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 시작해보자...

에밀리오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좀 길어질 듯 하다.

문제제기 정도로 시작해보자. 틈이 나면 계속 이어봐야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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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친구와 밤을 새워가며 격렬하게 토론했던 적이 있다. 소위 이야기하는 '사투(思鬪)'였다. 그 날은 외국으로 갔던 그 친구와 거의 10년 만에 만난 날이었다. 그 친구와는 거의 20년지기였고, 서로 죽이 맞아 고등학교 때 동아리도 같이 했던 그런 사이였고, 언제나 소식이 궁금하곤 했던 사이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와 나의 사상이 다른 것과는 별개로...

 

그 친구는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가진 추상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게 무엇이냐는 거다. 생산수단의 사회화 내지는 총유라고 이야기 하면 그러한 상태를 어떻게 끌어올 것이냐는 구체적 전술의 문제를 집중 공략한다. 자본가와의 투쟁? 혁명전쟁을 하자는 것이냐? 총칼을 들고?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가? 등등 그 친구의 공격은 쉴새 없이 이어졌다.

 

그 친구에 대한 나의 공격은 이런 거였다. 도대체 너네들이 말하는 '민족'이 뭔가? 당연히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와 지역배경과 경제적 기반과 혈연과 기타 등등 무엇무엇이 같이 공유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 그런데 그게 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근거가 되는가라고 공격. 당연히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사는 것이 좋다는 식의 답변. 통일 되면 어떻게 할건데? 그 와중에 노동자 등 인민들의 삶은? 등등 나의 공격도 계속 되었다.

 

전날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이 토론의 결론은 없었다. 서로의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고 각각 서로가 가지고 있는 "민족"이나 "노동해방"의 가치관이 추상적 구호에 불과하다는 주장만을 했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다. "니들은 추상 속에 살고 있고,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다!" 이에 대해 다른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웃고 말았다. 아마 그 친구는 알고 있었을 거다. 내가 그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해마다 8월이 되면 통일의 구호소리 높아진다. 몇 해 전부터는 6월에도 역시 한바탕 통일을 이야기하는 난장이 벌어진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다. 이렇게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정말 통일을 원하는 걸까?

 

615선언이 가져다 준 효과라는 것은 북한에 대한 남한 인민들의 경계심이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것 뿐이다. 머리에 뿔난 도깨비들로 생각했던 북한인민들 역시 남한 인민들과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TV 수상기로 실제 확인했던 것.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음침하고 폐쇄적인 밀실형 독재자가 아니라 호걸 스타일의 화끈남이었다는 것. 등등.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갔을 때, 어떤 이들은 환호했다.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개성공단이 건설되면서 남한의 자본가들이 새로운 시장개척의 전기를 마련했을 때도 이들은 통일의 그날이 성큼 다가왔다며 반겼다. 정말 통일은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것인가?

 

일전에 민주노동당 당직선거 과정에서 개성공단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졌다. 개성공단 노동자들이 남한 노동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엄청난 저임금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논쟁. 개성공단의 북한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면 어떻겠는가라는 것에 대한 논쟁 등이 그것이다.

 

통일을 주장하시는 분들 중 어떤 분들이 이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북한은 사회주의국가라서 국가가 모든 기본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므로 개성공단 북한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이 적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노동자들이 장악한 사회체제 이므로 노조가 필요 없다. 이분들 사고구조가 이렇다.

 

그러면서 이에 대해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임금수준 + 북한 정부가 인민에게 지급하는 사회보장의 수준 = 남한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라는 등식이 성립할만한 근거는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다.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노조가 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불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 역시 보여주지 않았다. 아닌 말로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인가???

 

가장 단순하게 보자면 임금은 노동자의 경제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물적 근거이다. 또한 노조는 경제투쟁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치투쟁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남한의 자본가와 정부는 전자에 대해선 어느 정도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후자에 대해선 절대 불가의 방침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그렇다면 임금문제나 노조조직의 문제는 그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냐 사회주의 체제냐, 심지어 공산주의 체제냐를 따지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형태는 다르게 나타나겠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똑같을 수밖에 없다. 개성공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임금 괜찮고 노조 없어도 된다고 주장했던 분들, 다른 곳에 가면 임금투쟁과 노조결성투쟁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 때는 그런 이야기를 했나?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게도 개성공단이라는 곳이 북한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개성공단은 북한 체제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곳이지 결코 북한 체제에 이상을 가져오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분들의 발상이다. 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가 북한이라는 체제 안에서는 다른 기준으로 제시되어야 하는가? 불변의 원칙은 없다라는 건가?

