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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8에 대한 또 하나의 단상 - 보라와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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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꽃 산수유가 피기 전인 3월 초는 항상 춥다. 3월 8일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페미니즘학교>가 매년 개강하는 날이자, 세계여성의 날이다. 올해도 3.8 기념행사는 범여성계와 민주노총으로 나뉘어 다른 장소에서 열렸다. NGA 활동가들은 청계광장 한쪽에서 ‘조용히’ 진행된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의 출범을 겸한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이 집회 이 외에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여성계 행사는 “점프, 뛰어올라 희망을 찾자!”의 슬로건처럼 어떤 이슈도 내걸지 않은 요란한 축하 행사였다. 아하! 어린이날, 어버이날처럼 여성에게 감사하고 사랑을 보내자는 ‘명실상부한’ 여성의 날이 된 것일까?  “민주주의, 평등세상, 소통사회”가 찾아야 할 희망이라는데, “안녕보라 시민난장”의 보라는 정말로 안녕한가? 이 많은 여성들은 왜 여기에 모였을까? “왜 우리의 구호와 궐기는 정치적이라고 해석되지 않을 만큼 격렬하지도 날카롭지도 못한 것이 되었을까. 앞서 간 수많은 멋진 페미니스트들이 이뤄놓은 찬란한 성과들을 지금 나(를 포함한 우리)는 온전히 지켜내고 있지 못하다는 (한 활동가의) 자책1”에 동감을 표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뤄놓은 찬란한 성과들”을 왜 나(우리)는 지금 여기서 운동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가? 페미니즘은 ‘남성’으로 통칭되는 ‘중심’을 발견했고, 가부장제 이외의 여러 이름으로 이를 명명했고, 온갖 핍박과 고통, 서러움,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 왔다. 그래서 수천년을 지속해온 당연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남성중심성이라는 척도가 아닌 방식으로 세상을, 인간을, 관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나(우리)의 경험을 다시 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성은 남반구 출신, 흑인, 유색인 여성, 레즈비언 여성, 매춘여성, 트랜스젠더여성, 장애여성. 노인여성..열거하기도 쉽지않게 여성으로 통칭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여성내 차이라는 중차대한 문제(과제)에 봉착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이들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문제화는 데까지 나아갔다. 더 나가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범주 이 외에 (남성)중심에 대한 부정으로서 규정된 범주가 무수히 확장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흑인, 감정, 몸, 동물, 자연, 장애, 섹슈얼리티가 그것이다. 이러한 확장의 과정과 결과가 소위 발전이고 진보이며, 자본주의체제와 가부장체제라고 본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여성운동은 어느 순간 멈춘 듯하다. 다시 질문을 하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은 언제부터 갈라지면서 다른 길을 가게된 것일까? ‘최초의 소수자’인 여성은 왜 자신의 경험을 올곳이 문제화하지 못하고 있는가? 여성에게서 계급, 인종, 국적, 나이, 지역, 학력, 신체, 성적 지향, 젠더 지향 등의 범주들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위 범주들 각각에서 특권을 가진 여성이 남을까? 북반구 중상층의 백인 이성애자 기혼 성인 비장애.... 여성이 남는가?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은 이제까지 양성평등, 차별과 폭력철폐를 문제로 삼고 주로 주류화와 제도적 해결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 왔다. 문제는 청계광장에 모인 여성단체들만 보더라도 그들이 함께 싸우는 여성들은 ‘순수한’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이 이제는 유일한 소수자도 아니라는 점이다. 청소년, 이주자,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노인, 장애인. 유색인. 매춘인.....이제까지 운동으로 드러난 혹은 드러나고 있는 소수자들이다. 여성운동은 텅빈 여성에 갇쳐버린 건 아닌지. 보다 특별한 보다 순수한 여성(만)의 문제를 외치면서 현실의 여성문제를 볼 수 있는 체계적 인식과 운동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다른 소수자들의 고통을 함께 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우지 못했다. 오랫동안 오직 이성애적 젠더만을 외쳐대다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중심아닌 중심이 되버린 형국이 아닌지. 

 

페미니즘이 문제화한 범주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후의 식민지, 여성>의 문제의식은 <최후의 식민지, 동물>로 확대 혹은 이전되었다.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이 ‘남성’이라는 중심에 최초로 도전했고, 억압에 대한 이해와 운동의 틀을 확장해왔다고 한다면, 동물문제가 응당 페미니스트의 이슈가 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일 것이다.(캐럴 아담스) “어떤 집단이 동물 보다 더 억압받았으며, 더 오랫동안, 더 심한 방식으로 억압받았겠는가? 가장 힘없는 인간조차도 여전히 동물을 지배한다.” 오늘로부터 106년 전 3.8일,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선거권과 노동권, 생존권의 쟁취를 외치며 뉴욕광장에 모였던 날에 여성노동자들이 외쳤던 말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동물 대신 여성을 넣는다면 말이다. 

