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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tty-gritty of solitary confinement

*수감자를 독방에 가두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미국 이야기에 관한 을 읽었다.

 

in spite of the known mental-health deterioration stemming from long-term isolation.” As one expert explained to me, “Their behavior is destined to deteriorate under those conditions. Then their poor behavior is used to justify why they should be there.”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은 Human Rights Watch 도 독방 수감의 문제를 지적했다고 한다. 감옥 갔다온 병역거부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독방을 원했던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출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옆에 없는 타지에서 한동안 생활해보면서 나는 설령 내게 독방의 기회가 온다할 지라도 독방을 선뜻 택하진 않겠구나 싶은게 독방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내 이익과 관련해서만 생각을 해오다가 이번에 이렇게 독방 수감이라는 문제를 인권차원에서 접근하는 글을 읽고 나니 아 이런 접근도 가능하구나 생각이 들어서 링크를 걸어둔다.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길래 잠깐 우쿠레레를 혼자 띵가띵가 치다가 문득 작년 겨울 더블린 공항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더블린 시내로 들어가던 때가 떠올랐다. 버스 안에서 따땃하니 잠에 빠져들었는데 깨고 나니 꽉차 있던 2층 버스가 어느 새 한가해지고 버스도 한적한 곳을 달리고 있는 거다. 그래도 설마 더블린 시내를 지나쳤겠어 믿었지만 내가 자느라 시내에서 못 내린게 맞았다. 휴우.

살짝 당황을 한 채로 바로 내려 맞은편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메던 바로 그 때 그 마을의 흐릿한 이미지와 깨끗한 하늘 차가운 공기가 함께 떠오른다. 근데 그 땐 왜 그렇게 잽싸게 다시 버스를 갈아탔을까. 그 마을을 좀 더 둘러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90분짜리 버스패스를 끊어서 탄 버스였고 잠에서 깼을땐 그 90분이 다 되가고 있었기에 돈을 아껴보려는 마음에 잽싸게 다른 버스를 갈아탔었겠지. 너무 낯선 곳이 불안도 했을거고. 하지만, 자다 깨어보니 나타난, 원래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우연한 곳을 둘러보는 것도 여행의 매력이겠건만. 쩝, 이 아쉬움이 왜 오늘 갑자기 찾아드는 건지 모르겠다. 

다음에 더블린 갈일이 만약 다시 생긴다면 그 땐 그곳을 꼭 한번 다시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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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case to challenge the unconstitutionality of Clause 1 in Article 88 of the Military Service Act

"Judge Park Min-jeong of Daejeon District Court has filed a petition with the Constitutional Court on behalf of a 22-year-old man, challenging the constitutionality of Clause 1 in Article 88 of the Military Service Act,"

 

For more details related this issue, plz visit the following link below.

http://joongangdaily.joins.com/article/view.asp?aid=2909881

 

 

약간 의아하기도 한 것이, 같은 중앙일보인데도 영어판 기사가 먼저 뜨고 한글본이 며칠 더 뒤에 올라온 것 같다. 뭐 용어가 그리 대수겠냐 싶기도 하지만, 중앙일보라 그런지 아니면 영역한 인간의 의도가 반영이 된 것인지 기사제목엔 CO가 아니라 dratf dodger로 표현을 해놓았다.

 

판사가 궁금해서 구글링을 해봤다. 이 관음증. 생년월일과 출신대학까진 뜨고 그 이상의 정보는 유료회원만 열람이 가능하단다. 돈을 내고 보는 사람들은 누구일지 새삼 궁금해진다. 사진을 보니 여성 판사이다. 법정에도 여성비율이 높아지면 고압적인 분위기가 좀 덜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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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8

푸핫, 어젯밤 꿈에 양현종을 만났다. ㅋㅋㅋ 둘이서 나란히 걸으며 동네 슈퍼에 갔다가 양현종 선수가 사과를 깎아줬다. 어느 동네였는진 모르겠다. 높은 건물이 없는 좀 한적한 동네였는데. 그리고 다시 어디론가 걸어가며 계속 얘기를 나눴다. 요즘 팀 분위기와 윤석민 이야기 등등 뒷담화 비슷한 얘기들도 들은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새 보니 ㅁㅅ와 함께 제주의 시내에 있더라. 어느 데모 현장에 같이 와 있는거다. 참 희한한 꿈이다. ㅋㅋㅋㅋ

