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개싸움

정치적 수사의 화려함으로 인해 남달리 조명을 받은 정치인들은 여럿 있다. '판갈이'의 여세를 몰아 아예 어록이 만들어져 인구에 회자되는 노회찬 의원은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과거 박희태의원이나 박상천의원은 서로 앙숙이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술로 치열하게 말싸움을 하던 라이벌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각 당 대변인들의 정치수사법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를 사람들에게 선사한다. 물론 간혹가다가 전여옥처럼 말도 안 되는 용어를 골라쓰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왕짜증을 선사하는 사람도 있었다만...

 

화려한 언변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는데 단연 독보적인 족적을 남긴 사람을 찾으라면 역시 김종필을 빼놓을 수 없다. JP라는 이니셜이 더 낯익은 이 노회한 정치인은 그 뱃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앉았는지 알 도리가 없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현학적인 몇 마디 말 속에서 의중을 가늠하도록 만드는 희안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영원한 2인자'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2인자로서의 위치를 굳혀왔던 김종필. 박정희 정권 안에서 최고의 진가를 누리다가 돌연 1인자에 견제를 받아 외유를 떠나면서 남긴 말은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2인자라는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던 자가 그 내막이 묘연한 상황에서 비행기 트랩에 오르면서 내뱉은 이 말은 각인각색의 해석을 낳으면서 세간의 유행어가 되었다.

 

3당 합당의 여세를 몰아 탄생된 김영삼 정권 안에서 김종필은 역시 2인자로 등극한다. 그 버릇 어디 가겠냐만은 박통때 하던 행동 그대로 김종필은 김영삼 정권 하에서 역시 자신의 위치를 딱 임금 아래 영의정 수준으로 고정시킨다.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김종필은 자신의 2인자 노릇이 어떤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절묘한 발언을 한다.

 

"홍곡(鴻鵠)의 대지(大志)를 연작(燕雀)이 어찌 알겠는가?"

 

즉, 성군이신 김영삼의 뜻을 어찌 잔챙이들이 알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발언에는 또 다른 버전이 있다. 원래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는 거다.

 

"홍곡의 대지를 연작이 어찌 촌탁(忖度)치 못하겠는가?"

 

풀자면 그 큰 뜻을 잔챙이라고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느냐 하는 거다. 두 버전은 약간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를 따르자면 연작, 즉 제비나 참새 부류들은 큰 기러기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고, 후자를 따르자면 이 잔챙이들이라고 해도 큰 뜻을 헤아려 받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두 버전의 해석상 미묘한 차이는 제쳐두고라도, 김종필 노인네, 어찌 되었던 김영삼, 즉 당대의 1인자를 홍곡으로 추켜세우고 자신을 비롯 그 휘하 '어린 백성' 일체를 연작에 비유한 것이다. 충성의 진언이요 용비어천가의 또다른 버전임과 동시에 극단적 처세의 자세를 보여주는 발언 되겠다.

 

사실 이 발언은 고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시황제가 세운 진나라가 2대를 채 못넘기고 휘청거릴 때 형(荊) 땅에 살던 진승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 진승이 머슴살이를 할 때 "내 후일 큰 인물이 되면 동료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실소를 하며 머슴 주제에 큰 인물 어쩌구 하는 것이 당치 않다고 비꼬았다. 이에 진승이 한 말이 바로 이거다.

 

연작안지홍곡지(燕雀安知鴻鵠志), 말 그대로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리요..." 하는 거다. 농민반란의 지도자가 한 말을 군부독재정권의 2인자가 다시 했다는 것, 이런 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는지 뭔지...

 

그러나 역시 홍곡의 대지를 연작은 모르는 법. 박정희와 마찬가지 생각을 해서인지 또 다른 배경이 더 큰 원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튼 김영삼은 김종필을 내 찬다. 김영삼이 내차라서기 보다는 언젠가 넘버2의 자리를 벗어 던지고 넘버1의 자리에 올라보겠다던 야심이 붕괴되는 전조를 느꼈던가, 김종필은 그 '홍곡'을 향해 이렇게 뇌까렸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한신의 고사 그대로 토끼몰이가 끝나면 개를 삶듯 홍곡을 위해 연작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자신이 결국 내동댕이 쳐졌다는 자조였을까.

 

김종필의 유명짜한 발언들은 그 전거를 찾아보거나 한자풀이를 따로 해야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진의가 해석될 수 있었기에 전 국민들에게 한자공부의 동기를 부여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반면 해석된 뜻은 거의 대부분 제 자신의 하소연이거나 윗사람에 대한 철저한 복종의 언사라서 별로 영양가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나마 이 너구리를 한 백마리 정도 삶아드신 것 같은 노친네의 발언은 그 배경과 의미와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낭만이라도 좀 있었다. 어찌 보면 잰척하는 듯한 느글거림도 있었고, 또 그런 연장선상에서 못 배운 것들에 대한 훈수처럼 시건방져보이기도 했다만 어쨌든 간에 자신의 정황을 가장 적절한 수사로, 그것도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전거로 풀어내는 솜씨 자체는 높이 평가할만 하다.

