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상실의 시대

한참 휴가...라고 해봐야 컴퓨터 붙들고 앉아서 수업자료 만들고 스터디용 원서 번역을 하면서 보냈지만... 중에 머리 식힐려고 뉴스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뉴스를 발견했다. 전직 장성들이 국방부 장관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게다가 한나라당에서까지 국방부 장관을 성토했다는 거다.

 

아, 혹시 대추리 군사작전에 대해 드디어 이 땅의 군 원로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인가, 또는 정통보수를 표방하는 한나라당이 이제서야 보수의 진면목을 드러내면서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대해 질타를 하는 것인가 하는,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상들을 하면서 그 기사를 보았다.

 

그랬더니, 내용은 별 게 아니라 전시작통권환수에 대해 성우회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이에 대해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한 마디 했고, 그랬더니 원로를 몰라보는 개싸가지라고 성우회와 한나라당이 노발대발 했다는, 뭐 그렇고 그런 시시껍절한 내용이었다.

 

에라, 안 그래도 휴가 같지 않은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게다가 작년에는 휴가도 못 가서 이번에 2년만에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이런 영양가 완전 제로의 기사를 보고 있다니... 하는 짜증에 후떡 넘겨 버리고 다른 기사들 쭉 검색을 하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전시작통권 환수가 어떤 문제점이 있길래 그런 건가?

 

그리하여 전시작통권 환수에 대한 끊임없이 솟구치는 의문점으로 온 인터넷을 뒤비고 다니다가 결국 도착한 곳은 역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군사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다는 지만원 샘의 시스템 클럽. 역시 이분 맛깔스러운 언어로 윤광웅의 실수에 대해 요목조목 잘 지적해 놓았다. 더불어 개운치 못한 휴가 뒤끝의 축처진 행인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는 시원한 웃음을 선사해 준다.

 

윤광웅이 한 문제의 발언은 이거다. "오래 전 군생활이나 장관을 하신 분들이 현재 우리 군 발전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이에 대해 지선생께서는 "해군에서 어떻게 군대생활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버릇없이 자란 인간이 3성장군씩이나 달았다 하니, 바로 이 자가 해군 망신을 다 시키는 꼴이 됐다. 해군은 이 버릇없는 자를 다시 데려다가 기본 예절교육부터 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훈계한다.

 

대~한민국 해군들, 지선생의 발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어쨌거나 원로께서 애들 버릇을 걱정하시는 거야 3000년 전 피라미드 공사판의 어느 아자씨도 했던 일이니까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선생께서 걱정하는 것은 윤광웅이라는 버릇없는 자의 인성을 걱정하는 차원을 떠나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으니 사실은 그게 더 중요한 것이다.

 

지선생의 입장은 한국의 자칭 보수세력들의 입장-어느 쪽에서는 숭미사대주의라고 비난하는-을 적나라하게 대변한다. 이분의 논리는 전시작통권 환수 → 한미연합사 해체 → 한미방위조약 자동 폐기 → 미국과의 동맹 파기 → 주한미군철수 → 적화통일 이런 수순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려고 하는 윤광웅은 지선생에 따르면 "근본 없는 자"가 된다.

 

이분은 전시작통권이 환수되면 북한이 다량의 화생방 무기와 800기에 달하는 스커드 및 노동미사일을 남한에다가 쏟아부을 것이고 그러면 남한은 대책없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북한이 틈틈이 내뱉는 불바다 발언을 상기시키는 친절함 역시 지선생은 잊지 않는다.

 

한 번 보자. 전시작통권이 환수되면 윤광웅이 이야기한 한미간 대비태세 유지 및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유지에 따른 미군주둔은 지선생의 주장처럼 "소가 웃을 말"이 되는가? 지선생의 우려처럼 상황이 전개되려면 일단 미국이 군사적 거점으로서 남한을 포기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즉,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군 전략거점계획이 선제되고 이에 따라 남한내 전략적 미군주둔이 불필요하게 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미국이 어디 닭대가리들이 모인 곳인가? 미국이 일본은 물론이려니와 남한까지도 MD 시스템 안에 포섭하려는 의도가 뭔지에 대해서 이분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미국은 전시작통권의 유무와 관련 없이 남한 내에 군사적 거점을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하려는 입장에 있다는 거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도출된 배경에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견제는 물론이려니와 장기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군사작전을 극동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미국의 목적이 있음을 지선생이라고 모르는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선생, 이 부분에 대해선 입 싹 씻고 800기의 스커드 미사일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결국 지선생은 북한괴뢰도당의 침략까지 막아내는 전지전능한 미국을 믿지 못하고 있는 거다. 신의 섭리를 맹신하면서도 신의 장래행위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이 이상한 미국열성신도는 이렇게 또 자가당착에 빠진다. 한미동맹이 해체되고 미국이 빠져나가면 1달 안에 남한이 김정일의 손에 떨어진다고 덜덜 떨고 앉았다. 지선생, 연세 드시더니 겁이 많아졌나보다. 전지전능한 미국께서 기냥 보고 앉아 있지 않는다. 어차피 들어와서 지들 먹을 거 다 찾아 가게 되어 있다.

