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6

2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23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another world
  2. 2005/06/23
    민다나오와 술루의 모로들
    another world
  3. 2005/06/23
    웨스트 파푸아의 위기(1995~2002)
    another world
  4. 2005/06/19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2)
    another world
  5. 2005/06/19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1)
    another world
  6. 2005/06/19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수빅/클락)
    another world
  7. 2005/06/19
    한국,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다
    another world
  8. 2005/06/19
    내 친구 따따 2
    another world
  9. 2005/06/19
    내 친구 따따와 아베 1
    another world
  10. 2005/06/19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another world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지난 4월 26일 밤 12시경 필리핀 마귄다나오(Maguindanao)의 한 마을에서 무장 군인들이 부인과 그의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앞에서 하킴(가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3일 동안 하킴의 온 몸을 꽁꽁 묶고 조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되돌려 보냈다. 물론 군인들은, 체포영장 제시는커녕 체포 이유에 대하여 전혀 고지하지 않았으며, 체포 당일에는 하킴을 고문했다. 같은 날 그 무장군인들은 하킴 집 근처에 있는 두 집에 영장도 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기를 찾는다며 가재도구를 헤집어 놓았다. 사건 내용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피킷에 있는 코코넛 나무. 맨 앞에 있는 나무는 온 몸에 총알 흔적 투성이다. 윗 부분은 폭탄으로 잘려졌다.


그러나, 이곳 피해자들은 동트기 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다. 언제 또 군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은 동네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도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민다나오의 국내 난민들

민다나오 섬은, 1997년·2000·2003년 정부와 이슬람해방전선(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사이의 세 차례 큰 내전을 겪었다. 민다나오 섬에 가면 아직도 전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총알 흔적이 남아 있는 코코넛 나무들과 완전히 전소해 버린 집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만 명의 국내 난민들(In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아래 상자설명 참조)이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2003년에는 약 20만 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투폰(pitoopon)에 있는 난민센터


무고한 이들은 생명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는 친척집으로 피난갔으나, 대다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학교나 관청 마당에 모였다. 몇 개월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부근 빈터에 임시 처소를 짓고 공동생활에 들어갔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선단체에서 식수를 위한 우물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농민인지라, 피난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은 피난 생활 초기에는 교실이 없어 학교에 못 갔고, 계속되는 피난생활 기간 동안에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이 종료 된지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더라도 마땅히 먹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전쟁으로 경작지와 경작에 사용한 동물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도 이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격전지 중 한 곳이던 피킷(Pikit)에서 불발탄이 터져 밭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난민센터이든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하킴의 가족들과 난민센터에서 만난 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나선 사람들

민다나오 섬에 사는 국내 난민들은 난민에 대한 지원과 안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를 통해 그들의 힘(Bakwit power, Bakwit은 따갈로그어로 국내난민을 의미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전쟁 감시 역할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쟁 감시를 위하여 주민들이 ‘반타이 시스파이어'(Bantay Ceaserifre, 전쟁감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지역 주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과 군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전쟁과 인권침해에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평안하셔야 합니다. 제발…아무 일 없어야 합니다." 하킴 부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출처 인권하루소식 2005년06월11일/ by 은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다나오와 술루의 모로들

민다나오와 술루의 모로들
"그 섬 위험하다고 하는데, 괜찮겠냐?"

필리핀 민다나오 여행을 구체화할 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위험이었다. 하지만 위험이라는 것이, 실제 상황과 떠도는 이야기 사이에 간극이 큰지라, 여행지를 선택하는데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정작 민다나오에 와서 내가 만난 위험은 실제 존재하는 테러나 무력분쟁이 아닌 위험과 관련한 사회 현상이었다. 필리핀의 다른 섬(루존, 비사얀 등)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민다나오를 위험 지역으로 보고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위험을 근거로 필리핀 사람들의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례로 대형 마트에 들어가려면 경찰이나 사설경비원으로부터 가방검색과 몸 수색을 당해야 한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미국은 민다나오섬이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거라며 떠벌리며 공포를 자극해, 1992년 민중의 힘에 의해 쫒겨난 자국 군대를 다시 민다나오섬에 파견하여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필리핀 사회에 가장 큰 위험은, 필리핀 정부와 미국이 그리도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필리핀 모슬림들이 아니라, 그 모슬림들의 가난과 기나긴 역사의 시간동안 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정부의 불법행위일 것이다.

술루의 아이들


민다나오섬과 술루 섬에 있는 모슬림들은 모로(moro)라 불린다. 이들은 필리핀 국가건설이전부터 이슬람과 술탄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활공동체와 정치조직을 갖고 있었다. 각 부족들과 술탄 정치조직들은 이슬람 이란 종교 아래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고, 스페인의 카톨릭 개종 식민정책에 강력히 저항하며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통치 시기에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모로 생활공동체와 정치조직은, 미국의 식민통치가 이들의 생활기반인 땅을 빼앗고 루존섬과 비사얀에 사는 카톨릭 교도들을 대거 민다나오와 술루 섬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파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식민통치 시기 등록하지 않은 땅을 모조리 빼앗았는데, 모든 창조물은 신의 것이고 사람은 관리자에 불과하다고 믿은 모로들의 땅은 대부분 몰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국은 다른 섬의 카톨릭 교도들을 대거 민다나오와 술루 섬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에게 모로로부터 몰수한 땅을 분배했다. 모로들은 카톨릭 교도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됐다. 이주정책과 토지정책은 필리핀의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필리핀 정부는 1960년대까지 가난한 루존, 비사얀 섬의 사람들을 매주 1,000여명씩 민다나오로 보냈다(1913년 민다나오 내 모로가 76%였으나, 1939년에는 34%, 1999년에는 19%로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민다나오 모로들이 토지사용권을 지키기 위해 정착민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필리핀 정부는 모로의 그러한 행위를 그들의 성격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폭력성에 대한 편견을 사회에 심어주었다.

결국, 현재 비옥한 땅에서 쌀, 코코넛,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은 루존섬, 비사얀 섬에서 온 이주민들이고, 대규모로 바나나, 파인애플, 고무를 생산하고 있는 자는 다국적기업들이다. 모로는, 땅도 뺴앗기고 공동체도 잃어 버렸다.

민다나오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거대한 플랜테이션으로 국고 수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정부는 민다나오, 특히 모로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거의 인프라 구축이나 기타 공공서비스를 위한 재원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지난 3월 모로 자치지역 중 하나인 술루를 방문했었는데, 전기시설이 미비하여 하루에도 몇 번 정전사태가 발생했고, 수도 시설 역시 제대로 갖춰있지 않아 2층 숙소에서는 거의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필리핀 정부는 1999년 약 25조원을 국가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집행하였으나 모로 자치 지역에는 전혀 집행하지 않았다. 필리핀 인력개발 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가난한 10개의 도 중 8개가 민다나오에 있다.

술루 사람들은 대부분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산다.


그리고 필리핀 정부는, 정치 영역에서도 모로들을 배제하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지금까지 정부 각료와 상·하원에 모로가 단 한 사람도 배출되지 않았다.

모로에게 이슬람 종교와 문화는 그들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나, 카톨릭 국가에서 이들의 종교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모로들의 정치세력화가 1968년 자비드 학살 사건으로 촉발되었는데, 이는 필리핀 정부가 모로 군인 30명에 대하여 형제 모슬림 나라인 말레이시아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이들이 위 명령에 불복종하자 이들을 전격 처형한 사건으로, 모로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이 사건을 계기로 모로는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무장투쟁은 MNLF(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와 MILF(Moro Islamic Liberaion Front)와 MILF(Moro Islamic Liberaion Front) 등의 정치 세력으로 발전했다.

더 큰 문제는 필리핀 군대가 납치범과 테러범을 속출한다며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권을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다(필리핀 인권단체 TFDP가 2003. 1. 1.부터 6. 3.0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인권침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 민다나오이고, 군대에 의한 인권침해(50%)가 가장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은 민다나오에 있는 플랜테이션 다국적 기업 보호와 천연자원, 동남아시아 거점 확보를 위해, 모로를 외국 테러 조직과 연계시키며 테러 리스트에 포함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지난 2월 모로 자치지역인 술루 섬에서 무장 군인들이 일가족 4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무슨 이유로 군인들이 그들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결과는 아직도 발표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일가족 살해 사건으로 교전이 확산되어 2005. 2. 1.부터 2005. 3. 24.까지 9,879가족, 57,900여명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에 대한 구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정부와 필리핀 언론은 침묵할 뿐이다.

