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자성인가 변명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진보진영의 브레인이라고 하면 장석준을 꼽겠다. 같이 일한 경험으로 보더라도 그는 빼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특히 논점의 정리와 배치에 강점이 있다. 이런 사람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만 할 수 있게 보장했다면 얼마나 훌륭한 성과가 나왔을지 궁금하다.
그래서인지, 그가 프레시안과 한 대담은 뭐랄까, 답답하다고나 할까, 자기 발목을 스스로 잡고 있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있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이다.
프레시안: "진보빈영, 기성 문법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글쎄, 그러한 포획의 과정에 장석준 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보정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앞으로 명확한 노선 계획이다. ... 그런데 그런 고민은 없고 개방형 경선제와 같은 이벤트성 이야기만 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장석준의 진단은 지난 2015년 노동당 탈당과 정의당 합당 과정에서 보여준 장석준 들의 모습이 아니었는가?
"심 의원 지역구인 고양시는 잘 닦여진 곳이다. 그곳에 심 대표 대신 젊고 참신한 새 후보를 출마시킨 뒤 당선하도록 하는 사례를 만들면 어떨까?" 이 질문은 2014년 동작 재보궐 때에도 필요했다. 김종철이 닦아놓은 그 곳에 노회찬이 후보로 꽂힐 게 아니라, 진보의 승리를 위해 과감하게 노회찬이 김종철의 선대본부장이 되겠노라 선언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당시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진 않지만,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정의당 쪽에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후보였던 김종철마저도 합당파였음에 더 말할 것도 없겠다만, 요컨대 당시에도 합당을 추진하고 있던 사람들은 가치와 전망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오로지 세력화에 대한 열망,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물적 기반확보의 유불리가 정치활동의 이유였다.
그 때 장석준의 입장은 달랐지만 이후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하게 되었고, 이론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바로 저들 합당파들의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한편으로는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많이 화가 나 있는 그런 일이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현재 정의당의 주류에도 편입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의당의 판 안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장석준 류등이야말로 "기성 문법에 포로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지금에 와서 민주적사회주의 등을 운운하고 있지만, 정잘 하는 짓을 보면 기껏해야 양경규 비례의원 만들기에다가 포스트 심체제를 인천연합과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 정도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아까운 건 그렇다 치고, 나는 장석준의 이번 대담이 여전히 개운칠 않다. 그 스스로 "철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과연 그 성찰의 끝이 판을 깨는 데까지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미 "기성 문법에 포로가 되어" 버린 이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깰 수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기대를 접다보니 희망이 여유로워지는지 모르겠다.
난 이번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정의당이 10석 안팎의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정치적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고 본다. 정의당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진보진영의 희소식이라기보다는 몰가치적 입장에서 모든 정치세력에게 골고루 기회가 더 많이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변희재가 당을 만들어도 원내입성이 가능해진 상황이라는 거다.
길이 좀 더 넓어지면 온갖 생물체들이 의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질 거고, 그러면 또 더 왼쪽의 물건들이 그 안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커지게 될 거다. 그정도면 되었다. "기성문법에 포로가 되어" 버린 사람들의 "철저한 성찰"을 기대하지 말고 그들을 비판한 자들이 직접 그 물로 뛰어들어 판을 갈 일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뭐 한 150년 후엔 가능하지 않겠나.
물론 그 전에, 인류가 절멸함으로써 우주에 기여하기를 바라기는 한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