 

심각한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민족통일운동에 동참하시는 분들 상당수에게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송두율 식의 내재적 접근법이 가지는 위험성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니가 나를 알겠느냐"라는 비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통일전선에 복무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북한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그리곤 질문한다. "니가 북한을 알어?"

 

여기서부터 남한 진보진영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남한의 사회모순 중 매우 많은 부분이 실상 미국과 북한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크던 작던 관련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좌파적 관점에서 남한의 구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미국과 북한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분법적인 잣대로 이들을 규정한다. 미국을 비판할 때는 잠재적 동지로, 북한을 비판할 때는 종미사대주의에 빠진 적으로.

 

예컨대 이번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관련한 문제. 실상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그 근본적인 배경에는 남한 정부가 결코 대화의 상대방이 아니라는 북한의 일관된 태도가 있다. 북한은 미국이 보라고 미사일을 쏜 것이지 결코 남한의 입장을 고려하고 미사일을 쏜 것이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은 그래왔다. 정전협상의 대상이 미국이었으므로 미국하고 이야기하면 된다는 식의 자세 속에서 북한은 남한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곤란에 빠트렸다.

 

북한의 이런 자세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새삼스럽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비판을 벗어날 수 있는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순간 그 비판자는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숭미사대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도 하에 시행되는 선군정치(先君政治)의 영향력 덕분에 남한이 미국으로부터 안전하다는 희안한 주장을 이분들은 펼치고 있다. 이런 분들 보면서 느끼는 생각은 닭짓도 가지가지라는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자주민보'라는 사이트 종종 방문하심 되겠다.

 

언젠가 어떤 분이 "남한 진보세력의 아킬레스건은 북한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북한이라는 정치세력의 존재자체가 아킬레스건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정치세력에 동조하고 그에 편승하고 그에 종속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진보세력"이라고 평가받는 것이 아킬레스 건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북한 입장에서 남한의 민족운동세력이 마냥 고마울까? 솔직히 이 사람들 보면 정말 이사람들이 통일을 원하는지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내재적 접근론의 방식으로 북한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려는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남한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들의 남한에 대한 관점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남한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한다. 그러는 와중에 "변혁"이라는 용어는 이 땅 안에서 도대체 그 뜻이 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당은 통일논의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립해야 한다

0. 문제제기

지난 8월 3일 열린우리당 임채정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총 125명의 의원이 연명한 “남북관계발전기본법안”이 의원발의되었다. 4장 23개조문으로 이루어진 이 법안은 “남북관계가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 대북정책을 법적 기초하에 투명하게 추진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으며, 특히 남북간 합의서의 법적 실효성 부여를 통한 남북관계의 안정성과 일관성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되고 있어 남한과 북한간의 기본적 관계를 규정하고 남북관계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들을 규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그 자체로 모순 투성이며, 결정적으로 남북간의 기본적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법률안 제3조 제1항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남북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지난 반세기동안 남한의 정부와 권력집단이 보여줘 왔던 대북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즉,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에 있어 어디까지나 “나라”가 아닌 “잠정적인 특수관계”에 위치한 집단으로서,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휴전선 이북을 점령하고 국가를 “참칭”하고 있는 반국가단체로 보는 관점이 전혀 변함없이 녹아있는 것이다.


법률안에 이러한 내용을 두고 있는 것은 민족간 내부거래로 남북한의 교류를 정의함으로써 국가간 통상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될 수 있는 국제기구 및 외국의 압력을 피해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되나, 남북간의 기본적 관계를 규율하겠다는 취지로 작성된 법률이 북한을 계속해서 “잠정적 특수관계” 운운하며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법률제정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지는 현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조문을 두게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동조 제2항에서 “북한은 이를 외국으로 보지 아니하며, 남한과 북한간의 거래는 국가간의 거래가 아닌 민족 내부의 거래로 본다”는 규정을 두게 됨으로써 남한과 북한은 각각의 독립적 체계를 갖춘 국가간의 관계로서 자기정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국가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국가가 아니라고 보기도 어려운 형용모순에 빠지게 된다.


