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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판의 진보꼰대마초를 털고싶다
: 어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넋두리
_탈탈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차별이 싫었다. 싫었던 이유는 내가 주로 차별을 받는 피해자 위치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남들과 다른 지향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종종 혐오와 경멸 속에서 차별을 받았었고 그게 싫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혹은 더 심하게) 차별을 당하고 혐오를 받고 있다는 게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을 차별 있는 세상에서 차별 없는 세상으로 바꿔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십대 초반에 모 운동진영에 불나방처럼 뛰어 들었었다. 내가 뛰어들었던 진영에는 먼저 뛰어든 ‘선배’들이 조금 있었고, 나는 나와 같은 운동을 해보려는 그들이 반가워서 그들이 모두 다 나와 같은 불나방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운동 진영에는 어리고 활동 경력이 짧아서 도움을 구하기 힘든 신입 활동가만 노려서 언어적, 비언어적 성폭력을 휘두르는 사마귀 같은 인간이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에게 어쩌다 잘 못 걸려 시달리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듯이 그 운동 진영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돈벌이를 위해 다른 운동 진영에 있는 모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요즘의 나는 그 시민사회단체도 진짜 맘에 안 들고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다.
이러는 내가 그냥 너무 유난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너무 예민해서, 혹은 내가 사회 부적응자라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편하고 진보적이고 인권적이라고 칭찬하는 단체에서 일하면서도, 나는 이게 뭐냐고 투덜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이 단체가 어느 정도 편하고 진보적이고 인권적인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활동가 채용에 나이나 성별, 학력 등을 따지지 않으며, 일할 때 생활 한복을 입든 추리닝을 입든 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근데 솔직히 나한테 이득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그게 다인 거 같다.
내가 지금 일하는 곳은 나와는 결이 많이 다른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처럼 나이어리고 결혼도 안 한 꼴페미 레즈 여자애는 단체 내 상근자건 회원이건 간에 없다는 말이다. 서로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 단체의 사람들과 소통해야 할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어려움을 느꼈고 지금도 계속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 단체의 몇 몇 이들은 나에게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주거나 어린데 열정이 없다고 타박을 하거나 아무튼 간에 동료보다는 후배나 막내로 잘 대해주고 있다. 이런 취급이 언제나 싫은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들과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는 씁쓸함은 항상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또 다른 몇몇 이들은 나와의 소통 자체를 그냥 어려워한다. 내가 너무 ‘쎈 페미’라서, ‘이십대’라서, ‘시집도 안간 아가씨’라서 대하기가 어려우시 단다. 아, 뭐, 예.
그리고 몇몇 이들은 나를 빡치게 한다. 젊은 시절엔 화염병을 던지며 부당한 군사 권력에 투쟁했다는 어떤 이는 나에게 “얘가 여기서 말할 군번은 아니지.”하고 꼰대 질을 했다. 자기를 애 낳는 며느리로만 보는 가부장제에 질려서 여성운동에 몸담았다는 어떤 이는 “너는 남편도 없고 애도 없으니 야근해도 되잖아?” 라고 얄밉게도 말했다. 두 부류 다, 자신들이 그렇게 혐오하여 맞서 싸워왔다 말하는 권력들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징그러웠다. 그 밖에 내가 자기 집 며느리면 싫을 것 같다는 둥, 내가 자기 딸의 롤모델이 될까 두렵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왜 나를 당신 네 집 며느리로, 자기 딸의 롤모델로 상상하는 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인간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너무 비좁은 나머지 혈연가족 중심 외에는 구성이 안 되어 있으면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해서 그냥 어이없어 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빡쳤던 날은 내가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을 때였다. 자기는 뭐 괜찮다며, “활동판은 동료 중에 그런 사람 있을 수도 있죠. 근데 제 가족이면 싫을 거 같아요.”라는 대답을 해준 ‘동료’에게 나는 너무 화가 나다 못해 슬퍼서 대꾸도 제대로 못했다. 그 사람은 나름대로 동성애자를 배려한다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동성애자 동료도 괜찮다고. 그렇지만 면전에서 그렇게 내가 내 가족이면 싫을 것 같다고 말할 필요까진 있었을까. 