모로들의 주장은 민다나오의 독립부터 자치권의 확보까지 다양하지만, 중요한 공통분모는 과거 국가가 부당하게 빼앗은 모로의 땅을 반환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모로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라고. 과거에 집착해 현재까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지금의 질서를 파괴하는 그들이야말로 필리핀 사회의 위험 요소라고. 하지만, 과거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땅과 공동체를 파괴 당하고 현재까지 소외와 가난으로 허덕이는 이들을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불법행위에 국가권력이 개입하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불법을 바로잡겠다고 정의를 회복하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위험하다면, 무력과 제도를 이용해 소중한 개인과 공동체의 권리를 빼앗는 국가 권력은 정당한 것인가?

물론 이유가 정당하다고해서 무력사용이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그들이 무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행동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위험을 과장·왜곡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지 않을까?

잠시 술루에 체류했을 때, 숙소 바로 옆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식이 한창이었다. 베르디의 개선 행진곡에 맞춰 당당하게 걸어나가던 술루의 학생들, 그들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 파그만의 정원에 나온 한 구절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현재는 감옥에 갈 위험이 있고 미래는 희망이 없다면, 무엇을 선택하란 말인가? 
<출처 인권하루소식 2005년04월30일/ by 은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웨스트 파푸아의 위기(1995~2002)

웨스트 파푸아 내의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아래 저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번역이 매우 거칩니다. 양해해 주셔요~~

 

 

 

Papuans at risk

some personal observations, 1995-2002

-At Ipenburg-

 

1. introduction

 

1995년부터 2002년까지 파푸아에 있는 evengical Christian church에서 신학을 강의하였다. 아래 내용은 그 기간 동안 내가 목격한 것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1962. 8. 15. 네덜란드, 미국, 인도네시아가, 단기간의 유엔 관리 이후 인도네시아게 네덜란드 뉴기니아를 이양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3 당사자가 웨스트 파푸안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뉴욕에서 만나 합의한 것이다.

1962. 10. 1. 인도네시아 군대는 뉴기니아에 침입했고, 그 즉시 인도네시아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또는 반대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체포하고 죽이는 등으로 지배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래, 군대는 웨스트 자바, Minahasa(permesta rising), south sulawesi(Islamic republic of makassar, moluccas(republik maluku selatan) 등 여러 지역에서 자바사람들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들을 진압해 온 경험이 있다.

그러한 진압들은 내부에서 일정 정도 지지를 받았다. 미국도 반공산주의 활동의 일환으로 그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는 다른 지역들과 다르다. 우선, 웨스트 파푸아는 국제적으로 1950년부터 1962년까지 인도네시아와 전혀 별개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웨트프 파푸아에 상주해 있으며 그 특별한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굉장한 사업상의 이익을 누리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는 군사 훈련 경험을 위해서 중요하고, 군인들의 진급을 위해서도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기자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기란 상당히 어렵다.  

최근 1998년 수하르토 몰락 이후, 개혁 정책의 기치 아래, 인권침해를 감시할 수 있는 2개의 단체가 생겼다. Elsham Papua, Justice and Peace Secretariat of the Jayapura Diocese이다.

 

2. 킬링필드라고 표현할 정도로 웨스트 파푸아 상황은 심각한가?

 

웨스트 파푸안들의 사망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은 웨스트 파푸안을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구별하지 않고 사망률을 잡고 있다. 또한, 정치 상황 때문에, 웨스트 파푸안만의 사망률율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62년부터 그 지역은 군사 통제 지역이다(DOM or daerab operasi militer). 이는 민정과 상의하지 않고 군대가 그 지역의 안보를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1965년 군대는, 시민들의 일에 개입할 권한을 갖기 시작했다. 실제, 그들은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민간당국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민정 최고 지위는 군 장교나 이전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퇴역한 군 장교들은 군부의 지휘를 받고나 영향을 받고 있다. 

군대의 지위는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의 당과 유사하다.

 

더구나 외국 기자들은 거의 웨스트 파푸아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외국기자들이, 도시 밖의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찰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경찰과 군에게 보고를 해야만 한다. Paniai와 star mountains 같은 지역은 외국인 기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다. 웨스트 파푸아에서 일하는 국적이탈자는, 군정보기관의 조사가 끝난 뒤 허가를 받아야지만 일할 수 있다. 수하르토 시대에는 미디어가 전면 통제되었고, 조사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유력 중앙지는, 웨스트 파푸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웨스트 파푸아에 대하여 보도를 하였다. 일반적으로으로, 인도네시아 신문은 웨스트 파푸아에 대하여 거의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3. 5개의 사건

나와 부인은 2명의 10대 아이들과 함께 1995년말부터 2002. 3.까지 웨스트 파푸아에서 살았다.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었다. 몇 명의 파푸안 친구들과 동료들은 협박을 받았다. 1998년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약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안들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의료 부족, 정치적 폭력, 범죄, 가정폭력, 교통사고 등그러나 이것은 이슈가 되지 못한다. 만약 경찰이나 군대 폭력으로 사망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은 공안당국의 폭력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국민들을 명예훼손으로 조사하고 구속 기소하고 있다.

 

5가지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a)UNCEN 대학의 학생이던 Steven Suripatty가 1998. 7. 4. 교내에서 자유 발언 시위를 하던 중 군인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군대는 사건 조사를 거부했다. 물론 무고한 구경꾼이자 우리 학교 교수의 딸이 군인이 쏜 총에 맞아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 군대는 무릎 수술과 관련하여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b) Fajar Timur 신학대학교의 강사인, Me in Paniai 출신 Obeth Badii가, 1998년 의문사를 당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중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범인을 조사하는데 필요한 검시 등의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정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사실, 원래 살해 공격 목표는 Waena에서 Obeth의 집 옆에 사는, Kompas 기자 Octovianus Mote였을 가능성이 높다. Obeth는 이미 Octo에게, 이상한 사람이 옆집에서 왔다갔다는 하는 것을 보았다고 경고했다. Octo는 Obeth와 마찬가지로 Paniai 사람이고, 외모도 비슷했다. 3명의 증인이 있었으나, 한 명은 길에서 사고로 사망했고, 다른 한명은 라이트와 번호판이 없이 최고 속도로 달린 자동차에 치여 사망하였으며, 나머지는 도망가고 없다.

 

c)2000. 12. 밤, 경찰이 파푸안 내륙에서 온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생들은 해안에 사는 학생들보다 과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포위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미성년자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다음 날 석방되었는데, Cenderawasih Pos에 의하면, 체포된 여학생들이 경찰이 그들을 강간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 했다고 한다. 경찰 폭력 피해 학생들을 치료한 병원의 원장은, 나에게 학생들이 입은 상처가 의미하는 공포를 표현했다. 큰 상처는, 경찰들이 고의로 상해를 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응급처치 없이 트럭에 실려 왔다. 부러진 어깨와 손발이 많았다. 병원장은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처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경찰들의 폭력 행위 일부는 스위스 nueu zurcher zeitung 신문사의 기자인 Oswald Iten가 증언하였다. 당시 그는 이민법 위반을 이유로 기소되어 자야퓨라에 있는 한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는, joni karunggu와 orry doronggi가 경찰서에서 경찰에게 맞아 죽을 때 현장에 있었다.

 

d) 2002. 2. 대낮에 2명의 경찰이 33살의 파푸안 목사 robert ongge를 abepura 시장 근처에 있는 중국인 친적 집에서 살해하였다. 파푸안 사람들은 이 죽음에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저항하였다. 그의 마을인 kampong harapan에서, 자야푸라와 sentani 길을 막았는데, 이 길은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경찰 수뇌부는 2명의 경찰이 어린 나이와 경험미숙으로 분별없이 행동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지방신문인 cenderawasih pos가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희생자는 정치 활동과 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카르타에서 오랜 목사 일을 한 후 단지 중국인 아내와 2명의 자식과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kampong harapan에서 새로운 교회 일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e)UNCEN 대학을 졸업한 젊은 청년 Johan이, 그의 약혼녀와 함께 있던 저녁 살해당했다. 4명이, 약혼녀 앞에서 그를 단검으로 찔렀다. 단검은 몸에 박혀 있었고, 증거로 회수되었다. 회수된 단검은 군인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들은 그를 경찰로 보고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항구에서 경찰이 군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군인들은 경찰에게 보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군 지휘부는, 누구의 단검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조사는 끝났다. UNCEN 학생들은 수사와 재판의 의지가 없는 경찰에 분개했다. 그들은 자야뿌라와 Waena 길을 막으며 시위를 하였다.

