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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듀라 사회학습이론 성찰일지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은 한 개인의 행동의 층위를 개인과 환경으로 이론적 분리를 시도한 후 한 쪽에 강조점을 두는 ‘행동주의자’나 ‘인간중심주의자’들과는 달리 환경, 개인 내적 요인과 행동이 서로 맞물려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가정을 하였다. 이 이론에서 학습과정은 학습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일련의 인지적 과정이며 행동의 언어적․시각적 부호 획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교재 213-215쪽 中) 그리고 학습의 과정에서 관찰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발을 딛는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실체적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 관계적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나’라는 정체성은 결국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측면을 띌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정 부분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함의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좋아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물론 좋아하지 않더라고 상호간의 관계가 시작되면 밉든 곱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될 수밖에 없다. 마치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과 이에 동일하게 폭력으로 대응하게 되는 일부 시위대의 관계처럼.


관찰학습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일종의 자기효능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 관찰하고 아무나 모방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이 가는 대상, 더 나아가 나로 하여금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들게끔 하는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동일시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유의미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관찰 그리고 모방, 이 과정이 ‘학습’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그런데, 내가 요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무엇(누구)일까. ‘사랑’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는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번뜩 스쳐간다.


한국에서 학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어떤 모델을 관찰하고 모방하게 되는가. 바람직한 모델에 관한 논의가 곧 교육과정논의와 결부되는 것이라면, ‘자신을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로 묘사되는 이순신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회자되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긴 한 것 같다. 혹은 고액권 지폐의 인물에 ‘남편에 순종하고 자식들에게 인자한’ 신사임당이 선정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씁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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