더불어 제3조의 규정들은 본 법안 안에서조차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법안 제21조 제1항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남북합의서를 체결, 비준하도록 하고 있으며, 동조 제4항은 일정한 경우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헌법상 규정되어 있는 국제조약에 관한 내용과 일치한다. 즉, 헌법 제6조 제1항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 공포된 조약과 일반법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조약 및 국제법규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기 위해서 헌법 제73조는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 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 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한다”고 하여 대통령이 조약을 체결 비준토록 하는 한편, 헌법 제60조는 제1항에서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하여 국회가 동의권을 행사해야할 일정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법안의 제21조는 헌법의 조문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헌법의 해당 조문은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 즉 대한민국과 외국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내용들로서 본 법안 제3조가 규정하고 있듯이 북한을 “나라”가 아닌 “잠정적 특수관계”로 볼 경우 법률 내부에서 정면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보다 밀도 있게 이 법률안을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이 구체성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이 법률안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들은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던 남북간의 각종 합의와 대표급 회담 결과들을 열거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기본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법률 자체를 왜 만드는 것인가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도 못하는 법률이면서 구체성까지 결여되어 있다면 그 자체 기본법으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법률안 자체가 아니다. 이처럼 법률제정의 취지조차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법률안에 우리 민주노동당의 의원들이 상당수 연명을 같이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안 자체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였다기보다는 민주노동당이 과연 북한을 어떠한 존재로 보고 있는지 명확한 상이 그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판단된다. 더욱 냉정하게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은 아직까지도 북한을 독립된 국가체계로 볼 것이냐 아니면 “잠정적 특수관계”로 볼 것이냐 조차도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좌충우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노동당의 강령 중 통일과 관련한 부분을 보더라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거기에는 북한의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규정도 내려놓은 바가 없다. 북한을 “통일의 또 하나의 주체이자 동반자”라고만 천명하고 있을 뿐, 북한의 체제가 어떠한 것인지, 북한을 국가로 보아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조차 언급되어있지 않다.


민주노동당이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정파연합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서로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확한 상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그 결과 당의 강령은 어중간한 형태로 본질적 선언을 하는 것에 머물러 있고, 남한과 북한간의 관계가 더욱 왜곡될 수도 있는 이러한 법안에 연명을 하는 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보다 분명하게 당의 입장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북한을 국가로 볼 것이냐, “잠정적 특수관계”로 볼 것이냐. 그 판단이 선행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통일논의는 뜬구름 잡기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정파간의 입장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도록 한다. 다만 이 문제제기가 보다 활발한 논의를 위한 시금석이 되길 바라면서 개인적인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겠다.

1. 과거 남북한 간의 상호관계 설정과정
수다한 자료가 있으나 그 모든 자료들을 전부 쏟아놓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세 가지 남북 간의 합의, 즉 74남북공동성명,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615공동선언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1) 74남북공동성명은 상호를 어떻게 규정하였나?
74남북공동성명은 실상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위한 준비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명 자체의 내용은 극단으로 치닫던 남북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것이었다. 우선 이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특히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는 “하나의 민족”을 강조한 대목은 주목할만 하다.


또한 이 성명은 상호간 중상비방의 금지와 무장도발의 금지, 남북간 다방면의 제반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조속추진, 서울 평양간 직통전화 개설, 남북조절위원회설치 등을 언급하였다. 성명을 초안하기 위해 비밀리에 접촉을 가졌던 남한의 이후락과 김영주가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성명을 완성하였음을 밝히는 것으로 이 성명의 전문(全文)은 끝나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과연 이 성명이 상호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74남북공동성명은 어디에도 상호간의 국체를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남한과 북한은 국가 대 국가로서 이 성명을 합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민족”이라는 공동선을 가운데 집어넣은 채 서로의 실체는 극구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이 이러한 회피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성명입안의 당사자였던 이후락이 “대한민국”의 대표, 김영주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단지 “상부”에서 파견되어 “상부의 뜻”을 대리해 성명을 만들었을 뿐, 그 “상부”가 무엇인지는 서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후 남한과 북한이 보여주었던 일정한 행동은 각각의 주체가 상대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는 있다. 즉,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이듬해인 1973년 박정희는 623선언을 발표하는데, 이 선언의 내용 중에는 “긴장 완화와 국제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 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북한과 함께 유엔 총회에서의 한국문제토의에 북한측이 같이 초청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북한과 남한이 국가 대 국가로서 유엔에 동시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또한 623선언의 내용 중에는 “호혜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언급하면서 국제사회로 하여금 남북 교차승인이 가능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반대로 북한은 같은 날, 조국통일 5대 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주요내용은 소위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의 천명으로서 남북동시유엔가입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통일 이전에 유엔에 가입하고자 한다면 연방제를 실시한 후 “고려연방공화국”의 국호를 가지고 하나의 국가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남한의 태도와는 완전히 정 반대의 태도로서 북한은 적어도 국제사회 안에서만큼은 남한이라는 국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한 것이다.