 

5가지 사건의 피해자 중 그 누구도 정치 활동가로 알려진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항상 사건을 덮고, 범인을 보호하고자 했다.

 

d) 사건에서 경찰은, 인권침해가 아니라 군에 대하여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 인권단체인 komnas-ham이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경찰 대변인은 그 단체가 편파적이고 선동적이라고 발표했다.

 

4. 다른 사건들

 

5가지 사건은 자야뿌라 근처에서 발생한 것이나, 이 외에도 경찰이나 군대가 시위자들을 상대로 한 인권침해 사건을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1998년 biak, 2000년 nabire, sorong, timika, manokwari 등이다.

최근에 발생했던 가장 심각한 사건은 2000. 10. wamena에서 122명의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다. 2000년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웨스트 파푸안들은 어쩔 수 없이, 종교와 문화의 상징인 모닝 스타 국기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와히드 대통령인 1999. 12.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경찰은 국기게양을 분리주의, 반역으로 보고 사형선고 등을 하고 있다.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웨스트 파푸안들을 살해하고 있다. 우리가 sentani에 살았을 때 우리는 거의 매년, 독점권을 지키려고 buginese 사람들이 sintani 시장에서 파푸아 사람들을 살해한 것을 보았다. 우리는 범인이 재판을 받았다는 소식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3명의 웨스트 파푸안들이 sentani의 jalan pos tujuh에서 buginese 모토 택시 드라이버를 살해하였을 때, 세명 모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살해는 바로 직전 시장에서 살해당한 파푸아 사람의 죽음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대는, 웨스트 파푸안들이 정의를 위해 시위를 하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2000. 8. 웨스트 파푸안들이 sentani 시장에 불을 질렀는데, 이는 buginese 공동체가 선술집에서 살해당한 웨스트 파푸안 살인자를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배경, 상황

 

웨스트 파푸아에는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인권침해는 매우 광범위하여 자연재앙처럼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범인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경찰부터, 검사, 변호사, 판사까지 법률 시스템은 부패하였고 비효율적이다. 조사보도를 위한 표현의 자유가 없다. Ngo는 약하고, 정부와 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동티모르, 아체와 비교해 볼 때 웨스트 파푸안들은 말레이지아 외모와 비슷하여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곱슬거리는 머리, 검은 피부).

인종주의가 정치적 어려움의 문제를 가중시키는데, 자바 모슬림들은 곱슬거리는 머리와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흑인 기독교 웨스트 파푸안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은 열악하고, 인권침해문제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필요한 영어교육도 충분하지 않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제외하고는 외국 통신원이 없다. 외국 신문사들은 국내 통신원이나 경찰이나 군대의 앵무새인 antara와 같은 공식적인 뉴스 에이전시에 의존하다.

군사우월주의는, 수하르토 정권이 신법령을 공포하기 이전부터, 약 4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정치와 경제면에서 군인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경제적 이익을 부여받고 있다.

 

Zacharias sawor는 파푸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인도네시아 지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962년 초창기 인도네시아 지배 과정을 서술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억압적인 식민지 권력으로부터 파푸아 사람들을 해방시켜준 것이 아니라, 점령군처럼 행동하였다. 군대는 정복의 권리로서 땅과 사람, 재산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교육에서 네덜란드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려고 노력했다. 교육과 시험은 즉각 네덜란드어에서 인도네시아 말로 바뀌었다. 선생과 공무원들은 토요일 오전 사무실에서 군사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네덜란드 시대의 모든 책은 인도네시아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곳이 뉴기니아의 문화, 자연환경에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교육, 무역, 공무 등을 교육받은 파푸안 사람들은 네덜란드어에 능숙하고 네덜란드 기준을 따랐는데, 이들은 친 네덜란드 사람들, 반 인도네시아 사람들로 의심받았다. 인도네시아 군대의 시각에서 이는 적을 의미한다.  

 

1962. 12. 인도네시아 군대가, 친인도네시아 그룹과 함께 jayapura의 kota raja에 있는 교사 훈련 칼리지, 공무원 학교, 농업칼리지, 기독교 학교 등의 기숙사를 공격하였다. 학생들은 구타 당했고, ifar gunung에 있는 군대 캠프로 끌려와 감금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안의 지도자급 그룹들을 투옥되거나 살해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싹을 잘로 놓으려고 했다. .

 

정보기관은 인도네시아 정부 전복 혐의자 또는 그와 연계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정책을 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0. 10. wamena에서, 웨스트 파푸아 독립 열망의 상징인 모닝 스타 플래그를 짓밟기 위해 과도한 폭력을 사용했다. 웨스트 파푸안들이 이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항하자, 경찰청장은 웨스트 파푸안들이 사람을 죽이고 불태우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강간하는 동물들이라고 발표했다. 그 해 11월, 지방경찰청장은 NGO와 만나는 자리에서, 공공연히 파푸아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권침해를 정당화 하고 있다.

 

6. 경찰과 군대의 전략

 

인도네시아 공안당국은 전략차원에서 비사법적 살해를 비롯해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법에 저촉되는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웨스트 파푸아 지도자들을 살해함으로써, 처벌의 효과와 동시에 예방의 효과도 보고있다. 

군대는 갈등을 조성하기도 한다. 군대는 갈등을 조성한 후,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당하게 군사 행동을 개시하고 있다.

 

A)갈등 유발

 

살해가, 단순히 한 개인을 살해하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살해는 특정 그룹의 보복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이는 공안당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폭력을 유발하는 전략은, 평화로운 국기 게양식을 막는 방법으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1999. 12. 와히드 대통령이 국기 게양식을 허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모닝 스타 게양을 국가 모독으로 보고 처벌하고 있다.

2000. 10. wamen에서 군대는 국기게양식에 모인 사람들이 군대의 명령에 따라 국기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발포하였다. 그리고 군대는 국기를 짓밟고, 그 위에 오줌을 누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군대는 그 지역의 병원들에게 부상자를 치료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시체 검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꺼번에 매장되었다.

 

b)분열 조장

 

군 정보기관은 파푸아-인도네시아의 갈등을, 이주민들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인이 유발한 사건 때문에, 이주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웨스트 파푸안들의 정치적 열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설립된 웨스트 파푸아 의회지도자 Theys Eluay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청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살해범이 웨스트 파푸안 중의 한명이라고 발표했다. 살해 동기로는, Theys가 지역자치를 위한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에 자야뿌라에 있는 head of kopassus는, 사망 발생일 날 그와 같이 이동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자치 및 독립과 관련한 그의 지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총을 쏘았다고 발표했다.

 

2000. 12. 학생들 하숙집에 폭력이 발생했는데, 이것도 Balie과 Paniai 지방 출신의 과격한 학생들과 해안가 출신의 좀더 온건한 학생들을 분리하기 조장된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기자 Oswald Iten이 유치장에 있으면서 목격한 바에 의하면, 치명적인 사고가 몇 건 더 발생했다. 여튼 이 사건으로 1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체포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의 차이도 분열과 내부 갈등을 조장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I. S. Kijne 신학대학 교수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무슬림들에 의해 전소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종교간의 갈등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실제 Ambon과 North Moluccas 지역에 발생하고 있다.

 

Moluccan 지역 출신의 21살 여학생이 UNCEN 대학 출신의 학생에게 맞아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 범인은 Baliem Valley 출신의 Dani 사람이었다. 충격과 슬픔으로 700여명의 학생들이 강의를 중단하고 일주일 내내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여학생의 시신은 학교 강당에 놓여져 있었다. 계속 추도가 진행되는 동안 괴한이 들어와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 한 여학생이 특정 강사를 모욕하며 소리질렀다. 장례식 때 지방경찰청장이 Dani 그룹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 누구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찰은 나중에 정신병 환자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기소되었거나 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c)역량있는 지도자들 제거하기

몇 명의 지도자들이나 잠재적 지도자들이 제거되고 있다.

 

d)시민군

 

동티모르에서도 민병대가 제 몫을 다 했다. 민병대는 정규군보다 덜 훈련되었으나 훨씬 저렴하다. 군대의 통제아래 있지만 그들은 군대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7. 파푸아 사람들의 사망률

 

우리는 in Yoka Pantai, a Papuan village on the shore of Lake Sentani.에 사는데, 1년에 평균 1000명당 28명이 사망하였다.

