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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좌담] 대학 페미니즘, 이제 부스터가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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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정리 / 나영, 이규리 (웹진 <글로컬포인트> 편집위원)

좌담 /

이규리 (대학생 페미니스트)

이소연 (경희대학교 여성주의 웹진 <순>)

한우리 (페미니스트 연구자, 번역가)

김보명 (페미니스트 연구자, 여성학 강사)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선언 이후 폭발적으로 이어진 페미니즘 물결을 타고 온라인 밖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공간은 바로 대학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관심과 공백 속에서 힘들게 버텨야 했던 대학 내 자치단위, 여성주의 교지 등이 2015년 이후 크게 활력을 얻었고, 새로운 페미니즘 소모임이나 학회 등이 새순 돋아나는 것 마냥 곳곳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대학의 여성학 강좌도 수강생 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부흥만큼 고난도 컸다. 중앙대학교에서는 여성주의 교지 <녹지> 수십 권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가 하면,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데이트 폭력과 강간문화 등에 대해 쓴 대자보가 찢겼 다. 온라인상의 공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하나 욕설은 물론이고 ‘보지를 찢어버리겠다’는 등의 심각한 협박성의 글과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가장 심각한 사례는 고려대학교 지리교육학과 여성주의 소모임 ‘난파’의 사례이다. 2016년 11월, 순수하고 예쁜, 상냥한 이미지로만 재현되는 여성상을 벗어나 여성의 성해방을 지향하겠다는 취지로 ‘난교파티’ 혹은 ‘어지러운 물결’이라는 중의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난파’는 불과 3일 만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난파 구성원들은 소모임 이름이 ‘성적 혐오감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페이스북을 비롯한 온라인에서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난파’ 구성원들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벌어진 댓글 논쟁에서 인신공격성으로 치닫는 상황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학과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학우들을 향한 인신공격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 결국 사과문을 올리고 페이지를 폐쇄하게 되었다. 심지어 페이지를 폐쇄한 후에는 같은 이유로 양성평등센터에 제소까지 당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구성원들은 학과 교수에게 불려가 면담을 하고 부모님까지 모시고 와야 했다. 한 달 후 열린 학과의 임시학생총회에서는 ‘난파’ 구성원에 대한 징계 안건이 상정되었고, 학과장이 대표를 맡은 ‘난파비상대책위원회’까지 구성되었다. ‘난파’ 소모임원인 지리교육과 학생회장은 학과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생회장 자격을 정지당했으며, 이듬 해인 올해 3월에는 다른 학생들과 분리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야외지리조사’ 과목 참석을 금지당했다.

‘난파’ 구성원들이 겪은 일련의 사례는 ‘소녀들에게는 왕자가 필요없다’ 티셔츠로 인해 촉발된 김자연 성우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페미니스트로서의 발언과 행동이 집단적인 관심을 받고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사회가 기대하는 규범을 벗어나 자율성을 지닌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위한 낙인과 통제, 사회적 처벌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촉발되는 남성연대는 보수와 진보, 교수와 학생, 연령이나 직업 등을 가리지 않고 빠르고 강력하게 전개된다. 처음에는 대학이나 작은 커뮤니티, 심지어 개인 SNS에서 시작된 일이라 하더라도 한 번 불이 붙으면 빠른 속도로 낙인과 공격이 퍼지고, 신상털이와 인신공격, 실질적인 협박과 처벌이 자행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형태의 전방위 공격이 기대하는 가장 큰 효과는 확연히 드러나는 공격과 처벌의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감히’ 같은 행보를 보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과장과 조교가 앞장서서 나서고 학생총회까지 동원한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의 사례는 페미니즘을 낙인 찍고 통제하기 위한 대표적인 최악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토록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여론의 반응이 더디고 실질적인 대응이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난파’ 사태는 자치권 탄압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명백한 학습권 침해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토록 대응이 어려웠을까. 이는 어쩌면 단지 대학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대학사회의 위상과 사회적 관계, 영향력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대학 페미니스트 운동의 경우 오히려 대학 밖 여성운동과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고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면 현재의 대학 페미니스트 운동은 그 관계가 단절되어 있거나 공백이 생겨버린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페미니스트 운동과 대학 밖의 페미니스트 운동은 어떻게 만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우리는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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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이야기 나눈 사람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이규리, 이소연, 김보명, 한우리)

 

2015년 이후, 확연한 변화

 

