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날, 그래도...

#1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다가 어찌어찌 정리를 해놨는데, 계속해서 말이 나온다. 불과 십여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공간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렇게 예민해질 수 있다니 놀랍다. 그 사람들 중에 행인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며칠동안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그냥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이사람 저사람 계속해서 깐죽거린다. 성질나는 것을 가라앉칠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재수없게 불을 당긴 사람이 다름 아닌 심최고였다.

 

사실 아무리 상황을 따져봐도 심최고에게 성질을 낼 일은 아니었다. 그건 물론 심최고를 향해 내지른 지랄맞은 곤조부리기는 아니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심최고에게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심최고는 공간에 대해 한 마디 하려다가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내지르고 싶었던 인간들은 따로 있다. 만일 그들 중 누구 하나가 그렇게 신경을 건드렸다면 아마 오늘 누군가 쌍코피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얄미운 인간들은 용케 신경거스리는 짓들은 하지 않고 지나간다. 결국 전혀 싸울 일이 없는 사람들과 티격거리다가 엉뚱한 사람만 마음고생을 하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살리라 마음먹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 많이 했다. 원래 성질머리 고약한 행인이 그나마 다른 사람들과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은 그 빌어먹을 곤조통을 스스로 관리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일을 돌이켜보건데, 이 답답한 행인아... 아직 수양이 덜 되도 한참 덜 되었구나...

 

심최고에게 사과를 해야한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발작을 떨어놔서 어떻게 수습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더라도 할 수 없지만 변명거리가 없을 정도로 잘못은 행인에게 있다.

 

#2

친구들과는 꽤 오래 전부터 약속이 잡혀있었다. 로드맵이 본회의에 상정되게 생겼고 그 대책을 고민해야할 판국인데다가 심최고와 그런 일도 있었고 해서 도저히 움직일 마음이 생기지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 종로로 나갔다.

 

20년 넘게 엉겨붙어 다니던 넘들인지라 한 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았나보다. 왜 우거지상이냐,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어쩌구 묻는다. 이넘들에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해줄 일도 아니고 게다가 뭐 잘한 것이 있어야 이야기나 하지, 그래서 그냥 꿀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친구란 좋은 것이다. 모처럼만에 웃자고 만난 넘들이 괜히 행인때문에 울적해지는 듯 해서 또 갑갑해질뻔 했지만 이 친구들, 오히려 행인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유쾌하고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지난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밥 많이 먹고 부풀어오른 뱃가죽에 경련이 일 정도로 많이 웃었다. 행인까지 네넘이었는데, 둘은 장가가서 애가 둘씩, 결혼한지 벌써 13~4년이 된 녀석들이었고, 나머지 한 넘과 행인만 미혼. 애들 크는 이야기며 부모님 안부며 이럭저럭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을 먹고 술 한 잔 걸치자고 자리를 이동했다. 이 기혼남들은 결혼한 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술먹느라 외박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하필 오늘 '삘'을 받았나보다.

 

결국 행인따라 영등포로 간다고 난리법석. 들어가서 내일 새벽까지 로드맵관련 검토보고서 올려야한다고 해도 부득부득 간단다. 오늘 하루 외박해도 워낙에 결혼 후 처음이니 짝지들이 이해해줄 것이라고 한다.

 

전철을 타고 오는데 한 넘이 좀 불안해한다. 이른바 "꽉 잡혀 사는 남자"의 전형인 이넘, 왠지 짝지에게 혼날 것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해서 친구들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자 핸드폰에 문자를 찍어보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각자 지 짝지에게 오늘 못들어가는 것에 관해 한 마디씩 해보란다.

 

그래서 세넘이 한마디씩 불러준 말은 다음과 같다(뒤의 부호는 불러준 넘들 이름).

 

디비 자라 - XX

먼저 자라 - OO

며칠 못들어간다 - 행인

 

이넘이 이걸 콕콕 찍어 문자로 날리고 불과 1~2분 지났을까. 그넘 짝지로부터 답메일이 왔다.

 

디비 자라 - 죽을래?!

먼저 자라 - 잠 안온다.

며칠 못들어간다 - 좋은 소식 ^^

 

답메일 보고 네넘, 전철안에서 거의 기절...

 

영등포까지 와서 술 한 잔 더 한다는 넘들을 남겨두고 당사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다. 행인때문에 거기까지 왔던 녀석들에게 또 미안하다.

 

#3

이제 로드맵 관련 대응방안을 검토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내일 아침 8시에 의총에서 다루어질 내용이므로 회의자료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6시까지는 일을 끝내야 하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헌법소원이 가능한지를 검토하라는데, 가망이 보이질 않는다. 정치적으로라도 효용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별로 긍정적이지 않고...

 

어쨌든 이래 저래 갑갑하다.

행인때문에 괜히 욕본 심최고에게도 미안하고

행인따라 의정부에서 영등포까지 밤 12시에 달려온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어느 뛰어난 넘이 작성했는지 모를 이 거지같은 로드맵 법안들을 보니 침울하고

우울하다. 뒌장... 진짜 우울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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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2 00:32 2006/12/2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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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최고가 겉으로는 안그래 보여도 맘이 아주 넓은 사람이라 사과하면 잘 받아줄겨. 걱정마셔.

  2. 행인 성질이 못됬군요...심최고한테 절대로 용서 받아주지 말라고 전해 드릴까요?ㅋㅋ
    그정도로 한번씩은 난리를 치는게 스트레스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길..

  3. 말걸기에 한표!! ㅋㅋ

  4. 이사가는 날 상근자들끼리 다투기도 하고, 송태경 국장도 보따리 싸는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고 하는 게 '공간'의 문제였나보네요... 참 닭들이 하는 짓이 어디서나 똑같아 놀랍습니다. 조금만 짚어보면 될 것들을 그냥 밀어붙이니...
    요즘엔 그 이면에 지저분한 거래나 없으면 다행이다 싶어요...

  5. 스트레스 해소라기 보다는 어쨌든 행인의 잘못이었습니다.

    심최고에게는 사과를 했지만 후유증은 오래 갈 것 같네요...ㅠㅠ

    아, 그리고 외박을 결의했던 친구넘들은 모두 해장국 한 그릇씩 처먹고 다들 집으로 갔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