 

Izaak Samuel Kijne 신학대학에 700여명의 학생이 있고, 연령대가 20-30대인데, 2001년에 15명이 사망했다. 건강한 집단에서 21%가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사망 원인은 교통사고, 가정폭력, 경찰폭력, 살해, 자살, 결핵과 같은 질병, 말라리아, 폭력 등이다.

의료시설도 매우 미참하다.

 

8. 결론

 

웨스트 파푸아에서 상당히 많은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다. 이는, 웨스트 파푸안이 인권침해와 침묵을 통한 면책에 길들여져 있고, 이를 자연재앙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이나 군대에 의한 인권침해를 보고하면, 증인이 위협받거나 살해당할 수 있기에 감히 보고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또한 외신 기자의 접근도 거의 불가능하다.

웨스트 파푸아에 시드시 모닝 헤럴드 외신 기자를 제외하고는 외국 통신원이 없다. 많은 기사들이 정부가 통제하는 Antra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지방 기자들은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조사에 기초한 보도가 거의 불가능하다. 웨스트 파푸아에 라디오 방송국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텔레비전도 하나 밖에 없다. 이 모두 정부가 통제한다. 더구나 인권침해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있다.

 

경찰과 군인들은 공공연히 웨스트 파푸안은 동물, 범인들, 돼지 들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범인들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인권침해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글로 남을 설득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글 쓰기가 두려워졌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능력 부재가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게 점점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계속 고민을 했는데, 그러한 개인의 고민으로 글을 포기하기에는 상황이 절박하고, 제가 필리핀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을 져버리는 거 같아, 용기를 내고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지난 3개월 간 다바오에 있는 IID(Initiative for Inernational Dialogue)에서 인턴활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접한 사건은, 술루 섬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2005. 2. 1. 무장 군인들이 아침기도를 마친 가족에게 총을 겨누어, 부부와 5명의 아이들 중 한 아이를 살해한 사건이었죠. 다바오에서 비행기로 1시간 30분, 쾌속선으로 3시간 걸려서 간 술루는,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고립된 섬 그 자체였습니다. 더구나. 술루의 중심인 홀로(Jolo)에는 곳곳에 무장군인들이 깔려 있었고, 밤 10시에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습니다. 술루 섬을 방문한 것이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때였는데, 그 때까지도 그 지역 무장세력들과 필리핀 군대가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도 외부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려했었죠. 특히, 군대의 인권침해 등을 고발하거나 인권침해 사건 조사에 협조하면, 바로 신상에 불이익이 발생하기에, 외부 엔지오가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해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엔지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때 만난 지역 활동가가 빙(Bing, Berkis A. Basaluddin)이었습니다. 학살 인근 지역에 같이 가서, 그들의 언어(Tausug)를 따갈로그어로 통역해 주고 그 지역 주민들의 상황을 저희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빙은, Jaga Kasulutan(그들의 언어인 Tausug으로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라는 단체에서 활동합니다. 그 단체는 술루에서 처음으로 생긴, 유일무이한 인권단체입니다. 술루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인권침해가 군인에 의한 것인데, 이를 고발하거나 인권침해 사건 조사에 협력하면, 실종되거나 갖가지 사고(폭격, 폭행 등)로 죽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술루 사건을 조사한 뒤 마닐라에서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하는데, 술루에서 대학 교수 3명만이 함께 했습니다. ‘왜 인권침해의 직접 당사자인 술루의 여성이나 어린이들이 오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함께 간 IID 활동가가, ‘그들이 로비를 하고 돌아간 뒤 어떠한 보복을 당할지 몰라 함께 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민다나오, 술루 섬에 사는 많은 모로들이 군인들로부터 인권침해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고 난 뒤 그들이 하는 일은, 가해자를 고소하거나 진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짐 싸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또 어떤 헤꼬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2002년 술루에 있는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이 인권침해를 감시하기 위해 연대 활동 조직을 만들어, 인권 침해 조사 및 인권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고, 2005년 초 자가 카술루탄(Jaga Kasulutan)을 정식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무실도 없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컴퓨터도 없습니다. 필요한 자료집을 만들어야 할 때는 활동가 친구들의 사무실 컴퓨터를 빌려 사용하고, 주로 현장을 다니며 인권교육과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군대로부터 헤꼬지를 당하면 몇 년간 땀 흘려 일궈 놓은 밭을 포기하고 도망가야만 하는 사람들, 수십년 동안 계속된 억압에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인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인권침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말이죠. 현재로선, 술루에서 빙의 단체가 그런 일을 용기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이고, 지역 주민들도 이 단체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가 카술루탄’에 요구되는 일이 많고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활동을 확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지원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만원계’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한달에 만원씩만 지원해 주시면, 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술루 사람들에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것입니다. 빙 역시, 모로의 인권문제를 한국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한 달에 한번, 모로와 술루의 상황 및 단체 활동 소식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그걸 통해, 우리의 인권도 확대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힘드실텐데,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이전에 이런 메일을 받으면, 마음 한 켠에선 부담을 느꼈지만, 귀찮아서 그냥 지우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몇 분만이라도 함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술루섬에서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 같이 고민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이루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로에 대하여 필리핀 민다나오 섬과 술루 섬에 있는 무슬림을 모로라고 부릅니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지배한 스페인이 끝까지 저항한 그들을 ‘야만인’이란 뜻의 ‘모로’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모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 섬을 이양받은 후, 민다나오 섬과 술루 섬을 강제로 필리핀의 한 영토로 편입하고, 루존섬과 비사얀에 있는 사람들을 민다나오와 술루섬으로 이주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전까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갖고 평화롭게 살던 모로는, 졸지에 미국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땅을 이주민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립 이후에는 크리스챤이 중심되어 필리핀 정부를 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모로의 목소리는 완전히 배제되었고, 그들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로들은 이주자들에게 대부분의 땅을 빼앗겨 가난으로 내몰렸고, 전기나 수도 등의 기반 시설도 모로들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정부는 이 지역에 인프라 관련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잦은 내전과 교육 수준이 낮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교육수준이 필리핀에서 가장 낮고, 낮은 교육 수준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난과 더불어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군인들에 의해 자행되고 인권침해입니다. 필리핀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민다나오섬에 군대를 집중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테러범 색출, 무기 수색 등을 이유로 최소한의 형사절차도 거치지 않고 모로를 잡아 가두거나 그들의 집을 침입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모로 저항 세력(그들의 무장 여부를 불문하고)들을 무력공격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모로는, 미국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빼앗긴 자결권 행사를 주장하며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민다나오 독립부터, 연방제 실시 등의 다양한 논의 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5년 6월 1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은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개새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은 것임에 틀림없다며 다시금 물었다. 보다 또렷한 음성이 귀에 와 닿는다. 분명 “개새끼”였다. 한국 공장에 다닌다는 리아와의 첫 만남에서 머쓱함을 피하기 위해 아는 한국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지거리였다. 마사에게 각인된 말도 다르지 않다. 마사는 “야, 임마”라는 성난 소리를 가장 자주 듣는다고 했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그래도 남의 집 안방까지 가서 그리 험한 짓 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마닐라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까비테에 닿자마자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필리핀 내 4개의 수출자유구역 중 가장 크다는 까비테에 자리 잡은 250여개 공장 중 해외기업의 30~50%는 한국기업. 다른 기업들이 그러하듯 한국기업들 역시 수출자유구역이 주는 장기간의 세금 면제 혜택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곳에 왔다. 공장들이 문을 열자마자 가족부양과 가난의 무게를 진 필리핀 노동자들이 앞 다투어 줄을 섰다. 리아와 마사 역시 5년 전, 여고생 교복을 벗자마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들 횡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해요. 주문량이 밀리면 토요일은 물론이고 밤을 새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하지만 할당량제라서 초과 근로 수당이나 야근수당은 거의 없어요. 연일 야근이 계속되면 몸이 못 견디는데 맨 처음에는 겁 없이 ‘하루 쉬겠다’는 말도 했었죠. 어떻게 됐느냐고요? 한국인 관리자가 별일 아니라는 듯 쉬어도 된다고 하기에 쉬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필리핀 상사가 불러서 해고됐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은 후론 아파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결혼 혹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고된 사람들이 있기에 2살 된 딸의 엄마이면서도 싱글이라 속이고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리아. 그는 매일 녹초가 된 몸으로 공장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채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예고도 없이 폐업을 하거나 “경기가 안 좋다”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는 공장이 많기에, 그 알량한 월급조차 체불돼 제때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기에. 거기에 6개월 이상 일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도록 한 필리핀 노동법 망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5개월 이상의 계약을 하지 않다보니, 다음달부터는 꼼짝없는 실업자 신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체크해요. 관리자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다보니 생리라도 하는 날엔 얼마나 끔찍한지….” 마사가 몸서리를 친다. ‘한국인’임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성희롱도 건너 뛸 수 없는 화두다. 툭툭 몸을 건드리거나 슬쩍 껴안는 것은 예사고 어떤 관리자들은 공공연히 성적 요구를 해오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고시키겠다고 협박을 해온단다. 공단 내 일본, 대만 등의 기업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한국기업처럼 성희롱이나 욕설이 일상화된 공장은 없다는 게 노동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한국 공장을 가장 ‘나쁜’ 일터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현지서 가장 나쁜 일터로 꼽혀-

