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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선택의 범주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대로 Don't get married, just get a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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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난 해 10월, 노년의 한 여성이 부산의 어느 아파트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기사에 따르면 4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여고 동창생이 암 진단을 받은 후 사망할 때까지 그녀의 혈연 가족들이 아파트 출입문 열쇠를 바꾸는 등 강제로 관계를 단절시키면서, 결국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투신을 했다고 한다. 2이 가슴 아픈 기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두 분의 관계는 그저 ‘여고 동창생’일 뿐이다. 하지만 관계의 단절로 인한 상실감에 뒤따라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인연이 과연 동창생일 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두 분의 40년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또는 그 관계를 과연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두 분은 아마도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관계였을 것이다. 그녀들은 서로에게 오랜 친구이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동반자이기도 했으며, 혹은 연인이거나 가족 그 이상이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사회적, 제도적 상상력으로써는 이들의 관계를 정의할 어떠한 표현도, 제도적 방안도 없다. 


한편, 지난해에는 유례없이 많은 나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적으로 인정되거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도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이 대대적으로 동성결혼식을 열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물론 명망가의 대대적인 동성결혼식과 그 과정에서의 결혼발표 기자회견, 성별 구분을 넘나드는 웨딩사진, 키스 장면 등이 던진 사회적 파장과 충격은 예상대로 만만치 않았다. 혐오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반응이 “동성애를 하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어떻게 동성애자가 결혼까지 하냐”는 태도였던 것이다. 이 같은 반응들을 감안하면 두 사람이 결혼식 타이틀로 ‘당연한 결혼식’을 내세운 것은 나름 효과적인 반향을 고려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과연 결혼은 당연한가’ 혹은 ‘동성애자가 평등하게 제도적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경로로써 굳이 ‘결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과연 당연한가’라는 더 깊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성 간, 동성 간을 불문하고 결혼이 당연해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사회구성원 모두가 혼인 관계와 이를 통한 가족 구성을 자기 생의 당연한 과정으로 전제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사회적/법•제도적으로 인정되는 가족을 이루는 일, 심지어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굳이 제도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생각만큼 쉽고 당연한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회적, 물질적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적 규범에 자신을 맞출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때문에 ‘결혼이 당연한 사회’는 결국 그만큼 상대적으로 ‘당연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삶들을 계속해서 배재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지 성별이나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장애여부, 국적이나 인종, 노동 형태, 연령 등 한 명의 개인에게도 다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사회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결국 ‘동성애자에게도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이라는 구호는 동성애자 스스로의 복잡한 사회적 정체성조차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 ‘가족’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사회에서 결혼과 가족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그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 제도가 가지고 있는 규범과 경계에 대해 다시 보고, 누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탐색을 통해서 우리는 ‘동성애자의 결혼할 권리’를 넘어, 더 많은 이들과 연대하고 함께 사회적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지향들을 가지고 출발한다. 

 

