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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을 통해 만난 혐오의 모습_ '우리'와 '그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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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무지개 농성을 통해 만난 혐오의 모습

- ‘우리’와 ‘그들’에 대하여

 

 

_수수

퀴어 호보 (QUEER HOBO)/탈-시간 활동가/ 독립 이야기꾼

 

 

지난 2014년 12월 ‘역사적인 날들’ 이라 불려 지고자 하는, 그 ‘공적’ 공간 속에 몰려들 사람들,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밤낮 농성장을 지키던 상당수의 몸들은,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요즘 시대 ‘혐오’라는 것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성소수자’라는 고상한 이름이 있기 전, 혹은 그 이름에 맞는 ‘자격’을 갖추기 버거운 시간 속에 있었거나, 혹은 있거나.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유토피아’적인 명사에 자기를 꿰어 맞추느라 끝도 시작도 없는 길 위를 서성거리는 삶. 그런 정체성 중력으로부터 자유 하고자 하는 별들.
세상이 뻔뻔하게 ‘포샵질’해 놓은, ‘인간’이라는 몸 규격, 그 2차원 좌표에서 아주 멀리 위치하여 살고 있는 정상 통계치 바깥의 몸. 형태 뿐 아니라, 몸이 순환하는 길, 방법, 속도가 ‘고유한’ 경로를 그리는 사람. ‘혜성’들과. 인간을 재생산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동물’로 살며, 조금은 더 ‘인간다운 삶’을 그려 나가려하는 미생물의 천국. 집합체.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공간에서 만난 혐오는, 누군가가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죽여 버리고 싶다’라고 대놓고 소리치며 물리력을 행사하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하면, 기억되어지는 ‘서울시청’ 풍경 속에서... 이른바 ‘우리’가 돼서 그 속에서 나또한 우리에게 들으라고  “똥구멍으로 그 짓 하는 게 지금 잘하는 짓이냐!”를 외쳐댔던 입들 중 하나는 장애인이었다. 군대에 갔다가 성폭력을 당하여서 ‘이 지경이 되었다!’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고함을 쳐대는 몸이 있었다. 그가 뱉어낸 말들, 저주와도 같은 폭력의 진동 때문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그가 혐오하는 것은 그가 가리키는 ‘동성애’를 하는 인간들일까, 아니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일까. 또 그가 분노에 끓어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수치스러운 듯 내 뱉은 그 경험 속에서 진정 참을 수 없는 것은 지금에 와서 되돌릴 수 없는, ‘비정상’적인 몸과 자신의 사회적 처지가 아닐까? 그가 말하고 있는 자신의 역사는 ‘거짓’일 수 있지만 그 수치, 분노는 올곧게 (적어도 내게) 가슴을 쳤다. 어쩌면 온갖 혐오들 속에서 모진 목숨을 끌어 안고 살아내야 했던 스스로를 투영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말하려고 하는 것이 ‘혐오세력’ 중 한 사람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혐오했고 또 혐오하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 아니 그 보다는 불완전하라고, 비정상이라고 내 몰고 있는 동시대적 조건 속에 내몰린 ‘비슷한’ 동물로써 느끼는 연대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몸과 내 몸이 처한 정치적 위치는 혐오세력 vs 반 혐오세력으로 거칠게 나뉘어 있지만 말이다. 서울 시청에서 어색하고 적대적으로 만난 ‘그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겁박하는 것에 화가 났고 공포를 느꼈으나,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들도 나처럼 (우리 처럼이라는 표현은 차마 쓰지 못하겠다.) 스스로를 조롱하고 어떤 수치스런 기억을 새기고 있는 몸을 참을 수 없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그는 ‘우리’로써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지목하면서 그 익숙한 분노 -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정상범주를 떠받치면서 - 안에서 안주하고 쾌락의 학대에 몰입하며 참을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리라. ‘우리’로 묶인 이들은 어찌되었든 표방한다. ‘사랑이 혐오보다 강하다’고. ‘우리’가 처한 동시대적 조건인 혐오를 함께 깨보자고, 우리 스스로를 자유하게 만들어 보자고 말이다.  아름다운 수식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지금 살고 있는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정치적 윤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곳에 살고 있으니까.  각자가 모두 자신만의 ‘우리(cage)',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진흙탕에서 절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삶의 방식으로 이 지옥에서 해방될 것인가. 서울 시청에서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라고 외치는 이들은 ‘혐오’에 대하여 스스로 삶을 지켜낸 가지각색 - 정말 무지개 빛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투쟁의 기술, 역사를 통하여 혐오세력에게 ‘제안’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스스로를 해방하라고, 자유, 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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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몸들 속에 누적되어 있는 누적된 혐오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서울 시청은 파고 일렁이는 바다와 같았다. 내가 스스로를 지목하며 혐오했던 순간들 뿐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지목하며 ‘나는 네가 아니다’라고 극렬히 저항했던 순간들 또한, ‘혐오세력’들의 입을 통하여 ‘역사화’ 된다, 나는 그들이 꺼내 놓은 혐오감만큼 그 만큼은 합법적으로 소리칠 권리를 얻었다, 너희들이 틀렸다라고. ‘우리’로 뭉친 누군가들과 함께 ‘혐오세력’들을 향하여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인간의 말을 소리치곤 했다.