다시 분석하자면 74남북공동선언 그 자체는 남한이고 북한이고 간에 서로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전혀 두지 않고 있다. 다만 이후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남한의 박정희는 남북이 서로 국가로서 인정되기를 희망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북한은 이러한 남한의 태도에 대해 결연히 반대하면서 통일된 국체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박정희의 이와 같은 태도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지금까지 분단고착화음모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1년 12월 13일 남과 북은 또 한번 중요한 합의를 하게 되었다. 총 4장 25개 조문으로 이루어진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발표한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실행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서 매우 귀중한 남북간의 합의문이다. 이 합의에서 중요한 것은 남북 상호간 체제의 인정이 언급되고 이를 근거로 내부간섭의 배제 및 남북연락사무소 설치가 실천과제로 등장하였고, 군사정전협정 이후 굳어져왔던 현재의 경계를 불가침 구역으로 인정하며, 남북의 구성원들에게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합의서는 전문(前文)에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명문의 내용을 두고 있다. 이번에 발의된 “남북관계발전기본법안”에 규정된 내용과 일치하는 문장이다. 바로 여기에서 “남북관계발전기본법안”의 제3조 조문이 왜 그러한 내용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해소된다. 그러나 이 합의서 자체만 보더라도 이러한 상호관계의 규정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가가 문제로 부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합의서에 서명한 서명당사자들은 실질적으로 각 체제의 고유한 국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합의서 말미에 당사자를 명기하면서 남한 측은 “남북고위급회담 남측대표단 수석대표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이라고 대표자의 국가와 지위를 밝히고 있으며, 북한 역시 “북남고위급회담 북측대표단 단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이라고 대표자의 국가와 지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74남북공동성명 당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고 표현하고 이름만 달랑 명기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분명 합의서의 전문은 남북이 “잠정적 특수관계”임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명에는 국호가 명기되었다는 사실은 74남북공동성명 당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상호관계가 싹이 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이미 합의서가 발표되기 직전인 동년 9월에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 했었음을 염두에 둘 때 과거와 같은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대단히 위험한 행동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심증에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 즉, 노태우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북방정책의 한 일환으로서 1990년 소련과 남한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후 소련이 남한의 유엔가입에 반대의사를 철회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 동시 유엔가입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게 했던 전차가 있었고, 실제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은 이미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두 국가가 인정되어왔던 관행에 의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는 공인되게 남과 북은 각각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물론 이 과정에서도 남한은 한반도에서 남한만이 유일하게 유엔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았다는 냉전주의적 교육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간의 합의서가 단지 민족내부 분쟁당사자간의 양해각서 또는 휴전합의서처럼 만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후 본 합의서에 대한 각 장별 부속합의서가 속속 체결되는데, 예를 들어 합의서 제1장 [남북화해]에 대한 부속합의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속합의서 제1조에서 “남과 북은 상대방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라고 하고 제2장에서는 각각의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제도)를 “소개하는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제3조는 “남과 북은 상대방 당국의 권한과 권능을 인정, 존중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제6조는 “남과 북은 상대방의 대외관계에 대해 간섭하는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 등 남북 상호간 서로의 체제 일체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은 본 합의서 전문에 언급되었던 “잠정적 특수관계”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부족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규정들은 다름 아닌 상호를 국가체제를 갖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형성될 수 없는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전문이 “잠정적 특수관계”를 선언했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진 합의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국가간 양자조약의 틀을 빌어 만들어진 합의서의 형식은 결국 상호간 국가체제로서의 주권행사와 맞물리지 않고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로 될 수밖에 없었다.