먼저, 최근의 대학사회의 변화를 직접 경험한 소연과 규리는 2015년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확연하게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12학번인 소연과 14학번인 규리 모두 2015년 이전에는 대부분 딱히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고 페미니즘에 아예 무관심하거나 ‘페미니즘이 왜 필요하냐’는 분위기였다면 2015년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달라졌고, 그만큼 공격도 심해진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SNS를 비롯한 온라인에서의 활동과 오프라인의 삶이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점을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소연 : 나는 12년에 대학 입학했다. 그 때만 해도 페미니즘이 불필요하다고 얘기되던 시기였다. 당시 ‘리얼퍼플’이라는 퀴어 소모임에서 같이 세미나를 하면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있었는데 동기들이 이 책 뭐냐고 물어봐서 책 내용을 얘기해주니 “뭐 이렇게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친구들은 서울 내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들이라면 가정이나 학교에서 그렇게 심한 차별을 겪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 그렇게까지 극성이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2015년, 메갈리아-강남역 사건 발생 이후로는 경희대 안에서만 해도 여행이라는 페미니즘 학교, ‘흰’ 이라는 여성주의 세미나 등 새로운 여성주의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고 <순> 웹진도 2015년에 처음 생겼다. 이 1, 2년 사이에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리얼퍼플’도 신입회원이 없어서 유지가 안 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사람들이 꾸준히 들어온다. 메갈리아 이후에는 입트페(<입이 트이는 페미니즘>)가 나오고,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여성혐오를 실질적으로 느꼈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이슈 중에 하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활동을 하고 이것이 일상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온라인에서의 활동과 이로 인해 받는 공격이 오프라인의 실제 삶으로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대나무숲에서 활동을 하는데 내가 댓글을 달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공격을 당하니까 실제 현실에서 위축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명지대 다니는 지인이 댓글로 키배(키보드 배틀)를 뜨다가, 누가 거기 대댓글에 다른 사람 태그해서 “너네 학교 너네 과인데 얘 아냐,”고 물어보고 모른다고 하니까 “과 후배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온오프라인 분리가 안 되고, 사람들이 개인으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온라인 공격이 정말 심각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영 :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여성들이 딱히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강남역 사건을 통해 차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온라인에서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공격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연결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소연 : 오티 때 남자 선배들이 예쁜 여자 후배랑 술 먹고 이런 거 문제제기 안 하다가 메갈리아가 그거 여혐인데? 문제있는데? 하니까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우리 학과 안에 댄스 동아리는 군대에 간 남자 동기를 위해서 그 부대에 위문공연을 갔다. 심지어 한 남자 동기는 그 위문공연을 가느라 학교를 못 오니까 공결처리를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교수는 그걸 거절했는데, 정말 당연하게 그걸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여성들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있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있고 불균등했다.

 

한편 규리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정작 실질적인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던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모여서 ‘한남충 패는’ 얘기는 많이 했지만 활동 경험이 없어서 의사결정을 하거나 일을 집행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규리의 이야기는 새롭게 합류하게 된 이들의 경우 페미니즘을 자신의 현실과 연결시켜 보게 되었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활동으로 만들어내기는 어려웠던 현실, 다른 한편으로는 먼저 활동하던 선배들도 그간의 공백 속에서 새롭게 모인 역량을 실질적인 활동으로 조직해 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현실을 보여준다. 또한 활동과 조직 운영에 대한 인식이나 감각의 차이도 보인다.

 

규리 : 나는 14학번인데 운동권 친구들과 친해서 농활 가기 전에 교양 하는 것처럼, 그런 ‘교양’으로 여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가 엄마에게 불합리한 면이 있어서 자생적으로 ‘나는 페미니스트야’, ‘왜 엄마한테만 그런 걸 요구해’ 하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는 잘 적응을 못했다. 나와 친했던 운동권 친구들 중에 우리 학교 사람이 거의 없었고. 운동권 언니들이 “이대에서는 꼭 여성학 수업 들어봐” 해서 기대를 가지고 수강신청 하고, 조 짜고 토론을 하는데 같은 조 언니들이랑 하는 얘기가 재미없었다. 이 언니들은 수강신청 실패해서 여성학 교양을 들어오는 사람들이고 (다들 폭소) 페미니즘 자체에 별 열의가 없었다.

또 학교 밖 사람들은 “이대는 그런 학풍이 있으니까 잘 배울 수 있을거야” 했는데 내가 안에서 느끼기로는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는... 그러다가 여성위원회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2015년 초, 겨울방학 세미나 끝나고 가입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사람들은 08학번, 09, 11 학번 정도였고 1, 2학년은 없었다. 선배들(선배라는 말을 안에서 쓰진 않았지만, 이미 여위에 있었던 사람들)도 졸업 후를 걱정하며 14학번이 한명 들어와서 참 다행이다 이랬던 분위기.

이대 안에서도 여성위원회 멤버는 거의 한 자릿수였다. 달력 사업들이 밀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고, 인력이 부족했다. 중간에 계보가 끊겼으니까,

3월에 신입회원 모집을 하는데 메갈리아 이전에는 사람이 막 많이 오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이 없으니까 상시모집을 했고 초기에는 두세 명 정도 들어왔는데 메갈리아 웨이브를 타면서 사람들이 막 가입문의가 오기 시작했다. 근데 이제 일을 해야 하니까 회의 시간을 잡아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맞지를 않아서 회의를 잡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거다, 이 사람들은 여성주의가 좋아서 들어온 거고, 여성위원회(를 비롯한 자치단위)에서 어떤 사업을 하는지와 이 사업을 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꽤 많이) 들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학기 초에 나와야 하는 책자가 중간고사 끝나고 나오는 상황들이 발생했고 모여서 한남충 패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정작 일은 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다른 학교의 상황을 알아보니까, 퀴어모임 같은 경우에는 활동비를 걷으면서 준회원과 정회원을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바쁜 사람들은 준회원으로, 더 헌신적인 사람들은 정회원으로. 그렇게 그룹을 나누자는 제안을 했었는데 그 제안은 반응이 좋지 않았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인데 왜 그렇게 나눠서 하느냐, 일하는 사람들만 너무 중시하는 거 아니냐 그런 반감들이 있었고. 권위주의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래서 2학기를 내내 그 문제로 싸우면서 보냈다.

기획안 회의를 할 때도 모든 것이 ‘여성혐오’로만 설명되는. 항상 내가 살면서 겪은 어떤 남자의 기분 나쁜 눈빛, 이런 것들이 모두 여성혐오다, 이런 아이디어들이 중심이었다. 문화제 주제도 여성혐오. 나는 더 정치적이고 빨갛고 더 왼쪽인 것들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걸로도 싸우게 되고, 여성학 수업 때도 그런 분위기여서 나이 드신 교수님이 도대체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왜 그렇게 이슈가 되나요? 이런 질문을 역으로 하기도 했다.