판타지 너머의 결혼과 가족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현재의 일반적인 정의로는 가족은 혈연, 혼인, 입양 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을 의미하지만 가족의 의미는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수세기에 걸쳐 변화해왔으며 시대에 따라 역할을 달리 해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족의 정의와 범주, 기능이 특정한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법•제도적,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규범화되고 통제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가족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혼인과 출산을 통해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고, 양육과 돌봄, 교육 등을 통해 사회 구성원의 안정적인 재생산이 유지되도록 기능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재산의 배타적인 소유와 유지, 이를 통한 사회적 부의 차별적 분배가 가능하도록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가족 내에서의 위계에 따라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고, 가족을 위해 소비해야 한다. 특히,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한 가족 구조는 여성과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종속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생산물이 가족 내의 남성 가부장을 통해 재분배되도록 만들었다. 혼인은 때에 따라 (특히 여성과 아이의 거래, 심지어는 강제적인 결혼이나 강간을 통해) 정치적, 군사적 도구로 활용되어 왔으며, 혈연을 중심으로 한 종족/인종/국적의 분리는 체제 유지의 핵심적인 기제로 작동해왔다. 
한편, 이와 같은 사회적 속성 때문에 가족제도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흔히 이야기되는 '정상가족'의 범주는 이런 가족의 기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해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 가부장이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는 가족, 출산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가족, 부모가 없거나 부모 중 한쪽만 있는 가족, 조손 가족, 노인 또는 아동•청소년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가족, 장애인 가족, 이주민 가족 등은 재생산, 양육, 부양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비정상 가족'의 범주에 놓이게 된다. 결국 현재의 가족제도는 기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주의와 혈통주의, 성별이분법, 성별분업, 성/연령/국적/인종/장애 차별과 같은 것들을 지속시킴으로써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사회적, 법•제도적 정책의 기준들이 가족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기 때문에 개인은 기본적으로 가족 관계 안에 있어야만 이를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고, 결국 가족 내 관계와 질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남성 가부장은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인 아내는 돌봄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고용/노동 정책이나 임금구조가 모두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는 구조, 부양과 돌봄에 대한 책임이 가족에게 일차적으로 전가되고 있는 상황은 여전히 여성, 노인, 아동•청소년, 장애인의 독립적인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노동 구조 안에서의 차별을 정당화하며, 이들을 더욱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에서 동성결혼의 법적 인정이 가져오게 될 변화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이성애 중심주의나 혈통주의, 성별분업 등에 있어서는 기존의 규범과 관행을 어느 정도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족을 특권적 위치에 두고 가족을 중심으로 부양과 돌봄의 책임을 지우는 현재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동성결혼의 법제화는 결국 또 다른 차별의 구조를 낳게 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던 '정상가족'의 규범은 동성 커플의 가족에게도 거의 그대로 다시 오버랩 된다. 이제 일대 일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적정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상대방이나 아이, 또는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건강한' 동성커플과 그 가족이 정상성의 범주 안에 들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전보다 더욱 위계화 된 구조 속에서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적 위계와 ‘동성결혼’을 통한 재위계화의 가능성

 

게일 러빈(Gayle Rubin)이 <Thinking Sex>에서 언급한 아래의 그림은 성적 위계의 경계가 어떻게 위치지어지고 경합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다. “좋은 성”의 영역에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건강’하고, ‘경건’한 성으로 이성애적이고, 결혼한 관계에서의, 일부일처제의, 재생산이 가능한, 집에서의 섹스가 위치하고 있다. 반면, “나쁜 성”의 영역에는 ‘비정상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병든’, ‘죄 많은’ 성으로 복장도착자들, 성전환자들, 페티쉬스트들, 사도마조히스트들과 돈을 위한 관계, 세대 간 관계와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계에 ‘결혼하지 않은 이성애자 커플’이나 ‘난잡한 이성애자들’, ‘자위’, ‘장기간의 안정적인 레즈비언, 게이 커플들’, ‘바에 있는 레즈비언’, ‘목욕탕이나 공원에 있는 난잡한 게이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 경계의 사이에 놓인 벽들은 경계들의 사이에 있는 어떤 성적 행동들이 경계를 넘거나 장벽을 무너뜨릴 경우 도미노처럼 다른 더 나쁜 경계에 있는 것들마저도 허용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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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러빈은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지속적인 성적 투쟁의 결과로, 경계 부근에 있는 일부의 행동들이 그 경계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거의 대부분의 동성애는 여전히 경계선의 나쁜 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 함께 사는 것이나 자위, 그리고 동성애의 일부 형태는 인습으로 보는 추세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이 발표된 해는 1984년이다.) 러빈은 이제 동성애자라 할지라도 이들이 커플이고 일부일처제적인 관계라면 사회는 그것이 인간 상호관계의 전체적인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난잡한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페티시즘, 트랜스섹슈얼, 그리고 세대 간 만남은 여전히 애정, 사랑, 자유로운 선택, 다양함이나 초월성을 포함할 자격이 없는, 완화되지 않는 공포의 영역에 남겨진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성에 관한 담론의 대부분은 그것들이 종교적이든, 정신의학적이든, 대중적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인간의 성적 능력을 죄를 사하는 것, 건강, 성숙, 법, 혹은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아주 작은 부분의 논의에 한정시킨다.”는 러빈의 분석이다. 자신의 행위가 이 위계에서 높은 곳에 위치하는 개인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인증, 존중, 합법성, 사회적/신체적 이동 가능성, 제도적 지원, 그리고 물질적 혜택이라는 보상을 받지만, 성적 행위나 성적인 직업이 이 등급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나 직업에 해당하는 개인들은 정신적 결함, 나쁜 평판, 범죄, 사회적/신체적 이동 가능성의 제한, 제도적 지원의 상실, 그리고 경제적 제재에 놓이게 된다. 성적 위계의 경계를 결정짓는 주요한 논쟁들이 바로 이러한 영역의 논의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Rubin, 1984)