(3) 615공동선언
615공동선언이 남북상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 앞서 잠깐 언급해둘 부분이 있다. 남한 운동세력 중 특히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세력들이 현재 615선언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다. 아무리 온정적으로 해석을 해보아도 615선언의 가치는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서로 얼싸안고 얼굴을 부대끼면서 극적효과를 만들어낸 후 정상들이 직접 선언을 하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남북간의 합의들, 즉 위에 언급한 74남북공동선언이나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만큼의 구체적 실효성을 담보할 내용이 없다.


다른 합의들과 비교할 때 특이한 부분은 기껏해야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정도인데, 이 역시도 알맹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남측의 연합제 안”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김대중 정부가, 아니 더 엄격히 말하면 김대중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남북통일을 위한 단계적 수단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어떠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바가 없다. 북한이 이야기하는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은 또 뭔가? 74남북공동선언 당시 북한이 천명했던 소위 “고려연방제”와 비교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나머지 부분들은 사실 다른 합의에서도 이미 충분히 언급되었던 내용들이며, 특히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및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에 의해 이미 시행되어왔던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소위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처럼 구체성이 떨어지는 615선언에 모든 사활을 거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615선언의 가치 자체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다만 적어도 615선언이 그토록 신주단지 모시듯이 해야 할 만큼 “조국통일” 전사들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그들 스스로 이 선언이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다른 각도, 즉 이 선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가치에 맞추어 생산하고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615선언을 모든 구호의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이 내놓는 실천의 방법은 박정희가 그랬고 노태우가 그랬던 내용들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615선언의 중요한 의미는 그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언의 주체를 명시하고 있는 맨 아래 부분이다. 그곳에 이 선언의 당사자로 참여한 사람들의 국적과 지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기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양 당사자의 지위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본 선언 전문(前文)에 나타나 있다. 바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이 문장에 따르면 “역사적인 상봉”의 주체는 분명히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며 이들은 자국의 “정상”으로서 이들의 회담은 “정상회담”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잠정적 특수관계”에서 논의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제의 앞잡이이지만 “잠정적 특수관계” 때문에 한 측의 대표가 되고 “북한 괴뢰도당”의 “수괴”이지만 “잠정적 특수관계” 때문에 한 측의 대표가 되었을 때는 “정상” 또는 “정상회담”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사회에 있어서 국가간 대표를 호칭할 때 특히 국가원수에 대해 완전히 정착된 관행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74남북공동선언 당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이나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서 국가명칭을 쓰기 전에 남측대표니 북측대표니 하는 부연을 언급하는 행위가 없었다는 것은 단지 김대중, 김정일 두 당사자가 “정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라 615선언 그 자체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성사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2. 민주노동당의 강령에서 남북간의 관계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확인할 수 있는 통일을 위한 구체적 활동내용은 크게 네 가지이다. 즉, 첫째, 민중주체의 통일조국 건설, 둘째, 남한 내 통일기반 조성, 셋째, 남북화해협력교류의 활성화, 넷째, 냉전구조 청산 및 동북아 안보협력체제 구축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강령 안에는 북한이 과연 어떤 존재냐 하는 관점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상에 근거한 “잠정적 특수관계”인지 아니면 유엔 동시가입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된 독립된 국가인지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강령의 두 번째 항목에는 “북한을 통일의 또 하나의 주체이자 동반자로 인식”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통일이라는 행위는 반드시 둘 이상의 당사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처럼 북한을 통일의 일 당사자로 설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당사자의 지위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할 경우 통일을 위한 방법을 구사하는데 상당한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 혼란은 당 강령에서부터 여지없이 나타난다.


북한과의 통일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강령 네 번째 항목에서 나타나는 “교차승인의 완결”이다. 즉 주변국으로부터 교차승인을 완결받겠다는 것인데 이 문구만 보자면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강령은 어디에고 국가 대 국가로서의 통일정책 추진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상호합의와 호혜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세에 의해 잠시 갈라진 “민족”의 내부동질성 확인으로 할 것인가? 남한 내부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자고 하면서 북한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남한에 대한 적대감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잠정적 특수관계” 차원에서 접근할 것인가? 화해협력교류의 활성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국가 대 국가의 차원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잠정적 특수관계” 차원에서 할 것인가? 동북아 안보협력체제의 구축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간 연합의 형태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잠정적 특수관계” 차원에서 할 것인가?