 
요즈음. 역사적 순간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살펴보는 요즈음.  
많은 인간들은 ‘지금’ 스스로를 참을 수 없어한다.
성소수자로써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굳이 토설하는 이면을 보자.
‘우리’는 자긍심을 소유할 조건에 처해있지 않다.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만 애써 자긍심을 딛고서 ‘사회’로 나아갈 때, 잠깐이지만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유보하거나 자제할 수 있을 뿐. 지난 기억 속 비겁하고 스스로를 원망했던 순간들은, ‘자긍심’을 갖춘 지금에서 볼 때야만 비정상적인 어려움, 이겨낸 역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사라지고 모래와 같이 흩어진 삶들에게 닥치는 것은 또다시 거짓말, 기만, 자기위로 일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이런 삶 같지 않은 삶. 배제와 고립, 차별들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득한 일상 바꾸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법’이나 ‘제도’라는 힘을 ‘선결적’으로 끌어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가? 그 매듭을 풀면 ‘우리’는 조금은 나아질 것인가?

 

‘인권은 목숨이다’

 

나는 오래되고, 변치 않은 혐오들을 보아왔다. 몸을 ‘판다’고 하면서 손가락질 당하는 몸들에 대한 혐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감각체계에 살지 못하는 것을 기이하다 생각다 못해 두려워하여 가두고, 멸절하는 그 많은 혐오의 ‘역사’들은 어쩐 일인지 없어지지 않고 지속된다. 

 

이 생각의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여성 혐오 같은 것은 여전하지만, 어떤 ‘여성’으로 배치된 몸은 그 낙인 바깥에 있다. 낙인 안에 존재하는 이들은 ‘이전’ 혐오 대상으로 ‘기능’했던 역할을 더욱 강하게 요구받는 식이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대상이 되어도 마땅한 몸들은 ‘이전’보다 더 가차 없는 혐오-낙인 대상이 되곤 한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관련한 특별법들은 끊임없이 개정되고 수정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기꺼이 이 ‘피해자’ - 혹은 ‘생존자’의 목록 속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법이 실행력이 없거나, 가해자가 복수를 하거나, 누군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럽고’ 지울 수 없는 일을 겪은 몸으로 알게 되거나. 이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일들은 의사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증상이 나오면 즉각적으로 메스를 들고, 떼어낸다. 법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서 법을 작동하는 행위자들을 교육하고, 가해자 복수를 막도록 가중처벌 조항들을 덧붙이고, 피해자-생존자들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세세한 지침들을 마련한다. 

 

그런데 ‘여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상황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또 법 앞에 서게 된다. 일상 풍경이 변한 것은, 없다. 다만 어디 먼 세계에 있을 것 같은 힘 있는 몸들이 ‘여자’라는 간판을 달고 대통령이 되거나, 고위관리가 되거나, 경찰 집행력이 되어서, ‘여자’라는 알리바이를 달고서, 밀양에 살고 있는 나이든 ‘여성농민들’- 할매를 들어내고, 제주 강정마을을 군대가 주둔하는 관광지역 - 이와 유사한 형태를 예전에는 사람들이 기지촌이라고 불렀는데 - 으로 만들자는 것에 별다른 서글픔을 느끼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는 언어 권력과 제도 권력에 빌붙어 부상한,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몸들을 피상적으로 가리키는 언어, 그릇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몸들이 부상하게 된 경로가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성’이 이끄는 사회는 다르다. 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아직’이지만 어떤 몸들에게는 ‘벌써’가 되었고, 또 어떤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위선적인, 힘의 말이다. 이런 감각, 역사적인 ‘동시대적’ 감각들을 낙후한 것으로만 놓아 둔 채, 아직도 ‘후진국’에 머물고 있는 한국 여성인권순위를 들이미는 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낙후하여 과거 속으로 사라져야 할 ‘피해자’ 혹은 ‘생존자’로써 살아온 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오로지 ‘후진적인’ 역사를 대표하는 무엇으로만 전형화되는 것. ‘우리’는 이런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분석들에 꽤 익숙하다. 이런 전형화들을 생산하는 감각들 말이다. 가끔 혐오는 이 안에서도 씨를 심는다. 내가 다루어졌던 방식대로 다른 존재들도 다루게 되는 습. 낙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라고 성마른 분노를 가진 존재들에게, 섬세하게 살펴보고 시간을 들여 더 쳐다볼 필요 없는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를 다룰 수 있게 한다. 효율과 목적 지향적인 꽤나 현대적인 삶에 익숙한 ‘우리’들은, 이런 존재와의 관계가 편하다는 걸 안다. 정해진 시간적 배치 속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연적인 변화들을 최대한 배제하는 효율.  낙인과 전형화는 ‘인간’이라고 지목되지 못하는 모든 대상에게 윤리적 고통 없이 행해진다.

