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라산 - 1

지구 온난화 문제가 심각하다. 기후위기로 인해 매일매일을 노심초사하는 동지들도 있다. 이들에겐 매우 미안하지만, 난 이들의 노심초사와는 별개로 그냥 인간은 절멸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아니면 과거 음쩜셋이 주장했듯, 다 때려 치고 그냥 화성이나 가든가. 그러고보니 이 블로그 서브네임이 음쩜셋을 기다린다는 건데 이 작자는 죽었나 살았나 도통 소식을 알 수가 없네... 암튼 그렇고.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달리 따뜻한 겨울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지구 온난화와 날씨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지청구 듣기 딱 좋다. 물 건너 트럼프가 이 둘을 구분 못하는 뚝배기를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 통에 무슨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무튼 올 겨울 유난히 따뜻하다. 매서운 추위를 아직은 겪지 못했다. 아직 1월 중순이고 2월 늦추위도 때때로 기절할 정도로 올 때가 있으니 마음 놓긴 이르다만.

날도 따뜻한 어느 날, 새해가 밝은 기념으루다가 짝꿍과 제주도로 갔다. 애초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다 오는 것.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푹 쉬기 위해선 일단 몸을 한 번 녹초로 만들어놔야 한다는 앞뒤 없는 인과관계가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결정했다. 코스는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로 내려오는 것. 아마 한라산 등반 코스 중에 가장 긴 코스가 아닐까 싶다.

총 연장 약 20km에 가까운 길이다. 안내에 따르면 성판악 코스는 편도 9.6km, 관음사 코스는 편도 8.7km라고 한다. 버스 정류장이나 주차장 인근에서부터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거리 등을 포함하면 만만찮은 길인데다가 산길인지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산 앞에 섰다. 그런데 웬걸, 날이 이렇게 따뜻해서야...

제주에 들어가기 하루 전까지 제주는 무진장 따뜻했단다. 영상 23도를 훌쩍 넘는 날씨에 사람들이 반팔로 돌아다녔다고. 그런데 바로 다음날, 우리가 들어간 바로 그날 날씨가 급변해서 온통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제법 불었단다. 그래서일까, 숙소에 도착했더니 데스크에 계시는 분이 오늘 한라산 등반이 금지되었고,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이야길 한다. 아이야...

그나마 먼 길 달려왔는데, 한라산 할망께서 길을 열어 주십사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리를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설치는 증상은 여지없이 나타났고, 결국 비몽사몽 잠깐 쪽잠 자듯 잠을 자고 일어났다. 다행히도 한라산 할망께서 길을 막지 않으셨단다. 등반길에 올랐다. 셔틀을 타고 성판악 주차장까지 이동. 이것도 꽤 먼 길이어서 그 덕분에 모자란 잠을 셔틀버스 안에서 꾸벅 졸음으로 보충했다.

주차장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본격적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오전 08시 18분. 처음 계획보다는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한라산은 타임 리미트가 있어서 제한 시간 안에 지정된 장소를 지나지 않으면 바로 하산해야 한다. 성판악에서는 진달래밭을 12시에 지나야만 한다. 정상에서는 오후 1시 30분부터는 바로 하산이고. 게다가 관음사에서 우리를 실어 나를 셔틀은 4시 30분이면 떠나버린다. 그러니 발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날은 따뜻했고 길은 질척했다. 마지막으로 겨울산에 오른지가 물경 20년은 넘었기에 적잖게 걱정을 했다만, 이건 너무 지나치게 장비를 차린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땀이 흠뻑 배어 나왔다. 스패츠를 한 덕에 목 짧은 등산화에 물이 들진 않았지만, 살얼음 낀 돌에 미끌어지기도 여러번이고 진흙이 등산화에 제법 묻어나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다가 속밭 대피소 아랫자락쯤 들어설 때부터 드문 드문 잔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만 속밭샘을 지나면서 나무마다 상고대가 조금씩 달려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상고대는 점점 더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고, 속밭샘과 사라오름 중간쯤부터는 본격적인 상고대가 시작되었다. 그래, 이걸 보러 온 거였는데, 이걸 보게 되다니, 꿈 같다. 산신 할망의 영험함에 재삼 새삼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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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많은 섬이라지만 오늘따라 바람 한 점이 없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서 얼핏 을씨년할 듯 한데도 오히려 바람 하나 없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게 확연히 보인다.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다. 사진 한 장을 찍어도 부담이 없다. 바람이 없으니 피사체가 흔들리질 않는다. 있는 그대로 다 찍어 가라는 듯 가만히 서있다. 움직이는 건 까마귀밖에 없을 지경이다. 제주에, 그것도 한라산에 이렇게 바람이 없을 줄이야.

어차피 인생이란 게 다 바람 흘러가는 자락인데, 난 그걸 애써 피하거나 잡거나 하면서 살아왔던 듯하다. 그러다가 바람 잘 날이 있는 거고, 오히려 이렇게 바람 없는 어느 날이 어쩐지 어색하고 신기하게 보이게 되는 거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하긴 뭐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그게 어디냐. 이렇게 철딱서니 채워 가며 살아가는 거지.

한라산 올랐던 일도 두어번 나눠서 정리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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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11:05 2020/01/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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