 

일례로 지난 해 발족한 ‘건강사회를 위한 국민연대’의 발기문을 보자. 

“모든 사회의 건강은 가정의 건강에서 시작되며, 모든 사회의 부조리는 가정의 타락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 제도를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은 건강한 사회, 건강한 나라, 건강한 세상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가치이다.…이 상황을 좌시할 경우, 가정의 붕괴로 인해 사회 전체가 건강을 잃고 타락 일변도로 달려갈 것이 명약관화하기에…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우리의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이 나라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혹시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 있으면, 주위에서 그 건강을 되찾아 주고자 노력하는 따뜻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3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타고난 성별을 개인의 인식이나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고’, ‘동성애, 양성애 등의 성적 방종’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이며, 이를 용인하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이고, 결국 가정의 붕괴로 인해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건강하고 건전하지 못한 행위를 사회적, 제도적으로 용인함으로써 망국에 이를 것이라는 이들의 공포는 러빈의 그림에서처럼 성적 위계의 붕괴를 불러올 도미노 현상에 대한 공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편으로 이에 대한 대응 논리 역시 같은 수준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비 이성애적인 성적 지향이나 다양한 성별 정체성에 대해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주장이나, 이성 부부만이 아닌 사랑하는 관계의 동성 부부도 ‘일 대 일의 안정적이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에이즈나 성병의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결국 건강한 가정도 지켜지고 나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강조하는 논리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논리들은 확실히 포비아 세력과의 싸움에서 더 많은 대중들을 모으는 데에 효과적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성적 위계의 붕괴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면서 ‘좋은 성’의 영역에 있는 성적 규범을 수용할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을 좀 더 안전한 영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장벽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규범적 경계를 강화하면서 이 규범 안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을 다시 위계화하는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이제 장벽의 경계 안팎으로 다시 ‘좋은 성적소수자’와 ‘나쁜 성적소수자’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는 이 경계 위에서 전개되기 쉽다. 실제로 미국의 보수적 게이들은 “미국의 주류 사회에 포함될 수 있는 ‘존중할만한 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동성애자들은 가족 가치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하거나,(서동진,2005) “결혼은 사랑, 섹스, 그리고 책임이 연계된 성인으로서의 삶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고 주장하면서 결혼할 권리를 통해 동성애를 도덕적 위치로 이동시키고자 한다. 결국 이들의 논리 속에서 동성애자의 성적 시민권은 성적 지향이 아닌 ‘결혼한 상태’에 근거하여 획득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한편에서는 퀴어들이 결혼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인 정책 입안자들이 결혼을 통해 퀴어들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Jyl,2005) 실제로 Bell과 Binnie는 이미 에이즈 위기 당시 영국 대처리즘의 뉴라이트 전통 속에서 등장한 '사이비관용 호모포비아(Pseudo-tolerant homophobia)' 정책을 예로 들어 이러한 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정책은 동성애를 전면 금지하기보다 올바른 동성애와 그릇된 동성애를 구분함으로써 오직 사적인 영역에서만 섹슈얼리티를 행사하는 '선량한 게이 시민'을 규정하려 했다. Belll과 Binnie는 '선량한 게이 시민'들의 결혼권, 가족 구성권, 양육권 등 이성애 중심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제도들에 대한 권리 주장은 근본적으로 정부의 '사이비관용 호모포비아' 정책에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동등한 권리에 대한 주장만으로는 사회의 이성애 중심성을 해체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성적 소수자의 인권 역시 향상될 수 없다는 것이다.(esac,2007)