 

“남성은 괜찮지만 여성에게는 위험한 약이 있다, 미국정부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시판되던 신약 10개를 시장에서 퇴출했다. 그중 8개는 여성에게 부작용이 더 큰 것으로 판명된 약이다. .....과학자들은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실험 과정에서 조직이나 세포 대부분을 남성 세포를 대상으로 하거나 동물시험도 대부분 수컷을 사용하기 때문이라 추정하고 있다. 최근까지 의학이나 생명연구에서 젠더는 대체로 무시됐고 특히 동물실험에서는 암컷이 임신 등으로 다루기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수컷이 주로 쓰였다. 여성에게 부작용이 더 큰 신약이 개발되지 않게 하려면 의학이나 생명연구에서 젠더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 생명연구와 신약개발 연구는 질병에 따른 변수 외에도 세포의 종류, 동물의 성별을 고려한 젠더요소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젠더 요소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앞으로 의사에게 약을 처방받을 때 이 약이 수컷뿐만 아니라 암컷을 대상으로 실험한 약인지를 일일이 확인해야 할지도 모른다.”2

 

위의 한 여성과학기술인이 쓴 기고글을 읽고 복잡한 생각을 했다. 동물실험을 통해 하는 것이 생명연구라면 그 생명은 어떤 생명(만)을 말하는지? 위험한 약이라면 누구에게(만) ‘위험’한 것인지? 생명연구에서 고려해야 하는 젠더요소는 왜 당연 여성과 남성(만)을 지칭하는지? 동물은 암컷과 수컷의 성별을 가질 뿐인가? 필자는 여성의 안전을 위해 성인지적 연구와 실험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젠더 여성으로 국한한 주창(여성운동)은 끔직한 동물실험을 용인할 뿐 아니라 여성동물에게도 성인지적으로 실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인지적 의식 만큼이나 다른 존재와 그들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왜 발휘되지 못하는지 놀랍다. 남성, 여성이라는 범주,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특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여러 가부장적 장치들의 하부구조에 바로 동물이 있다. 폭력의 대상으로, 때론 오락과 위안의 대상으로, 때론 식욕의 대상으로서 남성동물, 여성동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인간 서비스에 쓰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젠더는 그냥 젠더가 아니라, 이성애중심성, 남성중심성, 인간중심성을 함축한 개념이며, 그러한 차별과 억압의 기제들이 얽혀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만일 여성운동이 ‘순수한’ 여성운동 혹은 이성애 중심의 젠더 운동에 계속 머문다면, 계급, 인종, 나이, 장애, 섹슈얼리티, 동성애, 국적 등 많은 차별들을 문제화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동물에 대한 폭력에 동참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충무로에 늘어선 애완견숍에서 판매용으로 진열된 강아지들, 이들을 베이커리의 쇼케이스에서 케익을 고르듯 구매하는 행태를 보면서, 흑인노예거래와 ‘여성거래’가 연상되지 않는가? 공장식 축산의 결과인 구제역이나 AI(조류 인플루엔자) 사태에 소위 전문가라는 의사들은 “국민 여러분! 오리고기, 닭고기 익혀드시면 안전합니다.”라고 홍보하는 형국에서, 페미니스트와 여성운동의 활동가들은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액션을 취할 것인가? 인간중심주의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불가피하다, 혹은 필요하다 아니면 자연스럽다”라고 항변할 수 있는가? 인간중심주의는 결국 남성중심주의이므로, 대남성중심주의 운동에 계속 매진하겠다고 일축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밀양이고, 용산이다”와 함께 “동물에 대해 우리 모두는 나찌이다”라는 엄중한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다. 

 

“우리는 여전히 분노해야 하고, 찬란함을 지켜가야 한다.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이 날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싸움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난새) 첫 꽃 산수유가 폈다. “참, 그만 모든 것 내던지고 싶은 이 만신창이 별에서 숲은 무슨 배짱인지 또 거뜬히 봄을 시작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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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새, “여성의 날 그리고 어떤 단상”(인권오름 제 384 호, 2014.3.13.) 텍스트로 돌아가기
  2. 이혜숙 “수컷 동물실험한 약, 여성에겐 독?“ (여성신문 2014.2.28)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