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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13
    스키너 성찰일지
    나르맹
  2. 2007/11/13
    기억에 관한 짧은 생각
    나르맹
  3. 2007/11/13
    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나르맹
  4. 2007/11/13
    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나르맹

스키너 성찰일지

행동주의 심리학의 유용성을 믿는 사람들은 천 명, 만 명의 아이들이 있더라도 특정한 자극과 반응 그리고 강화라는 조건 속에 아이들을 ‘투입’함으로써 교수자가 의도하는 바대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 같다. 관찰가능하고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행동주의 연구에서 개인의 내재적 동기나 주관적 감정 들은 말 그대로 블랙박스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이론을 비판만 하기에는 실제 교육현장에서 갖는 이론의 유용성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극들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다는 점에서 긍정할 수 있다면, 보통 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10세 전후의 아이들은 참으로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교사인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거나, 수업에 듣지 않을 때 그 아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별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츄파춥스 사탕 한 개일 때가 많다. 아이들의 반응에 따라 강화의 종류를 달리하는 토큰 기법의 효용성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교사가 특정 환경에서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특정한 반응양식들을 토큰기법과 같은 행동주의적 접근을 통해 이끌어내고자 할 때, 정작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반응의 중요성이나 내재적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는 외재적 강화물에만 정신을 팔아버릴 때이다. 세부적인 스텝마다 강화를 제공하여 애초에 목표했던 최종적 학습목표에는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 스스로가 특정 행동양식을 학습하고 표출하는 것의 중요성이나 의의를 모른다면 맥 빠진 수업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적절한 내재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실제 기대한 반응이 도출되었을 때 적절한 강화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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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관한 짧은 생각

* 정보처리이론에서 정의하는 학습 혹은 교육
“학습자 외부로부터 정보(자극)를 획득하여 저장하는 과정”(127쪽),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학습한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새로운 지식)이 관련이 있는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홈구멍에 채워지거나 관련을 짓게 됨으로써 새로이 변형된 쉐마(schema)를 갖는 경우를 의미한다”(133쪽), “쉐마의 재구성 과정”(134쪽)

* 학습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 후에 더 나아가 교육을 “다양한 스키마를 갖게 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맥락상 타당한 것일까? 여기서의 스키마는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말 그대로 정보처리과정으로서의 기억에 한정된 느낌.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은 사물들에 대한 내 가능적 행동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신경계가 발달할수록 뉴런들의 수와 조합가능성을 더욱 증가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더욱 넓아진다. 따라서 지각도 풍부(다양)해지는데 결국 ‘기억’은 단순히 암기력의 차원이 아니라 행동양식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정보처리이론은 학습자의 능동성, 인식과정에서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분명 행동주의와는 대립지점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론이 학습전략으로 적용되면서 결과적으로 단기/장기 기억력을 높이기 위한 단지 하나의 툴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기억을 몸을 구성하는 일종의 정체성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두뇌에서 일어나는 기억력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
요즘 내가 좋아하게 된 소설가 김연수가 다음처럼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의 현실은 “이제 불안을 갈구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내면적 안전보장의 시대. 다들 더 높이 오르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전락하지 않으려는 시대”라고. 그렇다면 정녕 불안이라는 가치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어떤 스키마가 필요한 것인가, 우문을 던져본다. 그런데 한 개인의 가치관을 담아내기에는 정작 정보처리이론에서 말하는 스키마라는 개념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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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아제이론과 교육의 개념

Piaget 이론의 세 가지 중요한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식은 환경 내에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개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둘째, 지식의 발달은 이전의 인지구조로부터 새로운 인지구조를 건설하는 과정에 기초하며, 새로운 구조들은 환경에 지적능력이 적응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셋째, 인지발달에 영향을 주는 근본 요소는 물리적 환경, 사회적 환경, 성숙, 평형화이며 이 중 평형화는 학습자의 자기조절과 자기수정 과정이다(교재 159쪽 참고).