 

오늘도 출근을...ㅁㅅ말처럼 신경 많이 쓰면 암 걸려서 치료비가 더 드니 속 편히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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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bureaucracy

나에게 주어진 업무(의무)들은 있는데 정작 권한은 없는. 결정권한과 관련해서는 내가 담당자가 아닌데 직접 일을 수행하고 1차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나라는 걸 깨닫고 경악을 했다. 소름이 끼쳤다. 이게 관료제의 본질이구나. 이것이야말로 '보신주의'의 기원이 아닐까. 의무는 명확한데 권한은 흐릿흐릿한,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프레임이잖아..-_-

내게 주어진 '학생인솔'이라는 업무를 하며 꼬이고 꼬인 소통구조(정확한 '담당자'의 부재 but 뒷처리는 내가 다 하는 듯한)를 절감하며 다른 사람을 자꾸 평가하려 하는 자칼들이 한 대여섯 마리쯤 나를 찾아온 하루였다. 나에게 일을 넘겨준 다른 사람이 뭇 공무원 중의 한명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내 맘은 요동치기 시작했으나 열심히 자기공감을 노력한 덕인지 집에 돌아올 때쯤엔 비로소 그 선생님의 느낌과 욕구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맘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오늘 필요로 했던 것? 예측가능성, 명료함, 소통, 편안함. 그리고 공정함..?

 

컴퓨터를 업데이트 하느라 북마크를 다 잃어버렸다며 내게 다시 블로그 주소를 물어본 러블리 마틴아저씨를 위해..깔짝깔짝

 

A sort of idea/lesson of what bureaucracy is suddenly occurred to me today after I finished all the work I was supposed to do. As far as I know, in the world of bureaucracy being perfomed in a school-though it seems to work in a less dehuminising way-, while I'm supposed to finish up what's given to me as a duty, desirably without questioning too much about it, I haven't got any power to be engaged in the decision-making process where my job comes from. Again, while I have no ideas who I'm regulated by, I can sense it's pretty clear that I'm being definitely identified by those who are in any occasion to charge me if something unexpected happens. This is how I define what bureaucracy is, from the very experience I had today. This idea is becoming clear to my mind as I get used to working in a school setting. The only thing that I'm really concerned about is that even without noticing, I might someday lose the sense of trust that anyone can change even though I try not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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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vs. Outkast - Hey We Will Rock You Ya

 

 

주말의 끝. 토요일 밤의 홍대. 일요일 저녁 동네 운동장. 가을 밤 높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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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슬럼프'란 단어는 잘하다가 못해야 슬럼프지 꾸준히 못해왔는데 무슨 슬럼프가 있었겠어요. 프로입단 때부터 슬럼프였다가 이제 겨우 슬럼프에서 극복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거예요. 야구 10년 차가 된 후에야 지독한 슬럼프에서 벗어나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선수한테 기억나는 슬럼프를 물어보신다면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야구를 못했던 기억이 너무 많거든요. 팬들은 제 마음을 잘 몰라요. 말하기 쉽게 '저 선수는 LG에선 헤매다가 KIA에서 왜 이렇게 잘하지?'하며 비난도 하고,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밑바닥에서 얼마나 힘들게 생활했는지를 아는 선수들은 지금의 제 모습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줘요.