이처럼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의 통일 논의는 장기적으로 명확한 노선의 확립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결과를 만든다. 그 실질적인 예가 바로 앞서 언급한 “남북관계발전기본법안”의 문제이다. 적어도 이 법안은 남북관계의 기본적 위치를 정립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국가보안법에 의한 과도한 심리적 위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헌법 상 영토조항을 피해가려는 의도가 명백히 보이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더불어 비록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상에서 남북간의 관계를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이러한 관점이 기존 정권들과 헌법재판소에 의해 통일논의가 붕괴되도록 만들었던 기준이라는 측면을 생각한다면 이처럼 발전적이지 못한 법률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이 제기되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의원들이 이 법안을 공동 발의하는 현상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민주노동당 자체가 아직도 북한의 지위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당 내에서는 당의 강령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있는 듯한 논의가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당 강령에는 “주한 미군을 단기적으로는 감군 및 후방 배치하여 공격형보다는 방어형 등으로 개편” 내용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군 재배치에 대해 북한 공격을 위한 사전 전초단계로 파악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그것이다. “방어형”이라는 개념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실제 현대전에서 방어형과 공격형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은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도대체 당의 강령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3. 북한은 국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국제적 관계에 비추어볼 때도 적확한 것이다. 분단 이후부터 남한과 북한은 개별적 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활동해왔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남한의 이데올로기 공세에도 불구하고 실상 남한의 정부조차 그동안 북한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체계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국제적 관행들을 지속해왔다. 더구나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한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남한과 북한은 개별적 국가로서 인정되어왔고 바로 그러한 위상으로 국제관계를 설정해왔다.


미국이 속칭 “북한 인권법”을 제정 발효하자 열린우리당의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 법안이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이며 동시에 북한을 고립시키고자하는 발상에서 추진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북한이라는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제를 하고 논의를 진행시켰어야 한다. 북한을 “잠정적 특수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이상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이라는 표현은 전제모순이다. 왜냐하면 “잠정적 특수관계”는 적어도 남한의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영토조항을 폐절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통용될 수 있는 개념인데, 그렇다면 미국의 “북한 인권법”은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이 아니라 바로 “남한에 대한 내정간섭”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미국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하나의 국가이며, 자주권을 가진 국가에 대한 부당한 내정간섭은 중단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야만 한다.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 점에서 기존 보수정당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관점을 견지해야만 한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은 결코 “잠정적 특수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관계를 포기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보수성을 여지없이 형해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인정해야만 한다.


분단을 고착화하자는 의도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지금까지의 노력을 비추어볼 때 지금 상호간의 국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 과거 박정희에게 돌아갔던 비판의 내용, 즉 분단고착화음모로 더 이상 비난받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통일은 당장 내일에도 일어날 수 있다. 아니면 지금까지 분단의 역사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러한 통일의 염원이 지속된다면 상호간의 국체를 인정하는 것이 통일을 가로막는 장벽으로는 기능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각자의 국호를 그대로 쓰자. 남한은 대한민국을,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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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5 21:23 2006/08/1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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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6/09/04 20:59

    현재 진보진영의 딜레마, 왜 진보진영이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는지 그 한 측면을 예리하게 분석한 글입

  1. 어이쿠~! 온라인에서... 힘든 발걸음을 떼셨군요. ^o^;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선배들이 시원한 맥주마시자고 자꾸 전화하네요. 쩝쩝...

  2. 인트라넷에 올린 글의 일부는... 어렵군요 ^^; 이거 법에 대해서는 무식의 경지에 있으니 읽어봐도 눈알이 팽팽 돌아가는 ^^; 크 >_< 하지만 앞서 하신 이야기는 조금 이야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_<;

    저희 학교가 좀 웃겨서, 학내 운동 세력(?)이 소위 말하는 한총련 학생들과 좌파라고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웃긴게 (웬지 이야기 하면 다시 눈팅님이 달라 붙어서 숙제 어쩌고 할까봐 겁나지만;) 소위 서로를 NL, PD 라고 칭하며 아직까지 해묵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지만... (사실 좌파 쪽에서 그런 표현을 더 많이 씁니다만서도 >_<;)

    친구분과 하셨다는 논쟁의 형태를 학교에서도 논쟁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좌파라고 말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학내에 있는 소위 '좌파' 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은 뭔가 좀 이상하긴 해요 >_<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할 기회가 될테지만;) 친구들이 그런 이야길 하긴 하더군요.

