게 여파가 컸는지 계속 몸이 찌뿌둥한게.. 오늘도 critical mass를 갈까 말까 살짝 고민을 했었다. 그래도 나름 내 자전거도 생겼고..이제 한달밖에 안 남았는데 의무감에서라도 나가보자는 심정으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사실 지난 번처럼 또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약간은 있었다.

카메라를 부러 챙기진 않았는데, 챙겨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드는 행진이었다. 역시나 워털루에서 출발했는데 이번엔 워털루 다리를 바로 건너지 않고 웨스트 민스터 다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웨스트 민스터 다리를 오르는데 전방에 펼쳐진 웨스트 민스터의 야경과 손톱 모양으로 웨스트 민스터 바로 위에 떠오른 초승달과 초승달 바로 또 위에 반짝 빛나는 별 하나(아마 금성? 아님 말고..)의 모습이 마치 기념 엽서에 찍힌 모습처럼 보였다. 그냥 멋져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립되어 그 순간을 기억에 담으려고 뚫어져라 쳐다보며 패달을 밟았다.

화이트홀 거리를 따라 트라팔가 광장으로 고고씽. 내셔널 갤러리의 야경이 그새 바뀐건지 아님 내가 그동안 눈치를 못 챘던 거였는지 오늘따라 내셔널 갤러리 외벽에 켜진 조명등 색깔이 너무나 황홀해보였다. 이것도 한컷 남겨야 하는데 한줌 아쉬움이.. 그 다음엔 어디로 향했지? 벌써 기억이 가물하다. 아마도 스트랜드 길을 따라 쭈욱 가다가...아니네 다시 템스강쪽으로 내려가서 그 다음부턴 블랙프라이어 다리까지 강을 따라 쭈욱 패달을 밟았다. 차가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니 나사가 풀린 내 자전거의 짐받이의 달가락 달가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자전거 탄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굵직굵직한 지리는 파악이 되어서 오늘 행진하는 길은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구나 하는게 대충 파악이 되었다. 지리 감각에 민감한 나는 또 이에 므흣. 패링던 로드를 따라 쭈욱 올라가다 킹스크로스를 앞두고 앤젤 쪽으로 방향을 틀어 쭈욱 행진을 계속. 결국은 다시 킹스크로스쪽으로 넘어와서 유스턴에서 턴, 러셀 스퀘어 홀본을 지나 드디어(!) 옥스포드 스트릿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안드레아스 남친 얀센을 만났다. 오늘은 음악 스피터를 단 자전거가 세대 정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한대가 얀센 자전거였다. 그걸 행징 시작하고 한 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알아채다니.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옥스포드 서커스에서 사람들이 삘 받았는지 더 행진을 안 하고 교차로 한 가운데를 점거해버렸다. 괴성과 환호를 질러대며. 오늘 따라 유난히 힘자랑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들 자전거를 두 손 높이 올려 들고 흔들어 댄다. 음악 스피커에서 나오는 리듬에 따라 사람들은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 댄스를 시작했다. 푸하하. 이것도 가슴에 깊이 담아둬야지. 그냥 왠지 모를 해방감이랄까. 그 바쁜 거리를 장악(!)했다는.

저번 행진 때는 발견을 못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니 뒷 안장과 패니어 혹은 등에 맨 가방 혹은 자신의 헬멧에 꽃으로 장식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 은근히 있었다. 어떤 사람은 크리스 마스 트리에 다는 조명을 메단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장미꽃을 자전거에 매달은 모습이 그냥 감동적으로 보이더라. 얍실한 싸이클-보통은 브레이크가 없거나 앞 바퀴에만 있는-에 댄디한 차림으로 나온 미소년들도 있고 짧은 치마에 자전거를 타고 나온 이쁜 언니들도 눈에 띄었다. 접때도 느꼈지만 다들 나랑 똑같은 생활인(?)처럼 보여서 맘이 참 편했다.

오늘은 맨 앞에 있는 대열의 성향 탓인지 자꾸 외곽으로 코스를 잡았다. 심지어 한 밤 한적한 하이드 파크를 가로질러 사우스 켄싱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간에 그야말로 조용한 곳으로 접어들길래 어딘가 물어봤더니 대사관들이 쭈욱 들어선 곳이라 한다. 어쩐지..조용하니 다들 호리호리한 저택들이었다. 대사관 거리를 지키는 경찰 한명이 처음엔 우리 행진을 막으려다가 다들 야유를 보내니 그냥 보내줬다. 꼴랑 세명이서 지키는 대사관 거리였다. 다들 총을 들고 있긴 했지만.. 서울 덕수궁 돌담길 따라 돌아가면 늘 전경버스와 전경들이 순찰을 돌고 있는 모습이 또 떠올라버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200-300 명 혹은 그 이상 되는 사람들이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난장판을 만드는 데도 경찰 한명을 못 본 것 같다. 평소에 싸이렌 울려대는 빽차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건지. 암튼 이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나니 꼭 이동네 중산층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대변인이 된 건가 싶은 자기검열 의식이 작동을 하지만..근데 이게 이 동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분위기인걸..

얀센이 내일 eco fair 에 같이 가볼테냐고 하니, 은근히 기대했던 예상치 못한 만남과 새로운 할 거리가 생긴 셈이다. 나에게 자전거를 빌려준 칠레 친구를 못 봐서 아쉽긴 했지만 2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을 즐겁게 보낸 것 같아 마음이 그저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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