어쨌든 메갈리아 이후 분위기가 바뀐 지금은 여성학 수강신청은 항상 사람이 미어터지고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열의도 매우 크다. 이대는 원래 페미니스트 전통이 있으니까 이 분위기를 타서 더더욱 활성화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여성위원회는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면접을 보고 뽑는 등, 지금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들었다.

제 문제의식을 정리하자면 뭐가 될까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소연: 와 진짜요?) 회칙을 만들자는 요구가 ‘왜 그렇게 권위적인 체제를 세우려고 하느냐’는 말로 토론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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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과 대학사회의 변화, 페미니즘 운동 맥락의 공백 사이에서 힘겨웠던 2000년대

 

소연과 규리의 이야기에 03학번인 한우리는 오히려 ‘어떠한 반응도 없어서 힘들었던’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한우리의 이야기는 2015년 이전 대학 페미니스트 모임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분투했는지, 그 사이의 공백과 아쉬움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고, 이 이야기는 다시 현재 규리나 소연이 겪고 있는 활동의 지속성에 관한 문제들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규리와 소연은 취업 준비로 활동이 일찍 끊기는 상황,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싶어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의 목록조차 만들기가 어렵고 선배들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 대해 토로했다.

 

우리 : 내가 활동할 때와는 다르게 확실히 새로운 면이 있는 것 같다. 나는 03학번이고 중앙대에서 여성주의교지 <녹지>를 1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녹지에 언제나 사람이 없는 사람 가뭄 사태였다. 나는 99, 00학번 언니들이랑 대화하면서 페미니즘 배우고 안티미스코리아 대회 가고, 쌓여있는 잡지 <이프>를 읽고 그랬는데 새로운 사람들이 없는 상태로 지속되었다. 교지를 내면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안하는 거다. 영화제를 하든 축제를 하든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무관심이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그 이슈에 관심이 많고 활동도 많지 않나. 테러나 공격을 당한다는 게 오히려 부럽기도 하다. 심지어 녹지가 버려지고, ‘참페미’가 대자보 테러당하고 그런 게 너무 부러울 정도로. 차라리 그런 일이라도 있었다면 진짜 재밌었을 텐데.

그러니까... 그런 주제들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도 있었고, 이는 우리가 언제나 소수로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하고 싶으면 해. 니들이 내 눈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뭐 계속 떠들어라.”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거슬리니까 사람들이 더 반응하는 거고.

그런 면에서 나는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여혐이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한마디씩 하고 대화 주제로 나올 수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좋아진 거 아닌가. 물론 일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이고 뭔가 만들어진다는 게 긍정적이라고 본다.

이전에는 항상 사람이 없었고 09, 10학번 당시가 최악이었다. 재단이 바뀌면서 재단을 비판하는 글을 썼더니 학교 본부에서 교지편집위원회를 아예 없애려고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매체부를 아예 돈을 안주고 자치적으로 하라고 했고, 교지대금을 납부하게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실상 등록금 인상이고 교지가 없어지게 될 것 같아서 막 시위하고 했는데 잘 안 되었다. 그래도 다들 내야하는 것인 줄 알고 교지대 납부를 해서 예산은 마련이 되었다. 이후 독립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 하고 싶은 말 다 하자 하면서 <중앙문화>는 좀 이슈가 됐는데 <녹지>는 잘 안 됐다. 그 사이 점거도 하고 일련의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는데 녹지에 있었던 후배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진 것이다. 두 명밖에 없으니까. 결국 2010년 즈음에는 할 사람 없으니까 녹지를 없애자고 한 적도 있었다. 근데 이 교지가 1967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여학생부가 내는 국내 최초의 여성주의 교지로 역사가 있는 것이다 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후배들이랑 90년대 학번 선배들까지 다 모여서 회의를 했다. 막상 없애자니 지금까지 나온 책들, 자료들 다 어떻게 할 것이며... 사비를 털어서라도 디지털화를 하자는 말까지 나왔는데 선배들도 할 말이 없었던거다. 후배들이 지쳤다는데 더 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결국 그냥 헤어지고, 그나마 있던 둘은 나갔다. 나는 이대로 없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이후 강의실마다 들어가면서 녹지를 소개하고 모집을 했다. 그렇게 다섯 명 정도가 모여서 여름동안 세미나를 하고 가을에 책을 냈다. 그렇게 한 다음에는 재생산이 되더라, 그거 읽고 왔다는 사람들도 있고.

우리에게 적은 무관심과 학교 본부였다. 그런 문제들에 맞서 싸우려고 했을 때 약간의 연대가 있기는 했지만 페미니즘 자체가 이슈인 적은 없어서 항상 외롭게 활동을 했고, 그런 게 지금이랑 다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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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모임의 지속가능성, 어떻게 가능할까

 

소연 : 지금도 페미니즘 단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 보통은 1, 2, 3학년으로 구성되는데 4학년 되면 증발하니까. 여성은 취업시장 약자라는 거 다 아니까 2, 3학년 때부터 학내 모든 단체에서 활동 안하고 취업 준비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까 지속가능성이 문제가 된다. 중간에 맥이 끊어지는. 처음에 리얼퍼플 하다가 그만둔 이유도, 2학년인데도 불안해서. 내가 이런 거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나가니까 같이 했던 두 명도 힘을 잃어서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취업이라는 엄청 거대한 벽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 : <녹지>도 하면서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고 나가고 하니까 결국 책 세 권을 만들 때까지 해야 된다는 규약이 어느 샌가 생겼다. 책 세 권 만드는 거 1년 반이다. 그러다보니 세미나가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계속 새로운 사람들 위주로 돌아가니까 얕아지고.