한편, 이러한 '사이비 관용' 정책들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성적 소수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인정을 둘러싼 시장과 국가 사이의 긴장과 협력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Evans는 '윤리에 어긋나는' 성일지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가는 자본주의 시장과, 이에 규제를 가하면서도 성적 소수자들 일부를 규범화하여 수용하거나 합법화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는 국가의 관계를 언급한다. 이러한 국가와 시장 사이의 역동 속에서 성적 소수자들은 비윤리적인 존재로 낙인 찍혀있으면서도 합법적인 존재라는 이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esac,같은 글) 

 

'가족화된 사회'를 넘어, 우리 모두의 ‘삶의 권리’를 위해

 

이제,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왜 이성애자만 결혼을 할 수 있고, 결혼의 특권을 누리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그 모든 삶의 권리와 사회적 보장이 결혼을 전제로 주어지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물론 사회적 보장이나 혜택 따위를 떠나서라도 최소한 결혼을 원한다면 누구나 사회적 차별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또한, 당장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동성결혼이 이성애 중심의 결혼과 가족제도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동성결혼이 우선적이고 필수적인 전략이 될 필요는 없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여전히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도가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동성결혼의 법제화가 오히려 다시금 가족 중심의 사회구조를 강화해주고 새로운 성적 위계화를 통해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노동 조건, 주거, 의료, 노후보장, 양육 등 모든 것이 결혼과 가족제도 안에서만 가능한 상황, 그리고 이에 합당한 기준을 갖추기 위해 정상성의 규범에 다시 우리 스스로를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성결혼이 과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견고한 가족제도 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온전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준이 되고, 이를 통해서만이 사회적 삶의 조건들이 충족될 수 있다면 이것은 강요된 전제이지 ‘선택’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성적 통제의 이데올로기가 단지 윤리적 규범에 따라 작동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인 구조들까지 모두 거대한 성적 시스템을 기반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윤리적 규범은 사실상 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써 기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결혼과 가족제도는 이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있는 핵심고리이다. 미셸 바첼렛(Michèle Barrett)과 메리 맥킨토시(Mary McIntosh)는 <가족은 반사회적인가 The Anti-Social Family>에서 이를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의 사회를 '가족화된 사회'라고 지칭한다. 현대의 가족제도는 사실상 전 사회에 침투해 있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지점이며, 이데올로기화된 가족의 생활상과 가족 내 역할 규범이 노동시장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가족은 계급지위를 상속하고 부를 상속함으로써 계급을 재생산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가족 중심의 구조 안에서 자립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이 가족은 '자유로운 개인'인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종속되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보다 돈을 적게 벌어도 되고, 아이들은 자신의 부양자인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장애인이나 노인,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족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미셸과 메리는 이렇듯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각종 신화로 포장되어 있는 결혼과 가족제도 때문에 그 밖의 다양한 관계들과 공동체들은 비하된다고 분석하고 있다.(Michèle&Mary,1982) '가족화 된 사회'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우리가 주장해야할 지점이 '결혼할 권리'가 아닌,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 개개인의 '삶의 권리'를 위한 방향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김순남은 동성애 친밀성에 대한 연구에서 권력 관계 속에서의 차이와 차별, 불평등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들의 사적인 '선택'의 영역만을 가시화하며 친밀성의 변동을 개인화할 경우, 선택을 제한하는 계급, 젠더 등의 사회적 차이를 비가시화하게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자원의 차이 속에서 독립적인 삶의 모델을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주체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구분이 강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김순남,2013) 동성결혼이 법•제도적으로 인정된다고 해도 사회적/경제적 조건, 파트너와의 관계 설정, 젠더, 성별정체성, 국적이나 인종, 장애 여부 등의 다양한 차이들로 인해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은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선택할 권리'가 아닌, '결혼/가족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모든 개인이 독립적인 삶을 보장받고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 '개인을 기반으로 한 사회보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성적소수자들만이 아닌 가족구조를 중심으로 종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방향이자, 성적소수자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을 재조직화하여 고려해 볼 수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가족구성권’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가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가구) 생활을 제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지만 사회적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는 복지의 대상은 가족이 아닌 개인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서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기 보다는 가족 성원들 간의 관계적 결합을 중심으로 가족(가구)의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이재경의 제안을 유의미하게 볼 필요가 있다.(이재경,2004) 이는 가족 다양성 논의와 그 방향에 대한 쟁점이기도 한데, 결국 '다양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이성애자 가족+정체성 범주를 기반으로 한 여러 형태의 가족들'로만 이해된다면 제도적 지원을 위한 규정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우며, 결국 개인은 다시 가족 내의 관계 안에서만 권리의 획득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 실질적으로 다양한 관계를 통한 가족/공동체의 구성과 실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혼/가족을 전제로 한 조건들 대신 개인들의 자율성과 독립성, 주체성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들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족을 전제로 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것은 지금까지 사회적 생산력과 안정적인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가족제도를 통해 견고하게 유지되어 왔던 성적 통제와 차별의 구조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는 가족제도로 인한 여성과 아동•청소년의 종속적 위치와 위계, 차별 구조를 깨뜨릴 수 있는 요구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부양의무제로 인해 자립을 위한 사회적 조건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수많은 노인들과 장애인들, 기초생활보장 수급을 받는 저소득층 시민들의 요구와도 맞물릴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주민 정책과도 연결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들과 교차하는, 우리 자신의 요구이기도 하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우정과 애정, 사랑과 돌봄의 관계는 연인이거나 혈연, 혼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관계는 지속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며 일 대 일이 아닌 '일 대 다수', '다수 대 다수'의 관계일 수도 있다. 이성 간 또는 동성 간이라는 말들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관계들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로멘스가 넘치는 연인의 관계일 수도 있지만, 로멘스로 규정하기 어려운 동반자의 관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공동체들은 혈연 가족보다 더 진하고, 든든한 돌봄의 관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떠한 제도적인 관계 속에 있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모든 개인들은 스스로의 삶을 부양하고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Bell과 Binnie 역시 이성애 중심주의에서 배제되었던 '우정'이 재고되어야 하고, 개인과 개인 간의 낭만적인 사랑 대신 개인의 사회에 대한, 사회의 개인에 대한 돌봄의 윤리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평등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벽에서 간신히 틈새를 만들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든 이들의 삶에 대한 당연한 가치기준인 양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저 차별과 위계의 장벽을 함께 무너뜨리는 일이다. 