 

-스물네 살 때인가? 정말 황당한 실수를 반복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김재박 감독님이 현대 유니콘스를 맡고 계실 때인데 9회 말에 플라이 볼이 떴어요. 그런데 그걸 놓쳐버린 거예요. 다행히 게임은 이겼고 한숨 돌린다 싶었더니 다음날 경기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그 플라이 볼을 놓쳤고 경기는 제 실수로 인해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임 끝나고 관중들이 다 보는 데서 타격코치님이 플라이 볼 잡는 연습을 시키시더라고요. 창피하기도 하고 너무 속상해서 연습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어요. 2군 경기는 낮에만 하니까 야간 경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에요. 라이트가 켜진 상태에서 공이 허공으로 뜨면 그냥 하얗게만 보이거든요. 잡을 것 같아서 서 있으면 공이 뒤로 빠지고, 정말 뭐가 팔릴 정도였죠. 그런 공을 자주 놓치면 자신감이 사라져요. 또 다시 그런 상황에 닥치면 두려운 나머지 자꾸 다른 수비수들을 쳐다보게 되고요. 한마디로 '헬프 미'인 거죠. 기사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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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중순까지만 해도 내가 전혀 모르던 존재였던 김상현 선수가 지금은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다니. 직접 만나본 적 한번 없는데도 말이다. 내가 살아온 삶은 사실 10년간의 슬럼프'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공 스토리에 맘이 짠해지고 감정이 이입되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 신파 스토리를 봄으로써 얻는 자기 위안? 뭐 이렇게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차원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10년 동안의 슬럼프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경지일 것 같으나, 모든 자신감이 사라지며 그냥 정말 주저앉고 싶은 순간의 느낌들은 왠지 공감이 많이 되는 듯..

 

콘트롤 씨와 콘트롤 브이가 하루에 가장 많이 누르는 자판이고, 야구기사 검색은 커녕 심지어 메일 확인할 시간도 없이 일만 하고 있는데 어느덧 내일 하루만 더 버티면 주말이라니, 이렇게 주말이 반가울 수가. 논술 학원 처음 들어갔을 때 남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나이가 이제야 되었건만, 정작 지금은 또 차라리 그 당시의 나이가 되었으면 하는 기분이 든다. 학교에서 나는 군대 '아직' 안 간 대학 4학년인데 나이는 '의외로' 많은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불편함, 찝찝함, 걱정 등등. 편안함과 가벼움이 나에겐 필요한데. 그동안 배운 눈칫밥으로 '적응(!)'하려 노력하는데, '행복주'로 불리는 폭탄주를 신입 선생들이 마시는 것이 이미 기정 사실화 된채로 한편으론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실 수 있는' 선택권이 또 제공되는 이 묘한(한국적 글로벌리즘/개인주의?) 분위기에 그냥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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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3

Too often it seems our best lessons of “violence doesn’t solve anything” come after a dramatic and gruesome depiction of violence. Why can’t we show the failure of violence through the success of nonviolence? Why must it always be a negative to prove a positive? My hunch is that it stems from a lack of knowledge.

Nonviolence has successfully toppled some of the worst dictatorships and stifled Nazi forces in several European countries during WWII. But these stories are seldom told in popular media. If storytellers, such as Dysart, got them out to the masses, perhaps situations, such as the one in Uganda, could be preventable.

 

*출처 Comic books as political exp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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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소통, 현실의 공유

평화캠프부터 제주도 워크숍까지 일주일을 숨가쁘게 달리고 나니 이제 곧 새로 시작될 일상이 또 기다리고 있다. 뭔가 변화의 시기이긴 한 것 같다. 아무렴 뭐 무기력하게 가만 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차분하게 그리고 즐겁게.

 

전교조 제주지회 선생님들과 비폭력대화 워크숍을 합께 했다. 자신들의 행동이 다 학생들을 위한 것인데 학생들은 그걸 몰라준다며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생님들을 보다보니 어렸을 적 내가 공부방 교사를 하던 시절들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들은 '기여'의 욕구에서라고 말들을 하지만 막상 들여다 보면 선생님들 본인의 기준에 맞추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전제하고 있는게 나에겐 빤히 보이는데. 역시나 본인들에겐 그걸 자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듯. '욕구'와 '수단/방법' 그리고  '부탁'과 '강요' 사이에서 자신이 취한 입장과 행동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두기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에 대한 기여 욕구, 좀 더 친숙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게 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거야"라는 식의 언설들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행동에 대해 자기 스스로 이미 전제하고 있는 고정틀이 있다는 점에서 관계에서의 활력을 불어넣기가 어렵다.