 

소연 : 1년 반이라는 활동기간이 생긴 이유가... 저학년 때 들어오고 1년 반이면 고학년 되니까. 취업준비 해야 하는 시즌에 맞춰서 나가는거다, 그래서 지속가능이 어렵고. 지금 웨진 <순>도 대학원생 분이 같이 봐 주시는데 그 분이 수료를 앞두고 있다. 그 분이 취업하거나 다른 데로 가면 이제 세미나 커리큘럼 같은 거 어떻게 해야 되나. 어떻게 운영하나 걱정이다.

개인적으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같은 단체들이 책 목록을 공유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세미나 하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될지, 어떤 논문이 좋은지 어떤 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모른다. 기존의 선생님들이 본 책들을 볼 수 있다면 훨씬 지속가능한 모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규리 : 제가 여위 하면서 느꼈던 것도 선배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위 역시도 처음 만들어졌던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를 거쳐 오면서 중간에 계보가 끊기다시피 했고, 재생산이 정말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다.

나는 학생회비 예산을 받는 자치단위 ‘조직’으로서 여위에 대한 생각이 컸기 때문에 생활공동체나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여위를 생각하는 구성원들과 마찰이 있었다. 나중에 이 마찰이 정말 심해졌을 때는, 분명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했는지 남아있는 자료가 없나? 연락해볼 선배가 없나? 여위 방을 막 뒤지면 97년, 99년 이럴 때 엠티 가서 찍은 사진들은 나오는데 연락처도 없고 뭐 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배는 “조이여울 씨가 1대 회장이었대” 이렇게 전설처럼 알고 있는 정도였다. 여성학과에 연락을 해보면 알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여성학과에 대뜸 연락을 하기도 좀 어렵고. 어디 가서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그 많던 여위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지?

 

소연, 규리,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98학번 보명은 이들의 경험과는 확연히 다른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단절된 지점을 짚어갔다. 그러나 보명은 활동의 지속가능성이나 재생산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었던 문제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만 당시에는 페미니즘 단위들 뿐 아니라 학생운동과 사회 전반의 외부 자원이 존재했기에 역량이 쌓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야기했다. 서로 논쟁이나 연대를 할 조직들,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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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 : 일단 전체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여성운동이라고 하는 게, 미국도 그렇고 다른 나라들도 그렇고 한국도 지금 운동의 역사가 쌓여가는 중이라고 본다. 우리가 자기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기, 자기가 가장 열렬하게 활동했던 기간이 1년일 수도 3년일 수도 있고 길게 지속적으로 갈 수도 있지만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때도 페미니즘이 없다가 새로 생겼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에 여학생 운동이 있었다. 다만 우리는 여학생 운동과 우리를 차별화했다, “민중민주 담론과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여성운동이다” 하면서. 정확히 ‘여성주의자’들로서 등장한 집단이 있었던 것이다. 이 집단이 주로 ‘이프’나 ‘또하나의문화’ 같은 소위 문화주의 운동 단체들이었고.

아무튼. 내가 활동하던 당시는 소위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 좌파 여성 활동가들이 있었고, NL 계열의 동아리에도 있었다. 나도 NL 동아리 통해서 여성문제를 접했고. (일동 : 오~~놀라운 과거!) 거기에 ‘여성문제연구회’라고 있었다. 주로 기지촌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나중에는 이렇게 학생회나 NL, PD 같은 학생운동 조직들을 통하지 않고 그냥 여성학회들이 많이 생겼다. 한 96년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연세대가 가장 먼저 생기고 그다음 이대... 90년대 중반이 되면 그런 독자적인 모임들이 많이 생겼고, 녹지나 석순 같은 소식지들, 글쓰기 사업들을 통해서도 많이 나왔다.