넌지시 노조를 만들거나 싸움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떠본다. 한숨 섞인 답변이 되돌아온다. “일곱 식구가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한번 눈 밖에 나면 지금 다니는 공장은 물론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꿈이라곤 계속 일을 할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전부라는 사람들. 너무나 소박하지만 돈에 눈먼 한국 기업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투자자 유치’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자국 정부의 방관 속에서 한없이 아득해진 그네들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필리핀 까비테에서 2005년 6월 18일 by봄날/ 출처 경향신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수빅/클락)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미군기지 철수의 땅, 수빅과 클락 방문기

 
"과학자들조차도 사방가도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라며 땅의 심각한 오염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정부에 지역폐쇄와 경고문구 게시를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차는 이미 밀라 '국제 미군기지정화운동 연합'(Alliance for Bases Clean UP International: ABC International) 사무국장이 가리 킨 위험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부터 시작된 인가는 뜀 없이 이어졌다. 10여분쯤 더 달린 후 차는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췄다. 하나 둘, 아이를 안은 엄마들이 집으로 모여들더니 작은 마당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아이는 님플,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육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존말이에요. 간에 문제가 있지요. 이제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자궁질환을 갖고 태어났고, 조지와 에드워드는 각각 11살인데 둘 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의 엄마를 대신해 밀라가 아이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용어로 시작된 설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말로 끝났다.

갑자기 화가 북받쳤다. '왜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미 아이들로써 그 심각한 위험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하지만 화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누구라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 저주받은 땅을. 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애초부터 조금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미군에 의해 저주받은 클락(Clark)의 사방가도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가도는 미군의 기지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클락에서도 환경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 중 하나이며,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에드워드와 그의 엄마. 그의 웃음은 너무 해맑았다.




사방가도의 아이들. 미군이 남긴 재앙이 언제 이들의 웃음을 빼앗아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88년 미군 주둔의 역사

마닐라에서 불과 70∼80킬로미터 떨어진 수빅(Subic)과 클락이 미군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뒤부터. 1880년대까지 스페인 해군의 선박수리소가 있었던 수빅에는 1903년 해군기지(Subic Naval Station)가, 클락에는 1910년 공군기지(Clark Air Base)가 만들어졌다. 1946년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두 기지는 굳건히 유지됐다. 필리핀과 미국은 1947년 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을 체결하고 99년간 무상 기지임대에 합의했다.

하지만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군기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면서부터 철옹성 같던 기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기지협상을 재개하여 임대기간을 25년으로 감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기지 사용과 관련된 보상 문제를 제기해 일정금액의 경제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1991년 필리핀 상원은 미군 기지임대 연장안을 거부했다. 88년 미군기지 주둔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미군은 91년 철수했고, 두 지역에는 기지전환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빅과 클락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미군의 아시아 최대 기지였던 수빅과 클락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과 레저, 경제지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빅과 클락의 재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떠난 기지에 드리운 재앙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수빅 피해자들의 조직 '수빅 자연자원보호 운동본부'(Yamang Kalikasan Aming Pangangalgaan: YAKAP, 아래 수빅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리노는 이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일흔을 넘긴 리노는 1957년부터 미군기지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미군을 위해 일했으며, 괌 기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35년 동안 미군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석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오염됐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이미 결핵 등의 질환으로 고인이 된지 오래다. 마일도 마찬가지다. 미군기지에서 청소일을 했다는 마일은 "쓰레기를 치우다가 (화학물질 냄새에) 여러 번 기절했습니다. 관리인은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 저는 계속 몸이 안 좋았지만 직장을 잃을까봐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폐암을 선고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리노. 그는 수빅 미군기지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다.




마일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산다고 했다. 폐는 물론 심장과 혈액에도 이상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재앙은 수빅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했던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리고 미군 철수 이후 기지로 사용됐던 건물들이 공장 등으로 임대되면서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제이슨(8)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제이슨의 아빠는 해군기지에서 일했으며, 엄마는 미군철수 이후 핸드폰 조립 공장으로 임대된 미군건물에서 3년간 일했다. 그때 잉태된 제이슨은 생후 3살 이후부터 백혈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했던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유산했으며, 한 명은 제이슨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낳았다. 회사에 책임을 묻기도 했지만 사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



6개월에 한번씩 수혈받아야 한다는 제이슨은 "내가 더 아파지는 거냐"고 묻는다고 한다. 제이슨의 다른 다섯 형제들 역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거나 잦은 두통을 호소한다고 한다.




조지(가명)는 24년 동안 미군의 무기공장에서 '무기재료'를 만드는 일을 했다. 본인은 신장에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때 낳은 두 자녀 모두 심각한 뇌성소아마비를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은 혼자 힘으로는 몸을 뒤집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하수구멍을 통해 오염된 물이 미군기지 안에서 하천과 바다로 무단 방류됐다.


'미군기지정화 민중운동본부'(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 PTFBC) 필리핀 대표인 부기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과 전문적인 조사인력 확보의 한계, 게다가 미군이 정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염물질을 바다와 강 등으로 방류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상황을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미군기지 노동자로 일하면서 화학물질 오염으로 숨을 거둔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95년 수빅 관리청이 투자유치를 위해 수빅 44개 지역에 대해 실시한 환경조사에 따르면, 사격연습장·병원소각장 등 11개 지역에서 오염물질이 검출됐다.


화산폭발로 미군기지에서 생활…최대 피해자는 아이들

클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991년 6월 클락 미군기지 인근에 있던 피니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존의 터전에서 내몰린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기지 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클락 공군기지 본부로 사용됐던 캅콤(Clark Air Base Command: COBCOM)에만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로 사용됐던 땅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가꾸고,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면서 2년에서 5년가량 생활했다. 가끔 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이물질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이 절박했던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산폭발로 캅콤에 이주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씻기 위해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온 가족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물 때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손자는 뇌성소아마비를 앓고 있고, 저 역시 피부병과 두통, 위장장애 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클락 피해자들의 가족을 위한 공동행동'(Sama-Samanhg Aksyon at Ugnayan ng Mga Pamilyan ng Biktima: SAUP, 아래 클락 공동행동) 사무실에서 만난 노마가 말했다. 노마는 "캅콤에서 나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물이 오염됐으며 이로 인해 저희 가족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질환을 앓거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저는 단지 평화로운 생활을 원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캅콤에 거주했던 다른 이들의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다. 케빈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 11살인데도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아 6∼7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미 케빈의 동생은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았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라베스 역시 독극물에 의한 오염으로 인해 뇌성소아마비와 백혈병을 앓고 있다.



노마와 그의 손자. 노마는 사람들이 클락을 잊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꼭 다시 만나자"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케빈은 혼자 힘으로는 혼자서는 물조차 마실 수 없다. 그래서 케빈의 엄마는 24시간 그의 옆에서 떠나지 못한다.



정부 독극물 오염 확인…보상과 복구는 전무

상황의 참혹함은 이미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96년 캐나다 병리역학 전문의인 로살리 베르텔 등 독극물 전문가들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클락 공군지기 인근 13개 지역에 거주중인 여성 761명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독극물에 감염된 상태였다. 특히 캅콤에 거주했던 여성들 가운데 당시 임신을 했거나 아이들이 있었던 경우에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병, 암 등의 질환을 보였다.