 

여기에서 만만한 여성들이나 다른 약자에게 푼다는 게 말이 되냐, 라고 따져 물을 수는 있겠다. - ‘혐오세력이 하는 짓은 말이 안 된다, 이성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효한 시점, 그 말이 사회적 문제제기로 ‘힘’을 가지기 전까지는 유의미한 질문은 아니지만.  기어이 ‘우리’가 되어 하루 바삐 사회적으로 쟁취하려는 ‘힘’이 있다면, 이성과 합리라는 것이 영화 편집처럼 임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이성이나 합리라는 것이 특히나 ‘전문가’를 자처하는 힘들이, 사회적 인과를 임의적으로 조작하는 기술을 일컫는 말로 ‘오염’ 되어 있으므로 - 오히려 ‘혐오’라는 것 안에 넣어서 불법화하고 사회적으로 억제 해야 할 ‘범죄’ 행위들의 목록이 무엇인가를 재빠르게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언어를 가지고 법이 가지는 상징권력 속에서 놀 수 있는 이들에게 맡겨도 충분한...일이다. 

 

그러나 내게 온 삶의 이야기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지금 내게 온 ‘혐오’라는 언어 속에서 풀어낼 수 있는 어떤 존재들의 경험일 뿐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어떤 사회와 불합리한? 관계 속에 있다고 느끼는 거의 모든 존재들에게 혐오는, 무척 매력적이다. 어떤 존재에게 힘을 가할 때, 그 존재를 해석할 때, 망설이거나 주춤거리는 시간, 그런 사회적이고 관계적 노동을 들일 필요가 없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새로운 것들, 힘들의 부상, 어떻게 관계하고 감당하고 지속해야 할지 모르는 '사회적‘인 것들, 복잡한 힘들 속에서 ’혼자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들은 어떻게 대응하게 될까? 선례가 없고 익숙한 사물들조차 없는 그런 텅 비어 있는 사회적 공간 속에 벌겨 벗겨진 듯 내쳐진 몸들은 어떻게 ’자신이 여기 있음‘을 내세우고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물리적 세계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그에 상응하는 반응과 관계들을 확인하지 못할 때, 어떤 존재든지 불안에 떨게 된다. 그 적절한 사회적 방식을 배치하는, 능동적이고 자율적 실천의 가이드라인이 법인가, 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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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지는 무엇에게 힘을 주게 될까?
혐오를 금지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당장의 피해-목숨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돌아오는 ‘혐오’는 멈추어질 수 있겠다, 잠시라도.
그렇지만 ‘성소수자’인 우리 안에도 이 몸이 있었듯이, 성폭력 생존자로써, 더러운 ‘년’으로써 ‘병’을 가진 누구로써도 ‘우리’가 되는 삶에서, ‘혐오’는 어떤 누군가 또 다른 ‘우리’를 지목하고 불러낼 것이다. 정의로운 싸움은 ‘혐오’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동시대적 시간 감각, 공감각을 사는 몸들이 자율적이고 해방적 관계들을 구성할 자유, 공간을 구축하는 싸움이 현재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낀다.

 

서울시청 그 길지 않았지만 깊은 밤과 낮들 속에서 만난 몸들은 ‘동성애’자일 뿐만 아니라 ‘장애인’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비성인(청소년으로)’으로, 또 ‘비/반 인간(여성)’ 으로 혹은 건강치 않은 몸을 가졌다거나 정신병자, 전염병자, 빈곤계급 으로 임의로 분류된 존재들이었다. ‘우리’로 묶여 있었으나 권력이 깊게 새겨놓은 낙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또 그럴 수 없는 존재들 말이다. 그들 이야기는 내 속에 내재한 혐오를 일깨워주었고 드러내주었다. 상호적일 뿐 아니라 집단적인 ‘점거’ 속에서 ‘우리’는 점점 혐오를 깨가는 관계적이면서 생활세계 차원에서의 투쟁을 함께 일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사랑’. 자유과 해방에 대한 믿음들이 만개한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은 그래서 사람들 삶에 끊임없이 되살아오는 역사가 되었다. 아마 이 ‘이야기’ - 투쟁, 혹은 역사? -를 접한 이들에게도 그렇게 전해지길 바란다. 스스로에 대한 증오를 거두고 승리를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울시청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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