Piaget 이론에 근거하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학습자가 된다. 여기서 유기체란 신경계를 가지고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 세계와 직면하여 자극을 수용하고 이에 따른 반응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때 종들의 진화 수준 혹은 우열성 여부는 신경계의 복잡성, 자극과 반응 사이의 텀 그리고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 양식의 다양성 등을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Piaget 이론에서 인간을 단순히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진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 이후로 서양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였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해지며 따라서 인간 학습에 대한 근본 가정 자체도 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학습 더 나아가 교육을 규정함에 있어 더 이상 보편타당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벗어나서, 개인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정체성들이 경합하는 과정으로 학습을 규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 지식의 선지자로서의 교사라는 전통적인 규정 역시 해체가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Piaget 이론에서 학습은 ‘정상적인’ 유기체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학습자의 자극을 촉진하는 존재가 꼭 교사로 한정될 필요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Piaget 이론이 교육을 고민하는 데 시사하는 바는 이성 중심, 지식 중심으로 학습을 규정짓는 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 있다. 특히나 근대적 교과지식의 학습과 이로 인한 안목의 형성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는 교육철학․교육과정학자들의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생리학적 접근에서 출발하는 Piaget 이론을 바탕으로 도출될 수 있는 교육의 개념은 결국 ‘삶의 방식의 변화로서의 학습’이며 이는 현재적 삶과 괴리되어 추상화된 지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교과교육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에서는 단순히 Piaget 이론만을 충실하게 적용한다고 해서 뭇 사람들이 말하는 교육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 발달의 과정이 동화․조절․평형화라는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되었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인지 발달의 과정을 추동하는 자극은 어떤 기준으로 교육적 정당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사(성인/정상인/국가)중심적 교육과정으로 인한 자극의 편파성을 문제삼는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 반대의 주장은 아이들을 말 그대로 ‘방목’해야 하는 것일까?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초적 쾌락에 대한 유혹은 연령․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학습의 저해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자극과 반응이 동시적인 유기체는 아메바인데 인간은 아메바가 되기에는 머리가 너무 커버린 존재들이지 않나. 자극과 반응 사이에 텀을 둘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반응 양식을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학습에 있어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나와 너, 나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합하는 과정 속에서 학습의 의미를 찾는다고 했을 때 인간(배우는자)의 자율성은 어느 누구도 군림하지 않는 의사소통의 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유의미한 자극을 주고받으며 양자 모두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교육적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구속하는 뜨거운(hot) 관계도 아니고, 쿨(cool)함이라는 명목 아래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행사하는 ‘방목’도 아닌 그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래서 관계를 고민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특히나 요즘 나에게는 더욱더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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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은 한 개인의 행동의 층위를 개인과 환경으로 이론적 분리를 시도한 후 한 쪽에 강조점을 두는 ‘행동주의자’나 ‘인간중심주의자’들과는 달리 환경, 개인 내적 요인과 행동이 서로 맞물려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가정을 하였다. 이 이론에서 학습과정은 학습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일련의 인지적 과정이며 행동의 언어적․시각적 부호 획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교재 213-215쪽 中) 그리고 학습의 과정에서 관찰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발을 딛는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실체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 관계적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나’라는 정체성은 결국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측면을 띌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정 부분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함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좋아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물론 좋아하지 않더라고 상호간의 관계가 시작되면 밉든 곱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될 수밖에 없다. 마치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과 이에 동일하게 폭력으로 대응하게 되는 일부 시위대의 관계처럼.


관찰학습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일종의 자기효능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 관찰하고 아무나 모방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이 가는 대상,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들게끔 하는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동일시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유의미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관찰 그리고 모방, 이 과정이 ‘학습’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그런데, 내가 요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무엇(누구)일까.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는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번뜩 스쳐간다.


한국에서 학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어떤 모델을 관찰하고 모방하게 되는가. 바람직한 모델에 관한 논의가 곧 교육과정논의와 결부되는 것이라면, ‘자신을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로 묘사되는 이순신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회자되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긴 한 것 같다. 혹은 고액권 지폐의 인물에 ‘남편에 순종하고 자식들에게 인자한’ 신사임당이 선정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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