그러면서 좌파나 NL 선배들이랑 우리도 쟁점이 생겼던 것 같다. 지금 말하는 ‘스까페미’ 비슷한 거다. 다른 사안들과 연대할거냐 여성주의만 할거냐. 우리도 한참 논쟁했고. 나는 NL 동아리로 시작을 하다가 여성주의로 넘어간 케이스이다. 기지촌 활동도 반미 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되었었는데, 우리가 관악여성모임연대 생기면서 그 사안을 가져가서 여성주의 사업으로 바꾸었다. 그런 사례들 많았다. 기존의 활동들을 여성주의 활동으로 가져간 사례들. 특히 농활이 굉장히 중요한 재생산 기제거든. 10박 11일 동안 모여서 개고생하고 토론하고 서로 냄새 맡으면서 추억 만들고 나면 소속감이 굉장히 커지니까. 기지촌 활동도 그런 성격이 있었다. 그걸 통해서 성매매 관련 세미나, 섹슈얼리티문제 얘기 많이 했고.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좋은 시절이었다. 여성주의가 성장하던 시기, 뭘 하든 호응은 받는 시기, 물론 반발이 있지만 정당성이 있던 시기. 그리고 이 정당성은 반성폭력 운동을 하면서 확장되었다. 그전에 했던 다른 문화운동들은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부르조아 페미니스트다, 반정치적이다, 개인이 소비하는 정치다 이런 비판들을 다 받았고 여성성을 미화한다느니 하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에 비해 반성폭력 운동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학칙제정운동은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99년, 2000년 이후로 많이 했고. 학칙으로 방향을 잡은 게 서울대의 경우는 98-99년 경이었는데 반성폭력 학칙 제정운동은 다른 학교들에서도 굉장히 많이 했던 사업이다. ‘여성연대테이블’이라고 있어서 반성폭력 학칙제정 운동을 서울지역 뿐 아니라 지방까지 포괄해서 거의 전국 차원에서 했고, 대학 단위로만 치면 서울만 따져도 열 몇 개 대학에 달했다. 여러 대학들이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들도 어느 정도는 과거의 반성폭력 운동에서부터 싸우던 지점에서 이어지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아무튼 대중과 가장 접촉 많이 했던 지점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2차 가해’나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개념들, 전략들 원칙들이 논쟁이 되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노동운동, 문화운동 다양하게 많이 했다. 군 가산점제 문제로 이메일에 협박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왔고... 그 때 우리는 다 이름 내걸고 했다. 단체 이름이든 개인 이름이든. 성폭력 사건을 공개해도 대리인 이름은 나갔다. 다들 아는 거다. 이 사람은 페미니스트라는 걸. 성폭력 사건 몇 개 대리해서 처리했고 이런 것들 다 알고. 물론 댓글 다는 사람들은 익명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익명성을 갖겠다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물론 닉네임을 쓰긴 했지만 그건 프락치 문제나 다른 이유들 때문이었고, 재미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연대한판’ 같은 행사가 있어서 여름마다 2박 3일 정도 같이 토론하고 모이는 자리도 있었고, ‘살 맛 나는 세상’이라고 노동연대 테이블도 있었다. 정치적 결이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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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은 당시 대학 페미니즘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국적 연대 행사까지 하면서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80년대 이후 쌓인 민중문화, 학생운동의 ‘공동체’라는 자원과 외부 자원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짚었다. 처음부터 페미니즘 단위들이 독자적으로 모든 자원을 만들어내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명은, 이제 과거와는 달라진 지형에서 다른 자원들을 활용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좋은 시절이었지만 운동을 더 하고 싶은 사람과 나의 문화적 욕구, 공부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그래서 재생산 문제나 갈등은 항상 있었다. 다만, 이 사이클이 빨라지는 경향은 있는 것 같다. 우리 때는 아직 호황기라서 좀 미룰 수 있었는데 지금은 더 빨라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때 자원은 솔직히 얘기하면 80년 이후 대학의 하위문화로 쌓인 민중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의 ‘공동체’라는 자원. 상상의 공동체든 남성들 공동체든 명목상으로 상상할 수 있고 필요하면 꺼내들 수 있는. 공동체니까 당신이 나서서 사과해야지, 공동체의 상처 이런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공동체가 뭘까? 공동체 없었나봐 이런 이야기도 했지만... 그 자원에 기대서 운동할 수 있었는데, 그 말은 페미니즘이 모든 자원을 만들어내서 활동할 수 있던 게 아니라는 거다.

이제 다른 자원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여성학 수업 뿐 아니라, 대중문화에서 페미니즘을 다루지 않나. 미디어나 텀블벅이나... 물론 그런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넓게 본다면, 몇 명 살려서 동아리 살린다고 그래봤자 몇 년이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순수한 페미니즘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들이 갖던 생각들이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자원과 맞물리며 등장하는 게 페미니즘이다.

 

변화한 자원과 기반들

 

보명의 이야기를 받으며 한우리는 90년대와 2000년대의 활동들이 수많은 역량과 노력을 기울여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이후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들이 어느 새 ‘당연한 것’으로만 남아 정치적 의미가 탈각된 현실, 심지어 악용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연은 한우리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이야기했다. 반면 규리는, 이대의 경우 남녀공학인 다른 대학들과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학생운동이 쇠락하면서 페미니즘이 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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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 보명 쌤이 활동할 때는 반성폭력 학칙을 제정하거나 상담소를 만들거나.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해결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만들었던 것이지 않나. 90년대 분들이 그걸 해주셨다면 2000년대 사람들은 그걸 이어갔던 것 같다. 내가 활동했을 때 기억나는 것은 중앙대에는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강의평가를 해야 하는데, 2005년 총여학생회가 강의평가에 성평등 질문을 넣는 것을 공약으로 걸었고 학우 2천 명의 서명을 받아서 실제로 해냈다. “강의 중 성차별적 느낌을 받은 적 있습니까?” 이런 식의 질문이 들어간 거다. 이게 강사 임용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생각은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거다. 2006년에는 생리공결제를 도입했고. 생리공결제가 뭔지 모르니까 홍보하고, 도입안 설계하고. 공청회 만들어서 같이 토론하고 시범운영 해서 지금까지도 잘 운영되고 있다. 이제 생리공결제는 중앙대학교에서 당연한 것이 되었다.