 

문제는 미국이 남아있던 말던 간에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나면 어쨌든 한반도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초토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쟁억지를 위한 방편으로 미국이 주둔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지선생의 신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라면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던 떠나던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맛이 확 가버린 김정일에 의해서? 지금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오히려 부시가 미쳐서 전쟁을 일으키면 몰라도...

 

지선생,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결국 노무현의 가계도까지 들먹이며 욕설을 퍼붓는다. 아직도 연좌제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이 사회의 원로는 지금 남의 버르장머리를 욕할 처지가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가정교육부터 반성해볼 일이다. 잘못한 넘이 있으면 그넘만 욕할 일이지 그넘 윗대를 죄다 거론하면서 싸잡아 욕지거리 하는 거 그거 버르장머리 있으신 분이 할 일이 아니다.

 

어쨌건 지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직 국방부 장관들이 "벨 대장과 버시바우 대사에게 간절히 청"할 것을 요구하면서 "노무현의 집안 내력"을 그들에게 말해줄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전직 국방부 장관들이 성명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선생의 이런 발언들이야 뭐 언론 타고 싶은 잊혀진 '원로'의 피나는 몸부림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을 그렇게 신봉하는 분이 미국을 못믿어 하는 자가당착을 벌이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차제에 고백성사를 하고 불신에 대한 보속을 치루기 바란다.

 

자가당착에 헤메는 분들 또 있다. 성우회 간부들. 이분들, 군생활을 하면서 그 귀하다는 별까지 달으셨던 분들이다. 이분들이 주장하는 바, 미국이 없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지키냐고 한다. 참 신기한 분들이다. 자기들이 군 장성까지 하면서 했던 일은 뭘까? 미군 시다바리? 자기들이 군 장성까지 하면서 했던 일이 "국방" 아니었나? 그런데, 미군 없으면 우리나라 못지킨다고 설레발이 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은 "국방"을 한 것이 아니라 사병들 동원해서 딴 짓이나 했고, 대~한민국 국방은 미군들이 했다는 것을 지금 자랑하는 건가?

 

미군 없으면 "국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군 사회에서 장성까지 했다면 그건 쪽팔릴 일이지 자랑할 일은 아니다.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실 별 하나 달려면 "국방"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 부비면서 "짜웅"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은 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닌 말로 별 단 장성들, 그 별 하나에 자신의 손바닥 손금을 다 없앴고, 그 별 하나에 자기 부인을 상관의 식모로 전락시켰으며, 그 별 하나에 수도 없는 사병들의 피땀을 쥐어짜야 했다. 장성들의 어깨 위에서 찬란히 빛나는 그 별, 그게 사실은 얼마나 이러한 짓거리들을 잘 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식에 불과했던 거다. 그거 지금 자랑하는 건가?

 

신으로 모시는 미국을 믿지 못하는 아메리카교 신도, 국민 세금 받아 먹으면서 별까지 달아놓고 자신들이 한 일은 "국방"이 아니라 미군 시다바리였다고 징징짜는 장성출신 성우회, 여기 얹혀서 정당으로서 정책에 대한 고찰은 하지 않은 채 어르신들에게 사과부터 하라고 훈장질 하는 대~한민국 제1야당 한나라당. 도대체 이 사람들의 정체성은 뭘까? 뭘 믿고 지들이 "보수"라고 주장하는 걸까? 도대체 어느 나라 보수가 자국의 정체성은 밥말아 먹고 남의 나라 깃발 아래 서야 안도를 하는 걸까?

 

참 희안한 나라에 희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역시 희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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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7 09:10 2006/08/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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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대로 조금 더 살면 미칠 것 같다는...

  2. 지만원 이사람 참 버릇이 없군요. 예비역 대령 나부랭이가 감히 예비역 중장에게 막말을 하다니.. 육군은 지만원을 잡아다가 기본예절부터 다시 가르쳐야 할 일입니다.

  3. 희안한 나라에서 희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게 행운이고 즐거움 아닐까요?ㅎㅎ

  4. 그 사람들 장성 되서 한 일이라고는 애궂은 사람들 연못 파고, 호수 파고, 산 갂고, 땅 매우라고 시키긴게 다 일 듯... 에휴 ㅠ.ㅠ 정신 머리 나간나라 ㅠ

  5. 풀소리/ 참으세요... ㅠㅠ

    명랑이/ ㅋㅋㅋ 션하네요.

    산오리/ 그렇군요. 그래서 또 즐거워집니다. ㅎㅎㅎ

    에밀리오/ 그게 다 그렇죠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