이후 진행된 다른 조사에서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중추신경 마비, 선천성 심장병 그리고 언어장애 등 희귀병에 걸려 있음이 확인됐다. 환경오염 문제가 붉어지면서 클락 개발공사 역시 우물과 지하수 수질 검사와 토양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폴리염화비페닐 등이 검출됐으며, 14개 지역이 폐쇄되거나 개발이 보류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치료와 배상은 물론이고 환경오염지역에 대한 복구 정화작업 역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이 철수한 클락 캅콤에 많은 재원을 들여 엑스포공원을 건설했다. 하지만 부서진 미군 건물 등에서 끝없이 날리고 있는 석면 등의 화학물질과 토양에 스며든 오염물질의 악취 등으로 인해 엑스포 공원은 개장 후 바로 문을 닫았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몇 명의 아이들이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이 우물은 99년 필리핀 정부가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 곳이다.




여전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오염된 땅에서 밭을 갈고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바로 인근에는 대규모 한국 농산물 작물 단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야채와 과일 등은 필리핀 각처의 한국식당으로 보내진단다.

 <출처 인권하루소식 2005년05월28일. by 봄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다

한국,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다

 

살다보니 "잘 지내세요?"라는 그 평범한 질문마저도 아주 특별해지는 순간이 있다. 너무도 일상적인 인사에 망설임을 느낄 때, 삶은 다른 모습으로 옆에 서 있다. 필리핀에 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었으면서도 과연 무엇을 말하고 물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혹여 우리의 방문조차 지난 상처를 헤집는 잔인한 행동이 될까 두려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못 만날 인연’이란 말로 주저하는 길동무를 설득시키고 함께 약속장소로 향하던 그 길은 왜 그리도 아득하던지.


“하이(Hi)” 긴 생머리에 환한 미소를 가진 여성이 내 길동무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동안 헤어진 친구들이 다시 만난 것처럼 3년 만에 사건 의뢰인과 소송을 도와주었던 이가 필리핀 땅에서 만났다.


길동무와 에미(가명. 28)가 처음 만난 건 지난 2002년 여름. 에미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중개인의 말을 믿고 예술흥행비자(E-6)를 발급받아 다른 필리핀 여성 10명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고단한 삶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성매매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확언과 가난을 탈출할 발판이 될 수 있을 임금보장을 약속받은 터라 클럽 무용수로 일하는 모욕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한국 땅에 도착해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뺏기고,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돼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방에 갇힌 다음은 이미 늦은 뒤였다. 동두천에서 그렇게 석달을 살았다. 브래지어와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혀져 손님 테이블에 앉혀지고 매일 할당량의 매상을 올려야만 했다. 이를 채우지 못하는 날엔 한없이 무대에 서 있는 벌을 받아야했다. 잠시 앉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의자가 날라 오거나 욕설과 뭇매가 쏟아졌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 울부짖었지만 손님방에 들여보내져 윤락행위를 강요당했다. 학비를 마련할 욕심에 나이를 속여 한배를 탔던 16살의 필리핀 소녀 아마도 더러운 밤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렇게 한국은 잔인한 땅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런 정황이 필리핀 대사관에 알려져 구조되긴 했지만 억울함을 채 토해내기도 전에 윤락행위방지법 위반으로 강제추방됐다. 대사관과 길동무 등의 도움을 받아 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600만원의 피해보상 판결을 받아내긴 했지만 승소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월급은 고사하고 10원짜리 동전 하나 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땅에서 호텔 밴드로 일하면서 에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을 제외하곤 한국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공간이다.


이를 모르지 않기에 길동무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몇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지옥으로 보낸 이에게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는 법정의 현실 앞에서, 그렇게 착취된 돈이 다른 사람 명의로 둔갑돼 집행조차 불가능한 ‘법’ 앞에서, 길동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법이 바뀌고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피해 외국인 여성이 소송이 끝날 때까지 적절한 보호 속에서 국내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되었다. 하지만 피해여성이 직접 피해를 입증해야하거나 혹자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그림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현실을 정의롭게 바꾸지 못하는 법이, 재판은 서류가 아닌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었을까?


이주노동자란 이유로, 혹은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월평균 70만원(여성부 2004년 실태조사)의 임금을 주고 휴일도 없이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성매매를 강요하는 업주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개비’와 불안전한 신분을 볼모로 행해지는 성매매가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래도 세상 좋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


힘들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에 웃을 수 있다는 에미의 환송에 이별을 고했다. 재판당시에는 피해를 지켜볼 수밖에 없음에 마음이 무너졌는데, 지금은 에미의 딸들에게 대물림될 가난과 제2, 제3의 에미를 매일 만나면서도 달라질 줄 모르는 암담한 현실에 더 큰 방관자가 된 것 같다는 길동무의 씁쓸한 고백을 안고. 오늘도 발걸음이 무겁다.


<출처 경향신문. 필리핀 퀘존시티에서2005. 5. 13. by 봄날>

 

<현재 에미가 살고 있는 집>

 

 

<에미네 집 거실에 놓여져 있는 신랑 각시 인형.. 그렇게 행복하게 에미가 살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 친구 따따 2

내 친구 따따, 그 두 번째 이야기



“아, 따따 보고 싶다” 이건 불치병이다. 고작 1주일 다바오에서 떠나있었을 뿐인데, 말도 잘 안 통하고 게다가 나를 골려먹을 궁리만 하는 따따가 보고 싶다니. 그것도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번번이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날 올 적마다 따따가 생각나다니, 이건 분명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다.

말로 뱉어낸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전화를 걸어본다. ‘뚜~ 뚜’ 전화는 종일 통화중이거나 아무도 받는 이가 없다. 진작부터 주인장이 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갈 계획을 잡고 있었던 터라 허공에 울리는 전화벨 모양새에 주인장이 서울로 떠났음을 알아챈다. “살판이 났겠구만. 이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다닐 수 있을까” 쩝하고 궁시렁 거려보지만 입가엔 묘한 웃음이 감돈다.

일주일을 예정했던 마닐라 행은 마닐라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수빅과 클락 방문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2주일로 불어나버렸다. 3월 한국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들과 어울리면서 필리핀이 아닌 ‘한국’인 것처럼 살았던 1주일은 모두 끝나버렸다. 모처럼 맛보는 한국 음식에 넋이 나가 허리살 부는지 모르고 음식에 눈독을 들이던 날도,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라며 은근히 술자리를 탐했던 시간도, 영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데다 비슷한 일을 했던 이들을 만난 즐거움에 얘기가 잘 통한다며 끊었던 담배를 슬쩍 다시 집어 들었던 새벽도 안녕이다.

우리에 갇힌 새가 하늘로 비상을 시작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행기의 차창너머로 탁 트인 바다와 끝없이 이어진 산맥,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다바오다” 나도 모르게 반가움과 안도가 흐른다. 없는 게 없는, 그래서 삶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마닐라지만 서울과 닮았기에 ‘숨’이 막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따스한 햇살이 전해져 온다. 뜨겁긴 하지만 분명 마닐라의 햇살과는 다르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을 떠나 생면부지의 낯선 다바오 땅에 도착했을 때의 ‘평온’이 감돌면서 따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집안엔 잔치가 벌어졌다. 주인장 없는 틈을 타 따따가 그네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대한 것. 도착할 것임을 알면서도 판을 벌였다는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평생 못 누려보았을 ‘호사’임을 알기에 또 묘한 웃음이 스친다. ‘Oh, I miss you'라고 따따가 말한다. ‘진짜로’하며 얼굴을 찡그려보지만 금세 실토하고 만다. 나 역시 그리웠다고. 그렇게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하숙집 핼퍼와 하숙객의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됐다.

따따에게 배운 것들


고백하건대, 아마도 연민이었을 게다. 누구는 ‘연민’과 ‘책임’이 성립되는 관계는 불행한 것이라 거침없이 내뱉기도 하지만 따따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처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에서부터였을 게다. 하지만 두 달을 지내면서 그는 더 이상 ‘연민’의 대상만은 아니다. 교만한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다. 가난함이 삶이되었기 때문일 수도, 아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삶을 너무 오래 동안 살아서인지 몰라도 따따는 남은 음식은 물론 비닐봉투 심지어는 종이 한 장도 쉽사리 버리지 않는다. 때론 내가 콩나물을 씻는다며 떼어낸 머리 꼬대기를 모두 모아 음식을 만든다. ‘이건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따따의 눈초리가 무섭다. 8년을 헬퍼로, 남의 집 살이로 아득바득 살았지만 따따의 통장에 든 돈은 고작 800페소(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000원). 두세 번인가 책을 산다며 따따와 장보기에 나서보았지만 따따의 주머니에서 10페소 이상 나오는 것을 본 적은 그네 딸에게 보내기 위한 속옷을 살 때뿐이었다. 한국에서 ‘짠순이’로 소문난 나도 그녀의 ‘씀씀이’를 따라잡기엔 너무 소비에 익숙해져 있다. 만들어 쓰기를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그에 투여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싸다’는 이유로 ‘나중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고 ‘필요없다’ 쉽게 버린다. 하지만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현실에서, 지구의 80%가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에서 이건 사치다. 그걸 따따는 내게 원망의 눈초리와 그의 삶으로 가르친다.