    미국 비판하는거 알겠고, 통일 이야기 하는거 알겠는데, 미국 반대해서 그 다음에 대안이 있느냐? 통일 되고 나서는 뭐 대안이 있느냐? 라는 이야길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자신들도 계급 모순과 분단 모순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남 사회에서의 노동 해방, 민중 해방이 선행 된 이후에 분단 모순을 해결하고, 이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논리를 펴더라구요.

    그 때 참 멍해졌던게, 그 친구들의 주장이 저한테는 그다지 주장으로 느껴지지가 않았었거든요. 반미 이후에는 대안이 있느냐는 말이 참 이상하게 와 닿았달까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강대국이고, 제국주의의 선봉에서 신자유주의를 자기들 무기로 휘두르고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붕괴하고 다른 나라가 다시 똑같은 일을 자행하면, 당연히 반대 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건 아닐테고. (너무... 순진한 발상인가요 이거? ^^:)

    제 이해가 부족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민족주의자들이 국제적 연대를 고민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아는 한 민중 해방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물론 지금 한총련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는 한 걸로 압니다만...) 그렇게 말하는게 뭐랄까? 그저 적대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 같달까? 이 부분은 댓글로 될 건 아닌거 같구... 저두 생각을 정리해서 좀 써보고 싶어요.

    여튼 >_<; 제가 지금 뭔 소리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제제기 하신 부분들은 확실히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분들이라고 생각해요.

    새벽길님과 행인님 덕분에 지금 많이 배우고, 또 많이 고민할 거리가 생겨서 좋은거 같기도 하고 뭐 여튼 그렇습니다 ^^; 더 배워야지요.

    제 뜬금 없는 소리가 뭔 소린지는 저도 잘 정리가 안 됩니다만. 나중에 생각 정리해서 글을 올려보던지 하렵니다 ^^

    크... 고민을 더 해보아야 할 듯 >_< 아~ 역시 여기는... 글만 읽어도 내공 증진 되는 소리가 들려서 좋은건지 이게;; 여튼 그렇습니다 ^^; (뭔 소리지 대체;;)

  3. 에밀리오 | 에밀리오님 학교의 좌파 학생들이 진짜 그렇게 얘기들을 한다면 그 친구들 바보들이네요. 멍청한 PD들, 그리고 그 후예들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선차성을 이야기하지요. PD들과 그 후예들은 계급모순이 민족모순에 우선하는데 NL들은 민족모순을 계급모순에 우선한다고 본다며 비판하죠. 이에 NL들이 '우린 두 모순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고 하면 게임 끝이지요.

    추상적인 수준에서 궁극적 모순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건 필요할 지 모르지만, 행동을 조직하는 현실에서는 미국의 깡패짓, 남한과 북한의 갈등, 주변국의 심각한 행동들을 보자면 민족(국가)의 존립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민족모순 또한 계급모순에 버금가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한반도라면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구요. 좌파라면 당연히 미국에 대한 투쟁을 열심히 해야죠.

    NL의 문제라고 한다면 ①사실상 우익 이데올로기라는 점이고, ②그들의 실제 정치활동의 내용이 그 증거라는 데에 있지요. 이를테면 부자들 세금 감면 조례를 발의하고 동조한다거나, 일본과의 독도 갈등에서 전쟁하자고 한다거나 하는 거죠. 또 하나는, 꼭 NL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반민주적인 패권적 활동 방식에 있답니다. 이를테면 지난 민주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저지른다거나 하는 것이죠.

    아마, 행인께서 맘 드신 바가 있어서 NL의 문제를 조근조근 설명하리라 봅니다. 괜한 참견이었습니다...

  4. 말걸기 / 아뇨 >_< 이야기 감사합니다 ^^ (돌 맞을까봐이기도 하지만..) 제 정치적 성향은 NL은 아닙니다 ^^; 크 더 배우고 더 고민해보고 해야할듯 감사합니다 ^^* (하나 확인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_<: 저는 제가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 친구들이 바보 아냐? 이러고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