중요한 건 이것을 도입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는 거다. 총여학생회랑 얼마 안 되는 단위들이 힘을 합쳐서 했고...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들이 되어버리고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난파의 경우 소모임 구성원들이 양성평등센터에 오히려 가해자로 고발이 되었지 않나. 남성이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학과 명예를 실추했다는 둥. 그러니까 운동의 방식이 달라졌고, 다른 방식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된 거 같다. 우리는 제도를 만들고 센터를 만들고 했는데 이제 누군가는 그걸 오히려 악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소연 : 지금은 선배들이 만든 그 제도들이 왜 필요한지를 우리가 또 설명해야 되는 시기인 것 같다. 생리공결제가 왜 필요한지에서부터. 어휴. 2000년대 초반 생리공결제 만들어진 맥락이 여성이 ‘다른 몸’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이게 노동하는 몸과 또 그와는 다르게 여겨지는 몸의 맥락 등 여러 주제로 뻗어나갈 수 있었는데 그 맥이 끊겼고, 학생운동도 맥이 끊겼다. 예전에는 사회주의 공부하다가 페미니즘으로 넘어오고 그러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다. 그러다 보니까 생리공결제도에 대한 백래쉬는 “그거 특혜 아니니? 그걸로 수업 빠지잖아”하는 식의 반응으로 돌아오고. 이에 대해 총여학생회가 어떻게 대응했냐면 화장실에 스티커 붙이는 거다. “생리공결 제대로 쓴 거 칭찬해.” 이런 식으로. 나는 생리하는 날에만 생리휴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리 전에 아플 수도 있고 몸마다 다 다른데, 이제 어떤 교수는 심지어 생리공결 안 받아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규리 : 이대는 아예 없어요.)

 

나영 : 왜, 어떤 변화들이 있었길래 이렇게 맥이 끊기게 된 것일까? 실제로 학생운동이 갖던 예전의 자원, 조직력이나 운동문화의 자원들이 어쨌든 한총련 해체되고 등등의 상황으로 인해서 위축되기도 했고, 대학 자체가 학부제나 산학협동 등으로 달라지면서 대학생의 사회적 위치와 성격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소연 : 대학이 신자유주의화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운동하는 곳이라고 아무도 생각 안 한다. 2012년도에 처음 입학하면서 농활 가는데 선배가 농활 가면 빨갱이 되니까 가지 말라는 걸 꿀팁으로 알려주고.

 

규리 : 이대는 인문대 학생회가 단과대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때 단과대 회비만 내고 총학생회비는 내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거 가져가서 자기들 ‘운동’하는 데 쓴다고. 우리(단과대)는 학생복지로 다 쓰는데.

 

소연 : 그리고 중운위(중앙운영위원)들이 대학을 어떻게 더 학원처럼 효율화할까 이런 말을 한다.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학생들한테 강의실 빌려주겠다는 학생회가 당선되고, 총여학생회는 안 되고. ‘이제 성차별은 없고 평등이 찾아왔다’ 이런 믿음이 있었다. 비율 자체가 남녀가 학과 안에서 비율이 동등해지고, 여성들이 성적도 훨씬 잘 받고. 대학 안에서는. 여성들이 겪는 유리천장 같은 거 다 모르고. 취업 시장만 나가도 고추달린 게 스펙인데 대학 안에서는 안보이면서 여학생 휴게실이 필요하냐, 생리공결 왜 필요하냐 같은 얘기가 나왔다. 예전에는 취업이 이렇게 안 되지 않았으니까 ‘하루쯤 안 나온다고 그게 뭐’ 했지만, 근데 지금은 출석으로 점수 갈리니까 특혜가 된 것이다. 절대평가로 안하고 상대평가로 점수매기는 대학 본부에 따져야 되는데 괜히 여학생회를 공격하고. 내가 입학했을 때 그게 심했다. 우리 이미 양성평등인데? 이런 담론이, IMF 이후에 남자들의 피해의식 강화됐나? 그 전은 잘 모르지만 지금 남자들 피해의식 쩔지 않나. “나 군대 가서 이렇게 힘들었는데~” 이런 얘기 하면서 “성차별은 아버지 세대 얘긴데 왜 우리한테 그러냐”는 식의. 그러면서 각종 페미니즘 단체들도 정당성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규리 : 저는 일단 소연 씨가 말씀하신 거 많이 동의하지만, 여대와 공학의 차이도 있는 것 같고 이대랑 경희대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운동의 자원 이야기를 하자면, 이대는 운동의 맥이 끊긴 학교는 아니었고, 고대만큼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있었다. 학부제 때문에 망했다고 하기에도 좀 그런 것이 2000년에도 이미 계열모집이었고. 계열모집 때문에 운동권 농사가 망했다는 주장도 안 맞는다는 생각이 있다. 2006년에도 고공농성하고 그런 거 보면 운동이 망하지는 않았고. 지금도 계속 소수의 운동권들이 조직되어서 있기는 하다. 모래알 같고 선후배 관계 없다 이렇게 얘기하기엔 작년 본관점거 때 그 눈물 나는 끈끈함은 설명이 안 된다. 운동권이 망해서 여성운동 망한 거라고 말하면 원래 이대 여위는 운동권이랑 별로 안 친했다고 알고 있다. 내가 대학 와서 알고 지낸 운동권들은 딱, 여성문제 중요하지만 페미니즘은 좀... 이런 입장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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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만 남은 과거와 새롭게 찾아가야 할 운동의 방식들

 

그렇다면, 지금 대학 페미니즘 운동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어려움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소연과 규리는 페미니즘 모임의 활동들이 구체적인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공감했다.

 

소연 : 과거에 만들어낸 제도들은 내가 입학할 때까지 새로 뭘 만들거나 안착시키는 걸로 이어지지 않고 이미 만들어낸 제도들의 정당성을 계속 말해야 되는 구조가 문제인 것 같다.