해되지 않는 생명은 미워하지 않아야한다는 것도 따따에게서 배운다. 유난히 곤충(?)이 싫었다. 지하 방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집안에 유난히 온갖 종류의 곤충들이 많았다. 바퀴벌레가 밥상에 출몰하는 것은 기본이고 송충이가 신발장에 붙어있거나 이불위에 귀뚜라미가 출몰했던 일들은 유년시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공포 그 자체였다. 음식물의 작은 잔재라도 남은 곳엔 어김없이 개미떼가 행렬을 짓지만 따따는 개미를 죽이는 법이 없다. 다만 손으로 툭툭 치거나 ‘오’하며 까르르 웃을 뿐이다. 집안 곳곳을 기어다는 도마뱀도 따따에겐 그저 나를 놀려먹기에 좋을 존재일 뿐이다. 천정 위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도마뱀에 소스라쳐 그를 불렀던 시간에도 따따는 ‘It's good(해충을 잡아먹는 존재라는 의미)’이라며 ‘푸하하하’ 웃는다. 절대 쫒거나 잡는 법이 없다. 따따가 잡는 곤충이라곤 바퀴벌레 정도.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큰 바퀴가 날라 들어올 때면 사정없이 슬리퍼를 집어 던지며 ‘Not good'을 연발한다. 그래서 해되지 않는 곤충은 죽이지 못한다. 매일 쉬도 때도 없이 작은 개미들이 얼굴에 몸에 올라타며 미끄럼을 타지만 이제는 툭툭 쳐낼 뿐이다. 언제가 읽은 책 제목이 기억난다. ‘지구를 살리는 풍뎅이’라는.(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책인데, 당시에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 다시 배운다. 책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삶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임을.

따따가 그리운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도 때론 되도 않는 똥배짱을 튕기는 따따를, 대책없이 게을러 가끔은 끼니조차 거르게 하는 따따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아닌 무관한 존재들을 향해서도 닫히지 않는, 그 사람 눈높이에 맞춘 그의 배려다. 향수병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 슬쩍 자리를 피해주는 배려를, ‘아픈 것 같아’라는 말에 서툴게 끓여 내주던 죽 내음을, 매운 것은 죽었다 깨도 못 먹으면서도 한국음식 먹고 싶을 거라며 김치를 담겠다며 고춧가루 양념의 간을 맞추던 날도,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닭을 튀겨주던 모습도,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이 흐른다. 동전 몇 푼을 얻으려 이집 저집은 전전하는 아이를 보면 주인장 몰래 만들어다 팔고 있는 아이스캔디의 수익을 내어주고, 자신의 접시에서 빵을 덜어주는 것도 따따다. 매번 종을 흔들며 온갖 잡일을 시키는 주인장이지만 내가 싫은 낯이라도 보일 때면 ‘no!’라고 말하는 것 역시 따따다.

‘연수’라는 명목으로 떠나오긴 했지만 마음 가는 데로 떠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여행이기에 짐 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짐이라고 해봤자 갈아입을 옷 몇 벌에 책 몇권 든 가방하나가 전부. 여기에 ‘정’은 금물이었다. 그저 길 위에서 만난 ‘좋은 인연’정도로 스쳐가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벌써부터 따따가 그립다. 힘겨운 현실 앞에서도 웃음을 보내지 않는 그의 밝음이, 사람들의 발아래 선 듯하지만 가슴 안에 서있는 그가, 그래서 더욱 여행객의 가슴을 울리는 따따가 그립다. 나는 안다. 이곳에서 떠나면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집 저집 핼퍼로 떠도는 인생이기에 편지 부칠 주소한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따따가 그립다. 이 그리움을 안고 다바오를 떠날 수 있을까?

<필리핀 다바오에서 2005년 5월 26일  출처: 사람사랑/ by 봄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 친구 따따와 아베 1

내 친구 따따와 아베 1

 

 

“따따, 그건 안 된다니까” 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30분 째 타갈로그어(필리핀의 국어)와 영어, 그리고 바디 랭귀지까지 총 동원해 얘길 해보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다. 서점에 책을 같이 사러가기로 한 약속을 앞두고 따따는 내게 하숙집 주인장에게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얘기해달라고 말하고 있고,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따가 직접 주인장에게 가서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따는 흔쾌히 ‘오케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한 지, 아님 자신의 생각이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일어설 기미가 없다. 결국 따따가 먼저 운을 떼고 내가 거들기로 한 선에서 얘기는 마무리 됐지만, 우리는 결국 그날 서점에 같이 가지 못했다.

 

어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따따에게 하라고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따따는 필리핀에서 내가 거처하고 있는 하숙집에 고용된 핼퍼. 말이 좋아 가정 도우미지 우리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식모와 다름없다. 아니 더 아득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24시간이 모두 차압된 대기조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더 없이 친근한 관계처럼 보이다가도 주인장이 종이라도 흔들어 될 때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런 따따에게 휴일도 아닌 평일 오후에, 학습교재를 사기 위해 서점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하라고 했으니, 주인장의 힐난이 두렵고 월급 깎일 걱정부터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필리핀에서 만난 핼퍼


생면부지의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해 마음이 산란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한달 째로 접어든 필리핀 생활은 이제 적응 단계를 넘어 이곳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처럼 보이고, 타갈로그어가 한국말처럼 들리는 환청에 빠져 살 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정붙이기 어려운 것은 필리핀에 짙게 드리운 가난과 가난의 그림자 같은 핼퍼(필리핀의 ‘가정 도우미’)의 존재다.


서울 떠나오기 전 ‘필리핀 핼퍼’에 대해 얼핏 들어보긴 했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타국 생활에서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 바로 이 핼퍼다. 우리네로 방 세칸짜리 집에 살 정도쯤이면 자가, 전세를 가리지 않고 한집 살이를 하는 핼퍼 한두 명쯤 두는 것은 여기선 매우 자연스럽다. 해서 그 거대한 수에 놀라고 상이한 문화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핼퍼들의 고달픈 인생살이와 더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핼퍼와의 관계에선 ‘주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웃기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내 하숙집 핼퍼 따따는 전형적인 필리핀 농부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 꿈은 간호사가 되는 것. 여전히 따따는 그 꿈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가난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따따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올해로 25살이 되었으니 벌써 8년 전이다. 틈이 날 때마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지만 대화는 꼬리를 잇지 못한다. 필리핀 교사의 1/10밖에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한달 월급의 절반을 학비로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고작 8시간 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간을 모두 학교에 반납해야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는 일요일만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매일 남자친구인 ‘준준’이 그립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돈 많은 새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단다.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준준의 벌이로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따의 진담 섞인 농담 앞에서 ‘노’라며 단호하게 엑스자를 그린다. 하지만 말과 맘은 정반대로 향한다. 아무리 바지런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면, 3살짜리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남의 집 핼퍼 생활을 하고 있는 미혼모에게 눈먼 ‘행운’이라도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따의 사촌 집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가진 처자가 바로 따따>

 

 

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어둠속에서


따따의 고된 삶도 앞집 핼퍼인 아베에 비하면 복에 겨운 편이 되고 만다. 때로 따따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고, 똥배짱을 튕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베는 끼니조차 거르는 일이 다반사다. 집주인의 잦은 출장 때문이다. 물론 길나서는 집주인이 일정한 돈을 식비로 챙겨준다고는 하지만 하루 두 끼를 겨우 해결 할 수 있는 액수밖에 되지 않는다. 월급도 따따의 절반 수준이다. 슬쩍 방문해 본 아베의 집은 무섭기만 했다. 아베의 방엔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30도를 오르내리는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냉장고 코드는 뽑혀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약간의 쌀과 아베가 저녁거리로 사온 생선 한 마리뿐. 4년 동안 한달에 절반이상을 배고픔과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아베는 그만 둘 엄두는커녕 불평 한마디 뱉어내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아둔하다는 사람들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10년의 핼퍼 생활을 통해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문턱을 겨우 넘은 그에겐 돌아갈 곳도, 잠시라도 쉬어갈 안식처가 없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아무런 꿈도 없다고 말하는 그의 바램은 단지 7년 전 남편이 데리고 떠나버린 아이를 한번이라도 보는 것. 무표정함이 얼굴이 되어버린 아베의 나이는 이제 겨우 27살이다.