 

최근 노무현이 바다이야기 사건과 관련하여 "도둑을 맞으려니 개도 안 짖는다"라는 발언을 한 것 가지고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권의 관심은 "개"가 도대체 누굴 지칭하는가 라는 것인갑다. 다시 말해, 죽어도 자기 스스로는 "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그리하여 노무현이 말한 "개"가 야당이냐, 노무현의 측근들이냐, 언론이냐, 아니면 뻥구라 치고 있는 행인이냐 뭐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설왕설래 하는 갑다.

 

며칠 전 노무현의 이런 발언을 처음 접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저 노무현은 어째 지 귀를 탓하지 않고 남탓을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황금성이니 바다이야기니 하는 사행성오락기계의 문제점, 또는 성인PC방이라고 하는 그 실체가 뭔지 궁금하기 그지없는 이상한 시설이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은 행인 기억에도 최소한 2004년부터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행성 오락기와 성인PC방의 위해성에 대해 목청을 높혀왔던가? 개도 2년을 짖었으면 목구멍이 찢어졌거나 심지어 각혈을 하며 사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그놈의 귓구멍은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그 소리를 못들었을까? 하는 거 보면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신기한 기능의 달팽이관을 가진 거냐, 아니면 원래 정체가 사오정이었던 거냐? 정 들리는게 시원찮으면 보청기라도 하나 끼던가...

 

인터넷 웹서핑을 즐겨하면서 네티즌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던 노무현. 웹서핑을 하려면 좀 다양하게 해야 하는데, 구색이 지 취향에 맞는 것만 돌아다닌 결과가 오늘날 "개"발언의 원천이 된 것은 아닐지. 허구한 날 21세기 용비어천가만 목청껏 외치는 서프라이즈 같은 사이트 보면서 조선일보가 지랄 옆차기를 해도 무소의 뿔처럼 개혁을 향해 간다는 그 알량한 고집으로 달리고 달리다가 오늘날 이렇게 된 상황을 연출한 것은 아닌가?

 

김종필의 홍곡연작발언의 모태가 된 고사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처음부터 진승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세황제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마침 동쪽으로 갔던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환궁하자마자 이세황제에게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그랬더니 이 철딱서니 없는 이세황제가 "감히 누가 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가? 저 사신을 옥에 가두라. 혹세무민한 죄다"라고 하면서 되려 이 사신을 벌준다.

 

하지만 반란의 소식을 접한 뒤끝이 개운할리가 없는 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에 파견했던 다른 사신을 불러 이세황제는 반란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앞의 사신이 진실을 말했다가 경을 치는 것을 본 이 사신은 어찌 이 태평성세에 난리가 나겠느냐, 그 땅 사람들이 황제폐하 없으면 죽고 못산다 하면서 썰을 풀어버렸다. 이에 이세황제는 의심을 풀고 망해가는 지름길로 내처 달려가게 되는 거다.

 

듣고 싶은 것만 듣다가 홀라당 망하는 넘버1에게 잘 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는 딴 게 아니다. 그러다 지 혼자 망하면 다행이지만 결국 절대 혼자 망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세황제 호해역시 지 혼자 망한 것이 아니라 전 중원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망했고 그 결과 유방과 항우의 쟁패 와중에 수많은 민중이 고초를 겪게 되었다. 사실은 그게 더 두려운 거다.

 

어쨌든 이 와중에 그놈의 "개" 발언 하나를 두고 싸움박질을 하는 정치권의 모습은 거의 진흙창 개싸움 수준이다. 도대체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는 모르고 "개"의 진위만을 가리려는 모습은 거의 유아기적 수준이다. 누구 말마따나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형국이 아닌가 궁금해진다.

 

그래도 흥미진진하긴 하다. 누구 말빨이 더 셀라나? 불구경, 응응구경 다음으로 재미난게 싸움구경이라지 않나? 내 마빡에 몽둥이가 떨어지지 않는 한 기냥 이 싸움 구경이나 할란다. 게다가 "개"싸움인데 어찌 재밌지 않겠나??

 

PS : 진짜 개싸움, 즉 투견은 싫다. 투견 뿐만이 아니라 짐승끼리 싸움붙여 놓는 것은 모두 정이 안간다. 차라리 프라이드나 K-1을 보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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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0 13:25 2006/08/3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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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멍멍!

  2. 이전투구 쿨럭 >_<;

  3. 노무현의 개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발언을 듣고 크게 웃었어요 ... 개가 고기를 훔쳐먹는데 .. 자신을 향해 짖는 멍청한 개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를 생각했다는 ... 노무현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본듯 해요 .. ^^

  4. 당사에서 마지막까지 봤죠. 종필이형과 노회찬...크...~

  5. 말걸기/ ㅋ

    에밀리오/ 그쵸...

    손윤/ ^^;;;

    박노인/ 그 드라마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 희열이 너무나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