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독 모든 분들이 건승하시길
갑자기 옛 생각이...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야간반이 있었다. 학교가 공고이다보니 특히 야간반에는 직장에서 기술교육을 위해 보낸 학생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은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와 기술을 익혔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어느날인가, 지도부실에 모여 앉아 양아치들마냥 탱자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우리보다 연배가 훨씬 들어보이는 몇몇이 들어왔다. 뭐야, 이거? 그러고 있는데, 앞장선 사람이 "나 야간부 학생회장인데, 여기 학생회장 있나?" 이렇게 물었다.
뭔일이지? 주간부 학생회장이 있었는지 있었는지 어쩐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이들이 찾아온 이유는 주간부 학생들이 야간부 학생들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폭행사건인데다가 그것도 주간 야간 간 벌어진 일이라 심히 골치아픈 건이 되고 말았다.
야간부 학생회장의 요구는, 폭행한 당사자들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는 돌려보내고, 폭행한 당사자들을 찾아냈다. 3학년들이었는데, 뭐 어차피 다들 아는 넘들이고, 그래서 아니 이 쉑들아, 하필 때릴 넘이 없어서 야간반을 패냐? 그랬더니 하는 말이, 야간반인지는 몰랐고, 2학년 학년장을 달고 있는 넘들이 앞에서 깝죽거리길래 선배한테 개기는 거 같아서 팼다는 거다. 당연히 지들이 잘못한 게 없으니 사과는 개뿔이라고 박박 우기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만해도 워낙 인권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모르던 시기고, 어린 마음에 객기가 충천할 때다보니 뭐 이까이꺼 별것도 아닌데 걍 내비둘까, 이런 생각도 했더랬다. 하지만 야간부 학생회장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없으면 야간부 학생들도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보니 괜히 나중에 시끄럽게 할 게 아니라 끝낼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나았기에, 아무튼 다 까는 소리 그만하고, 일단 만나서 화해를 하든 아니면 그냥 거기서 한 쪽이 작살나게 붙든 하자고 했다. 지도부 입장이 중재가 되든 심판이 되든 그건 또 상황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찌어찌 해서 일단 당사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가해자인 주간반 친구놈들은 수틀리면 이번엔 진짜 다 머리통을 깨니 어쩌니 하면서 주댕이가 댓발은 나와가지고 뒷산 끌려는 복날 개같은 표정으로 따라왔더랬다. 그리하여 딱 봤는데, 뭐 그 다음에는 중재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기냥 이 친구놈들이 "아이구, 형님들, 그 땐 죄송했습니다. 진작 이야기하시죠. 저희들은 주간 후배들인줄 알고..."하고 알아서 팍 기어버리는 거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했더니, 사건이 일어나던 때는 오밤중이었는데, 늦게까지 실습하고 나가던 이놈들이 밤에 맞닥뜨린 야간 학생들을 어슴프레한 상황에서 학년장만 보고 후배라고 팬 건데, 대낮에 얼굴을 봤더니 형님도 한참 형님들 뻘인지라 대번에 잘못했습니다 소리가 나왔던 거. 그것도 그거지만, 함께 온 야간부 학생회장 형님이, "야간부 다니는 학생들은 낮에 공장다니면서도 더 배우고 싶어서 학교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많이 힘들다. 일하랴 공부하랴 두 가지 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니 주간 학생들이 야간 학생들을 좀 더 배려해주기 바란다."라고 간곡히 이야기하는 통에 그냥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갑자기 몇 십년 전 일이 생각난 건, 요즘 방송대학교 출석강의를 하는데, 아무래도 수강생들이 직장인 등 생활인인지라 낮에 수업을 할 수 없어 저녁시간 이후에 수업을 하다보니 주경야독하는 수강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옛 생각이 난 거다. 낮에 일하고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강의를 듣는데 얼마나 피곤할 것이며, 내일 또 일을 나가야할 텐데 쉴 시간이 줄어드니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도 열심히 듣고 필기하고 질문하고 그런다.
천성이 게으른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분들이고, 강건한 심지를 가진 분들이며, 모험정신에 가득찬 분들이기에 이렇게 할 수 있을 거다. 존경스럽다. 주경야독 하시는 모든 분들에 건강하고 건승하시길 바란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보람이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