 

<모처럼의 외출에 아베는 한껏 멋을 냈다....>

 


가난은 이렇듯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비집고 찾아들고,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만든다.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고, ‘노예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눈망울에 절망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아직 핼퍼에 대해 고민하는 이 하나 만나지 못했다. 게으름과 짧은 영어실력이 그 연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계전선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16세미만의 아동 중 1/6이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보다 여행객들을 향해 돈을 구걸하거나 시장거리에서 전대를 찬 아이들을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핼퍼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를 찾는 것은 이 나라를 뜰 때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할지조차 모를 암담한 현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따따와 남자친구의 담장 데이트를 위해 보초를 서고, 아베와 같이 식사를 하기위해 주인장에게 어떤 핑계를 될까를 궁리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되는 타갈로그어와 영어, 그도 모자라 한국어와 바디 랭귀지를 총 동원해 수다를 떨고, 가끔 산책에 나설 때면 손을 맞잡는 것뿐이다. 풀이 잔뜩 죽은 따따의 얼굴 위로, 올 이 없음을 알면서도 집 앞 버섯바위에서 일어서 줄 모르는 아베의 기다림 위로, 오늘도 필리핀 다바오의 밤은 깊어간다. 헤아려지지 않는 핼퍼들의 고단한 삶을 밟고.


2005. 4. 8 필리핀의 다바오 시티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해설]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수탈의 역사와 독립 투쟁을 중심으로

 

                                             

 

1. 빼앗긴 웨스트 파푸아

1883년부터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뉴기니아 섬을 두고 쟁탈전에 들어가는데, 네덜란드가 섬의 서쪽 지역을, 영국이 섬의 북동부를, 독일이 남동부를 차지하게 된다. 섬의 동쪽 지역은 1975년 '파푸아 뉴기니'로 독립 하지만, 섬의 서쪽 지역은 계속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다. 네덜란드는 1952년 유엔헌장 73조에 따라 파푸아인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탈식민지화 과정을 거쳐 독립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한다. 이에 대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동인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한다는 헤이그 협약에 따라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헤이그 협약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 이양할 동인도 중 웨스트 파푸아는 제외되었고,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구를 거절한다.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은 독립을 준비하며, 1961년 12월 1일 나라 이름을 '웨스트 파푸아'로, 나라의 상징인 국기를 '모닝 스타(morning star)'로 정하고 의회를 창설한다.

회색으로 표시된 인도네시아 영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 웨스트 파푸아. 동쪽으로 노랗게 표시된 지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파푸아 뉴기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군사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하려 했고, 미국이 적극 인도네시아를 지원한다. 미국은 1950년대 수마트라와 북 술라웨시(North Sulawesi)에서 발생한 지역봉기를 지지하여 인도네시아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인도네시아가 소련과 동유럽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자 인도네시아와의 관계회복을 원했던 것이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은 당시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인도네시아를 달래지 않으면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므로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하기 전 일정 기간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는 1962년 8월 15일 뉴욕협정을 체결한다(1962년 9월 21일 유엔 사무총장 비준). 그 내용은, 네덜란드가 그해 10월 1일 권력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에 이관하고,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인도네시아에 권력을 이관하며(1963년 5월 1일 이관), 6년 안에 자유롭고 공정한 방법으로 독립 또는 인도네시아 지배 여부에 대한 의사를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물어 보자는 것이다. 위 협정에는 웨스트 파푸아 성인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관이 웨스트 파푸아인의 80%-90%가 독립을 원한다고 보고하자, 미국은 유엔에게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안 모색을 요청한다. 유엔은 그 요청대로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선발한 1022명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인도네시아 군인은 이들에게 '우리는 (독립이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원한다(I WANT INDONESIA)'에 투표할 것을 강제하고, 이에 반대할 경우 헬리콥터에 태운 뒤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다. 1969년 8월 2일 투표 결과 인도네시아 지배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이와 같이 웨스트 파푸아는, 자신들의 자결권을 행사할 겨를도 없이 미국과 유엔의 각본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 유엔사무부총장이었던 나라심한(C.U. Narasimhan)은 4년 전 "그 투표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 당시 유엔은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 누구도, 웨스트 파푸아인 100만명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2.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배

1) 공동체, 문화 파괴

웨스트 파푸아는 240여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족마다 언어와 문화를 가진, 세계 문화적으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1963년 5월 1일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한 뒤 '개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면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침투시키고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강요했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 문화, 종교 등이 기재된 책을 금지했고, 그들의 축제나 경제 관행들을 모두 금지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내 인구밀집 지역에 있는 주민들을 웨스트 파푸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고, 군인들은 웨스트 파푸아 고원 지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마을을 불태우거나,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숲으로 내쫓고 있다. 강제이주정책은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문화를 파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 원주민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2) 인권침해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법 벌목, 상권보호, 보호야생동물 밀매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 그리하여 군대는 고의로 지역문제에 개입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력을 유발하는 등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현재 군경 병력은 1만 5천에서 2만명이나 된다). 또한 과도한 군경의 투입은 체계적이고도 구조적으로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평화적인 저항수단으로 독립의 상징인 모닝 스타(morning star) 국기를 게양하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수한 사건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8년 비아크(biak) 섬에서 평화적으로 모닝 스타 국기를 게양하려는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8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2004년 12월 1일 자야뿌라 외곽인 아베뿌라에서도 국기 게양식을 위해 모인 사람들 향해 발포하고 국기를 밟아 찢어버렸다.

2000년 12월 7일에는 신원불상자가 자야뿌라 경찰서에 공격을 하여 경찰 1명이 사망했는데, 인도네시아 경찰은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하는 고원 지역 출신 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한 뒤 고문을 하여 2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2004년 10월 인도네시아 군대의 폭격을 피해 숲으로 피난간 주민들이, 식량과 추위를 막을 옷이 부족하여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점령한 1963년부터 지금까지 웨스트 파푸아인 10만명(전체 인구의 10%)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망사건에 책임이 있는 군인과 경찰들은 사실상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파푸아인들의 저항. 뒤에 보이는 국기가 모닝스타. [출처] www.westpapua.ca


한편, 웨스트 파푸아 독립을 위한 정치토론이나 모닝 스타 게양식 참여 등은 반란죄나 국가 모독죄에 해당한다. 앰네스티 미국지부가 2005년 2월 1일 발표한 성명서에 의하면, 1998년 후반부터 독립 운동을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인이 최소 72명이라고 한다.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의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하다. 인도네시아 인구 정책에 따라, 여성들은 피임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성의 몸에서 피임기구를 빼줘야 하는 영구 피임의 경우, 의료진이 이를 제거할 줄 몰라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군경에 의한 강간 사건도 많이 발생한다. 학교에 난입한 군인들이 어린 소녀들을 끌고나가 강간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3) 자원수탈

웨스트 파푸아에는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세계에서 구리, 금광으로 가장 큰 회사인 프리 포트(Freeport)는 인도네시아 군대의 도움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영국 회사인 브리티쉬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은 2005년 3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북쪽에 있는 빈투니 베이(Bintuni Bay)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할 권리를 인가 받았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보존되어 있는 다우림 중 하나가 웨스트 파푸아에 있는데, 인도네시아 군부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벌목 회사들이 빠른 속도로 이 지역에서 벌목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이들 기업의 안전을 위하여 일부러 분쟁을 조장한 후 그 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3.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계속되는 생존권 위협에 저항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왔으나, 인도네시아는 그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1960년대는 파푸아 독립운동(FPM, free papua movement)을 결성하고, 낡은 총과 창, 활, 화살, 도끼 등을 이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확고한 지배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 이상으로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였는데, 1963년부터 1969년 8월 이른바 국민투표가 있기 전까지 6년 동안 인도네시아 정부 때문에 사망한 웨스트 파푸아인이 약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약 2만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2000년 자야뿌라에 모여 의회를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과 대화를 시도하며 외부에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전파하기로 하였으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2001년 11월 의장인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웨스트 파푸아가 평화로운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열망을 짓밟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당신들의 자유를 보태달라(Giv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파푸아 아이들의 미소가 위기에 처해 있다. [출처] www.westpapua.ca

 

<출처 인권하루소식 05051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