학생운동이 약화된 것은, 학생들이 운동을 내 취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학회, 이런 데는 관심 없다는 현실이 된 것이고. 그런데 2015년 이후에 페미니즘은 크게 대중화 되었고, 그 전에도 대학 내에 페미니즘 운동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여러 학교, 학과 공동주최로 반성폭력 세미나를 하기도 하고 이런 움직임들은 있다. 그런데 이걸 모두 함께 해결해야 된다, 이걸 인식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규리 : 나는 그 운동으로서 이어지지 않는 상황, 그거 때문에 안에서 싸우고 나온 사람인데. 우리 쌤이 중앙대에서 강의평가에 성평등 질문지 넣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걸 이대 변날(이화여대 레즈비언 인권운동 모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에서도 하고 여위에서도 했다. 변날의 경우에는 강사가 호모포빅 발언 하는 것을 제보해주면 그 내용을 변날 계정으로 강사한테 항의메일을 보내거나 대자보를 붙이는 등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다양성 하이HIGH: 모두가 존중받는 강의실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활동이 있었다). 여위에서도 이런 사업을 하자고 기획회의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강의평가 요소로 포함시키는 활동을 해보자, 이런 얘기는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학생회 같은 조직이었다면 제도화하자는 논의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감각이 있어야 하지 않나.

 

소연 : 저도. 계속 교수나 강사 성폭력 이런 얘기 나왔는데 이걸 학칙으로 만들자 이런 생각은 전혀 못했다. 웹진에 글이나 썼지 이걸 진짜 해결할 생각은 못한 거다.

 

규리 : 세미나 커리큘럼을 짜면 봄, 여름, 가을 커리큘럼으로 나눠서 입문-응용-심화를 하고 겨울에 문화제 하자는 계획을 잡는다. 그래서 나는 신입회원을 봄에만 받자고 했었다. 계속 새로 받으면 계속 입문세미나만 해야 되니까. 그래서 회원 수가 많지 않더라도 어차피 둑이 터졌으니 앞으로 꾸준히 찾아올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세미나에서 입문부터 심화까지 학습하고, 세미나를 통해 새로 알게 된 것, 더 알고 싶은 것들을 문화제에서 일관성이 있는 결과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여위는 성매매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어떤 사안에 대한 공동의 입장을 세우고 활동의 지도를 그리고 싶었던 거다. 이건 ‘조직’의 문제의식을 만들어내고 이 문제의식 하에서 어떤 움직임(movement)을 만들지 토론하는 과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갖춘 여성주의 ‘조직’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지점을 토론하기가 어려웠다. ‘규리 생각도 중요하지만, 성차별에 반대하고 여성주의에 동의해서 가입하고 싶다면 막을 수 없다’는 식의 이견이 주로 제기되었다. 한 사람의 여자가 살아남는 게 바로 정치라는 말은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는 논쟁이 되기 어렵지 않나.

 

한편, 한우리와 보명은 이전에 진행되었던 운동의 맥락들이 왜곡되거나 문제의식과 자료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지적했다.

 

우리 :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운동이란 단어가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 지금 학교에서 뭔가 페미니즘을 가지고 조직하고 학교를 바꾸려고 한다면 그게 꼭 기존의 운동방식이나 선배들이 했던 방식하고 똑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선배들의 자원을 받아서 지금의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운동이라는 게 항상 변화하는 거니까,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게 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더 고민되는 것은 예전 운동의 결과물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데, 그게 고대 ‘난파’ 사태처럼 남성들에게 이상하게 역이용 되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보명 : 그 경우는 제도 자체라기보다는 정확히 성희롱 개념의 문제이다. 그 개념이, 대학 안에서의 운동 문제도 있지만 남녀차별문제구제법의 하위법이기 때문에, 그 법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법의 정의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고. 거기에 ‘피해자 중심주의’ 등 우리가 추가적으로 넣은 개념들이 있는데, 그 정의(definition) 자체에 도전하진 못했다.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것들은 맥락을 더 자세히 얘기해봐야 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인데, 그 당시에 새로운 개념들이 혼재하면서 학칙이 된 것이 이후 운영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가 되었다.

 

우리 : 최근에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토론회에 갔었는데, 그때 왜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얘기될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의 맥락을 얘기하고, 맥락이 삭제된 지금을 얘기하면서 이게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쓰이는 건지 의미와 맥락을 잘 모르면서 운동을 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문제라고 느꼈다. 과거의 선배들이 쌓아온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역사를 알 자리가 없다. 나는 그래서 영 페미니스트 분들이 말을 더 해주셨으면 좋겠다. 전설처럼 그랬다더라, 연대에서 뭐 했다더라 이런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자료 찾는 거 진짜 어렵다. 아까 규리가 이야기했던, 과거 운동 자료들을 아카이브 하는 작업을 했다는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개인한테 찾아가서 자료 볼 수 있는지 물어보니까 트렁크에, 여행 가방에 이만큼 쌓여 있더란다. 개인이 다 갖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갖다 둘 곳도 없고. 너무 안타깝지 않나. 그 분들이 다 살아계시고 활동을 하고 있는데 너무 안타깝다. 좀 더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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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페미니즘, 모순 속에서 길찾기

 

마지막으로, 지금 대학 페미니즘이 직면하고 있는 공격과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변화들이 필요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연은 운동으로서의 재생산과 여성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식의 투 트랙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이야기했고, 대학간 연대와 선배들과의 연결 필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한편, 보명은 ‘너무 급하게 생각하고 페미니스트 전위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전했다. 당장 무엇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대신, 천천히 우리가 가진 자원과 상황들을 잘 이용하면서 새로운 기반을 만들어 가자고.