 

(워크샵을 통해 정리된 생각 ;)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동기가 관계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면 그 관계는 온전하게 유지되기가 힘들어진다.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욕구가 자신에게도 있는 욕구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 욕구들을 모두 충족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수단/방법은 자연스레 따라나온다. 진정한 유대가 아닌 상대의 변화가 목적이라면 이미 상대는 자신의 눈만 보고도 관계에 대한 나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가 있다.  

 

아이가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건 혹은 아이를 좌파적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를 시키는 것이건 이러한 일종의 수단/방법적 차원의 행위가 자신의 욕구인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 관계는 미끄러지고 비극이 시작된다. 공부방 아이들이 혹은 대학 후배가 공산당 선언을 나와 함께 읽었을 때 내게 충족되는 진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소통과 이해, 현실인식의 공유 뭐 이런 욕구가 아니었을까. 꼭 광역화 반대 투쟁을 함께 하고 맑스 세미나를 함께 해야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학 때 교육세미나를 하면서 기존의 권위적 교사-학생 관계를 부정하고 전복시켜보고 싶은 마음에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늘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 속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혹은 후배들이 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의식화 교육을 하는 것만이 나의 욕구라고 착각을 했었고, 한편으론 그렇다고 내가 비판하던 교사들처럼 권위적으로 학생들에게 '참교육'을 주입할 수는 없다는 자각도 하고 있었기에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교육'의 장으로부터 좌절하며 도망쳐 나오는 것이었다. 관계란 것이 늘 상호간에 영향과 자극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과정이거늘 나는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냥 그 관계에서 아예 손을 놓아버리고 떠나버렸고 더 가관인 것은 그러한 나의 행위를 '평등한' 관계라고 일방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한번 다시 만나보고 부딪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들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수단/방법을 마치 보편적인 욕구인양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먼저 아이들을 공감하기 위해서 존재를 던져 노력을 해볼 것이다. 소통, 이해, 현실의 공유라는 나의 욕구를 섣불리 '기여'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나만의 수단/방법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기여'라는 욕구는 의도의 차원에서라기 보다는 그냥 다른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성질의 욕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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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e Seeger

구글알리미 기능은 내가 설정해 놓은 키워드가 걸렸다 싶으면 바로 낚시를 해서 무차별적으로 나에게 보내준다. 그동안 날아온 글들 중에는 한국전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글들이 많았다. 그 당시의 병역거부 자체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주로 다른 얘기를 하면서 양념처럼 병역거부가 곁들여지는 식의 글들. 이번에도 그런 글인가 싶어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번엔 최근에 죽은 포크송 가수 마이크 시거의 생애에 관한 글(예를 들어 이런 글)들이 주루룩 걸려들어왔길래 한번 대충 훓어보게 되었다. 솔직히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가수 이름이고 유튜브에서 좀 찾아서 들어봐도 익숙하지 않지만 밥 딜런이 영향을 받은 가수라고 하니. 쫌 많이 대단하긴 했던 사람인가보다. 한국전쟁 때 병역거부도 했었다니. 괜히 호감이 간다. 잘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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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서-이택근

야구기사들을 보다가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진서와 이택근의 연애라니........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를 보고 윤진서에게 매력을 느꼈던 듯. 안에 깊은 응어리가 있어 보이지만 꾹꾹 누른채 내내 초연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의 눈빛과 말투. 한편, 기아의 팀방어율을 잡아먹는 팀의 중심타자 이택근. 리그에 드문 우투우타 중견수에 꾸준한 성적을 내는 선수. 그 성실함에 비해 팬이 그리 많아보이진 않는 선수. 올 해 WBC 끝나고 어느 티비에 출연했다가 한 달쯤 지나고 나서 우연히 다시 식사자리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택근이 윤진서의 번호를 따내서 대시를 했다, 라고 기사에선 말하고 있다. 서로 쉽게 연결되기 힘든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의 연애여서인지 호기심을 마구 자극한다.ㅎㅎ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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