나는 그 ‘동료’덕분에 그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내내 우울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앞서 말한 깊은 빡침들보다도 더더욱 나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발언을 듣고 문제제기를 하면 나를 ‘피곤한 애’로 대하고 문제제기를 유야무야 하려 한다는 것이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니? 오늘 생리해?”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나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막말을 지껄이는 것은 사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이 모르면 잘못 말할 수도 있고, 아는 데도 어쩌다 보면 말실수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막말들과 말실수들을 좀 고쳐달라고 말했을 때 이따위로 대꾸한다면 그 단체는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그냥 단체에 대해 기대를 접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남들은 보람으로 일한다는 시민사회단체 일을 그냥 돈만 보고 일하고 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나의 ‘선배’들은 그래도 시민사회단체 일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었던 일들이 많았다고 했다. 경제가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에 운동권 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대기업에도 갈 수 있었지만 운동과 활동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다. 대학 시절 내내 한 게 운동권일 밖에 없어서 남들 다 하는 토익이니 학점관리니 하는 취직준비를 못했고 (근데 아마 했었어도 선택지는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나마 돈을 받고 ‘노동’할 수 있는 곳은 시민사회단체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배들이 나에게 왜 활동을 노동으로, 돈으로 보냐는 타박을 하면 속으로 웃을 수 밖 에 없다. 선택지가 있었던 당신들의 청춘과 선택지가 없어서 몰리듯이 여기로 온 나의 청춘이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나는 그들의 그런 시선을 애써 피한다.
어쩌면 나도 세월이 흐르면 끔찍하게도, 내가 그리도 혐오했던 진보꼰대마초 선배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부모에게 내리 맞거나 무시당하며 자라다가 애를 낳고 나니 지 부모랑 똑같은 짓을 하는 조금은 애처로운 멍청이들처럼 말이다. 그런 미래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막막한 현실과 소름 끼치는 미래 사이에서, 나는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소외감을 느꼈다. 한참을 혼자서 고민만 했었는데, 어쩌 다보니 술자리 등의 사적인 자리를 통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처럼 고생하고 외로워하는 활동판 막내들은 적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행히 ‘우리’가 되었고 함께 연대하기로 했다.
우리는 같이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아카이빙 하고 싶었다. 우리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누가 마초 적으로 굴었고 누가 성희롱 적 발언을 했고 누가 우리의 여러 가지 정체성들을 무시했는지, 기록하고 적어서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욕망으로 모여서 우리는 진보꼰대마초 털기 모임을 만들었다. 모여서 꼰대들의 발언들을 탈탈 털다 보니 주옥 같은 명언들이 많아서, 그런 명언들을 트위터 봇으로 돌리는 탈곡기 계정(@talgokgi2015)도 만들었다. 탈곡기 계정에서 나온 명언들 중 맛보기로 몇 개만 보여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짧은 머리를 한 여성 활동가에게) 이게 그런 건가? 명예남성 그런 거? 여자는 여자가 하는 운동이 있는 거야~ 머리도 기르고 좀 꾸미고 다녀’, ‘단체 모임 후 술자리에서 막차시간 전 귀가의사를 보이는 여성 활동가를 강제로 착석시키면서 "오빠가 택시비 줄게 와서 오빠 술 좀 따라줘~" "그래도 여자애가 따라주는 게 기분이 좋지~" 등등. 도대체 우리가 몇 십 년대에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까마득해지는 발언들이다. 오래 전 페미니스트들은 마초들이 하도 커피 타오라 물 떠오라고 해서 그 컵을 깨는 운동을 했다던데, 지금 2015년에도 그 컵 깨기 운동을 계속 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 한탄스럽다.
지금도 우리는 계속해서 설문조사를 통해 더 많은 망언들을 받아 탈곡기 데이터베이스에 추가하고 있는데 끝이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솔직히 이런 활동을 통해 이런 진보마초꼰대를 없애고자 하는 욕심은 없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치고 무슨 난장판을 벌여도 그들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런 걸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 같다. 나는 그냥 나의 활동이 하나의 경고나 충고로만이라도 남기를 바란다. 이 활동판이라는, 나름 깨끗하다 소리 듣는 바닥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남들과 다른 지향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차별적인 발언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발언을 하면 나 같은 까다롭고 예민한 꼴페미에게 조용히 털릴 수도 있다는 것, 뭐 그런 하나의 경고나 충고로서의 역할만이라도 수행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만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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