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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산책

다시 토요일이다. 일 하는게 힘들거나 지루하진 않지만, 오히려 가끔은 일중독은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면서 주중을 지내곤 하지만 그래도 주말이 오면 즐겁다. 생각해보면 학원에서 일 할 때에는 주말이 늘 일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그 때의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이 놈의 자전거가 자꾸 말썽을 부려서 오늘 결국 자전거 포에 끌고 찾아갔다. 사실 공짜로 자전거를 얻은 주제에 이 불만 저 불만을 말하는 게 웃기지만, 자전거가 여기 저기 부실한 게 이거 원 자전거 탄 날은 별로 없는데 여기 저기 손질하느라 돈이 더 들어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_- 그냥 이대로 놔뒀다가 그냥 갔다줘버릴까 생각도 든다. 흑흑

내일은 마틴 아저씨를 따라 쥴리안과 함께 다시 런던 투어를 하기로 했고, 다음 주말엔 통째로 헤이스팅스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아서 그럼 오늘은 어디를 또 돌아다녀볼까 하다가 Archway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음 주말엔 자본 강독 모임에서 맑스 묘를 같이 가자는 제안이 나왔는데 난 함께 못 할 것 같아서 런던 떠나는 인사라 생각하고 오늘 찾아나섰다. 지난 여름에 이곳을 찾아갔을 때에  런던 어디가 어딘 지도 모르고 비도 추적추적 내려서 여기저기 헤메다가 막상 도착했을 땐 문이 닫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너무나 여유롭게 예전 기억들을 곱씹으며 Archway 역에서 내린 다음 산책삼아 묘가 있는 Highgate Cemetery까지 슬슬 걸었다.






하이게이트 묘지는 동묘가 있고 서묘가 있는데 맑스 묘가 있는 곳은 동묘이다. 럭셔리한 서묘에 비해 동묘는 상대적으로 초라하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근데 그 초라하다던 동묘에서 무려 3파운드나 하는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입장료라 뜨악했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꽤나 컸다. 들어가면 바로 어딘가에 맑스 묘가 보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들어간 게 3시 반쯤이었는데 문 닫는 시간이 4시라고 써있는 걸 보아서 마음이 살짝 조급해지기 시작했다.-_-





요 며칠 날씨가 좋았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끼어서 날이 쌀쌀했다. 묘지에 있어서 그런지 스산한 느낌도 들고. 지난 여름 체스터에서 우연히 들어갔던 cemetery 생각이 났다.





맑스 묘가 어디에 있을까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발견한 묘. 우리 말로 소방대원들?정도 되는 사람들의 묘인가보다. fire brigade란 단어를 보니 난 워털루 역에 있는 예전 소방서 자리를 개조한 펍 생각이 먼저 나서 여기 묻힌 사람들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 조용한 변두리에 묻혀 있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은 여왕이 직접 방문하여 추모하는 The Cenotaph에 묻힌 '참전 용사'들 급은 안 되나 보다.





공원을 쭈욱 한바퀴를 다 돌아가다 보니 다른 묘에 비해 우뚝 솟아 있는 맑스의 묘가 눈에 바로 들어왔다. 서경식 선생님 글만 읽었을 때는 맑스 묘가 무지 허름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정반대다. 다른 묘들에 비해 무척이나 도드라진다. 그새 누가 묘를 새로 세운건지도 모르겠다.





Workers of All Lands Unite. 이게 그 공산당선언에 나온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의 영어 버전인건가. 공원 문 닫기 전에 이 묘를 못 보면 오늘 헛걸음 한 셈인데 하며 조마조마 하다 마주쳐서 그런지 더 반갑다. 지나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






누군가 장미꽃 한송이를 올려놨고, 그 아래에는 맑스랑 같이 묻혀 있는 가족들 이름들이 나와있다. 그 아래에는 그 유명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공원의 조용한 분위기가 그냥 맘에 들었다. 어느 무덤이나 이렇게 조용하긴 하겠지만.. 여기저기 느긋하게 걷다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묘가 있어서 다가가 봤더니 혀를 귀엽게 내밀고 있는 여자 아이의 사진이 있다.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 귀엽게 생긴 친구가 여기 묻혀있다니. 문구를 보니 6살쯤에 죽었나보다. 가족들이 얼마나 슬펐을지 공감이 되어버렸다. 사진이 너무나 발랄해서 도저히 무덤에 어울려 보이지가 않았다. 이 귀엽게 생긴 아이는 저 세상에서도 그렇게 웃고 있을까





다시 되돌아 출구로 나가는 길에 노랗게 피려고 하는 꽃이 있길래 한 컷. 봄이 오는게지..





하이게이트 묘와 바로 붙어 있는 Waterlow Park. 나중에 지도를 보니 이 곳은 헴스테드와 바로 붙어있는 곳이었다. 날이 좀 좋았으면 했는데, 아쉬움을 달래며. 참 평화로운 공원이다.





헴스테드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저 멀리 런던 시내가 보인다. 내 일생에 앞으로 런던에서 또 살게 될 일이 있다면 다음엔 꼭 이 동네에 집을 구해서 주말마다 놀러와야지 싶다.





이 동네는 공공 벤치에다가 죽은 사람 이름을 새겨넣는게 문화인 것 같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던 누구를 추억하며..이런 식으로. 오늘 지나가다 우연히 날 사로잡은 문구를 보았다.
이 공원에서 시간을 즐기던 xx를 기억하며...
나에겐 다른 어느 문구보다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멘트였다. 안 그래도 묘를 한바퀴 돌고 나서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며 걷고 있었는데.
죽음이란 건 평소엔 생각할 일이 거의 없다가도 막상 죽음이란 걸 떠올리게 되면 일단 허망한 기분도 들고..죽을 때 내 모습은 어떨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 자연스레 내 삶에 대해서도 반추해보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열린 교실이나 공부방 이런 걸 하면 가끔씩 학생들과 자기 묘비명을 생각해보는 활동을 하기도 했었는데, 위 벤치의 문구를 만나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스쳐갔다.
난 머리가 크고부턴 가족과 관련된 모든 가치를 과도할 정도로 부정을 했기에 남들이 흔히 말하는 고향이란 것에 대한 감각도 없고, 또한 계속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기에 내가 발붙이고 있는 마을, 지역 이런 걸 가져본 적이 없다. 앞으로 내 삶을 떠올려 봐도 적어도 한 10년 간은 어디 맘 놓고 발붙이며 진득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병역거부를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붙잡고 있던 가치들을 다 놓아버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저당잡혀서 살기보단 삼미 슈퍼스타즈 소설에 나오는 인생처럼 그때 그때 즐기며 사는 삶을 너무 강박적으로 추구하느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지금 내가 자각하는 내 삶은 부평초처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삶처럼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어디 정착해서 자리 잡고 '평생' 직장을 구해서 결혼도 하는 그런 삶을 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죽을 즈음에는 저 사진의 벤치에 새겨진 사람처럼 사는 곳 근처의 공원에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센치해진 것 같다.

이렇게 쓰긴 했지만 아직 나에겐 버거운 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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