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방의 추억(9)

방명록에 "뚝방전설"이라는 분께서 70년대 뚝방의 모습을 모으고 있으시다며 혹시 사진 같은 거 있는지 물어오셨다. 안타깝도다, 다달이 봉지쌀로 연명하던 때에 사진기가 있을리 만무. 그러고보니 뚝방시절 사진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된 계기였다.

 

노가다판을 전전하시던 아버지는 지방에 가 계신 일이 많았다. 1년 내내 얼굴 몇 번 볼 수 없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나마도 일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었기에 천리를 멀다하고 일만 있으면 어디든 가시는 판이었다. 봉제공장 다니시던 어머니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뚝방 판자촌에서부터 영등포(지금은 구로) 어디에 있는 공장까지 걸어서 다니는 판이라 지방에 계신 아버지를 보러 내려가기도 수월치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뚝방시절 사진이라고는 돌 때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하나가 다고, 그것도 뚝방이 아니라 이모 사시던 영등포 신길동에 나가서 거기 있는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었다. 그동안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데, 그래서인가 몰라도 초중등학교 시절 친구들 집에서 대여섯살 때 찍은 친구의 사진을 보며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항상 추억이라는 것은 머리속에서만 왔다갔다할 뿐이었고, 정작 내가 뚝방에서 살았었다는 물증은 기껏해야 동사무소에 보관된 주민등록표를 직접 확인하는 것 뿐이리라.

 

사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던 이동식 사진관이 있었다. 말이 좋아 이동식 사진관이고 실상은 큼지막한 사진기를 가진 사진사 아저씨가 자신이 찍은 잘 나온 사진 몇 장을 판넬에 붙여 뚝방 방죽 위나 아니면 골목 어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고 나면 돈을 주고 주소를 적어주거나 모월 모일에 다시 온다고 하고, 우편으로 보내주거나 다음번 행차때 직접 주거나 하는 것이다.

 

당시 멀리 출장 가계신 아버지께 가족 사진 한 장을 보내기로 하셨던 어머니. 버스비 아낄려고 새벽부터 공장에 걸어서 출근하시던 그분이 큰 결심을 하신 거다. 해서 어머니와 동생과 행인, 뚝방 방죽 위에 셋이 나란히 서서 사진 한 방 박아 뽑은 적이 있다. 뚝방방죽 위로 요즘 문제가 되는 '가시박' 비슷한 그 따끔거리는 잎사귀를 가진 풀이 무성히 자라 있었고, 반바지만 입은 행인과 동생은 멋진 장면을 연출(?)하려던 사진사 아저씨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그 풀밭 가운데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며칠 후 받은 사진은 아주 깨끗했고, 아마 생전 처음으로 내 모습이 박힌 칼라사진을 보면서 아주아주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사진찍은 당일날은 그 따끔거리는 풀들에 살이 쓸려 풀독이 올라 밤 새도록 다리를 긁었지만. 사진은 지방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졌고, 나중에 아버지가 서울에서 일을 하시면서 집에 보관되게 되었다.

 

그게 꽤 오랫동안 집 어느 앨범에 들어있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뚝방전설"님의 요청을 받고 갑자기 생각나 찾아보았더니 도통 보이질 않는다. 그 사진 안에 뚝방의 모습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진의 이미지는 뚝방 방죽 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진사 아저씨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인물이 중심이 된 그 사진의 배경에는 푸른 하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뚝방 판자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진이라도 그 뚝방의 방죽 위에 서 있었던 어느날의 행인이 갑자기 보고싶은 건 왜일까. 어쩌면 이 뚝방의 추억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 어쩌면 갑자기 그날 거기 서 있었던 행인의 얼굴이 보고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사진이 있었더라면 혹시 슬퍼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유일한 가족사진이었을 그 사진에 정작 아버지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가족사진이라는 것을 찍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을만큼 철딱서니가 들었을 때는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기 때문이다.

 

그 때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시던 아저씨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지 젊은 사람이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멀리 떨어져 얼굴 전체를 카메라 뒤에 감추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 아저씨, 지금은 살아계실까 아니면 뭐 하고 사실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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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5 23:50 2007/03/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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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끔은 가족사진을 찍어 둘 필요도 있을듯 해요..

  2. 산오리/ 글쳐...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