 

결혼할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성적 위계와 가족을 기반으로 전제되어 있는 임금제도와 복지혜택, 연금제도를 바꾸어 모든 개인들에게 기본적인 소득과 고용, 노동환경에서의 평등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자. 혼인 여부를 떠나 모든 개인들과 이 개인들이 구성한 자율적인 관계/가족/공동체들에게 안정적인 거주 공간을 보장하고, 의료적인 권리와 공적 돌봄/부양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자. 그럼으로써 학대나 폭력, 경제적 조건, 가족 관계에서의 단절, 장애, 이주, 개인의 독립적인 삶을 위한 선택 등 다양한 이유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온전히 스스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러한 요구를 통해 혼인이나 혈연 관계의 가족이 아니라 개인들을 중심으로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이 보장되고, 이 개인들이 구성하는 다양한 돌봄의 관계들이 사회적으로 지원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보다 다양한 관계와 실천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 속에서만이 동성결혼도 진정한 '선택'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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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2014 LGBT 인권포럼에서 발제했던 글을 웹진 성격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임텍스트로 돌아가기
  2. 부산일보, 송지연 기자, ‘아파트 투신 60대女 현장에서 숨져’, 2013.10.31텍스트로 돌아가기
  3. 건강사회를 위한 국민연대 홈페이지 발기문 중 일부 http://www.pshs.kr/page_gZCM53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