 

소연 : 논의의 지점이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교/강사의 성희롱 질문지 이런 거 제도화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대학이 학원화되고 취직이 여대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는데 페미니즘이 변화해야 하는 부분은, 이 여대생이 취업하고 취직한 뒤에 겪는 문제들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되나, 이런 걸 더 얘기 많이 해야 되는 것 같다. 성폭력을 겪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사회를 바꾸는 운동보다 내 생존을 자잘하게 도와줄 수 있는 페미니즘 운동, 이런 걸 원하는 사람들은 내가 앞으로 겪을 불안들이 더 중요한 문제이다.

투 트랙으로 가야 한다. 대학 운동으로서 재생산과 여성의 개별적 삶에 대한 차원으로. 페페미(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트페미(트위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의 특징인 꿘혐(운동권 혐오)은 가치판단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운동권이 학생들 삶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운동권 무능해, 부패해 이런 생각을 막연하게 가지면서 비롯되는 것이다. 운동권 페미랑 학계 페미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지 않나. 지식자본을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

 

우리 : 재생산 해야 하는 운동이든 생존 직결 운동이든, 나눌 거 없이 대학이 다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안전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나. 대학이 그걸 못하니까 문제다.

 

소연 : 대학 안에서 취업과 상관없는 운동 하는 게 어렵다. 제도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른다는 거다. 정말 관심 없고... 취업이 제일 중요하니까.

 

보명 : 당장 뭘 해야 한다고 규범적으로 얘기하기보다는. 지금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이 집중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류의 자기계발, 자기계발하면서 페미니스트적인 것을 찾고 있다. 지금 20대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당하고 손해 보지 않는 사람, 남의 도움이나 제도의 도움 얻지 않고도 자기 힘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래서 꿘페미도 싫고 현학충도 싫은 거다. 내 언어가 힘을 갖고 싶은데 힘이 안 가져지니까 답답하지. 어떻게 힘을 만들지 모르겠고, ‘나는 권리가 있다’는 식의 권리의식은 높은데. 설득하기도 싫고. 한편으로는 이 자기계발 플로우를 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대중성을 갖는 운동으로써.

또 하나는, 폭력, 피해자 키워드가 있다. 한쪽에서는 내가 되게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다른 한편은 나는 피해자다, 피해자가 되지 않을 권리가 있으나 잠재적 피해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힘이 없고 힘을 갖고 싶은데 힘을 어떻게 만들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진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움직임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자원이 많다고 생각한다. 너무 낙관적인지 모르겠지만, 대중문화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고. 사실 우리가 했던 운동에서도 문제는 많았다. 반성폭력 운동 한다고 했을 때 대학에서 어떻게 성폭력을 하느냐는 식의 엘리트 의식이나 운동권 도덕주의 같은 것도 있었고. 서명운동 받으면 이 중에 천 표는 그런 사람들이 써줬겠구나 하지만 써먹자 했다. 실용적으로. 순수한 페미니즘 그런 거 없다. 내가 페미니스트 전위가 되어야 겠다 생각하고 아마조네스가 되거나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하게 되는데 다 자기모순이 있다. 천천히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급하게 뭔가 남겨야 되고 그런 거 바라지 않고 잘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소연 : 저는... 제도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에서 생리공결제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서 같이 공부했었는데, 여성의 몸이 어떻게 다르고 노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되돌아보는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고, 반성폭력 운동이 공동체적으로 조직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펭귄프로젝트’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저는 90년대 여성연대한판 같은 것처럼 대학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대체가 있고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대학에서 벌어지는 페미니즘 백래쉬에 대해서 다른 학교에서도 연대, 지지 하고 그걸 기록으로도 남겼으면 하고. 가능하면 학교 안에서 증발한 선배님들이 찾아와서 역사를 소개시켜주거나, 또 지금 뭐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다같이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있으면 좋겠다.

대학사회 문제는 대학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계발하는 여성들을 위해서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내 권리 얘기해주고, 한편으로 구조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는 운동도 함께 가야한다.

 

규리 : 저는 여위에 있을 때도 남들도 다 활동가였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저는 솔직히 ‘진짜 페미니즘’ 논쟁을 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보명 쌤이 정반대 얘기를 하셔서 약간 민망하지만.

 

보명 : 논쟁은 할 수 있다. 논쟁의 과정 속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방향들이 있었던 것이고, 다만, 당시에는 그게 다 정답만은 아니고 돌아보면 계속 부딪히면서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게 있다는 거다. 나는 이 판에 있으니까 얘기를 하는 것인데. 저처럼 나중에 10년 뒤에, 지은 죄가 있어서 나왔습니다 하면서 아 옛날엔 이런 말을 했구나 돌아보기도 하고. (다들 웃음)

 

좌담회는 거의 4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끝내 사이다 같은 명쾌한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에겐 ‘연결’이 필요하다는 것. 과거와 현재, 대학의 안과 밖, 운동과 개인의 현실 사이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학 페미니즘 모임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은 현재 새롭게 등장한 온/오프라인의 페미니스트 모임과 개인 페미니스트들이 전반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보명이 짚었듯, 과거에도 페미니즘 운동은 갑자기 독자적인 자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달라진 환경과 기반, 자원들 속에서 지금 존재하는 자원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연결하면서, 과거의 맥락들을 다시 짚고 전환하면서 새로운 역량으로 이어나갈 수 있기를. 그런 용기와 자원을 대학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연결하고 함께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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