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518

* 쌈마이님의 [5.18] 에 관련된 글.

반공소년 행인이 어릴 적에, 저 먼 남도의 빛고을이라는 곳에 '간첩'들이 출몰하여 난동을 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방화 약탈을 일삼던 이 '폭도'들의 배후에는 남파된 '간첩'들이 있었고, '독침'도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하던 노래 허구헌 날 부르면서 살았던 반공소년 행인, 머리에 뿔달린 북한 괴뢰도당이 곧 땡끄를 몰고 휴전선을 돌파하여 대한민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렇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518은 그리고선 한동안 잊혀진 어느 해의 하루가 되었다. 다니던 성당의 대학생 형들이 518의 참혹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전혀 믿지 않았으며, 이들이 좌익사상에 경도된 '빨갱이'들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때때로 혹시 신고를 해야하지 않는가라는 의무감때문에 심히 괴로워하였다. 그렇게 518은 잠깐 잠깐씩 귓전을 흘러가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게다가 그 혼란을 가라앉히고 혜성같이 등장하여 조국민주화의 새 장을 여신 전두환 대통령 각하를 위대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86년으로 기억되는 약간 쌀쌀했던 봄날을 맞이했다.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행인은 명동성당 안에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쪽 귀퉁이에 쳐져 있는 검은 천막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광주사태' 비디오전을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발동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보았다. 금남로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터져버린 어떤 사람의 머리를. 가슴이 도려져 나간 어느 여고생의 시신을.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공수부대원들의 몽둥이들을. 발가벗긴 채 공수부대원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가던 어느 청년을...

 

그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끔찍함에 대한 공포, 참혹함에 대한 역겨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속았다는 느낌 뿐이었다. 신문도, 방송도, 선생도, 국가도...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동안 나를 속여왔다는 것 뿐이었다. 그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멍한 느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그 느낌. 518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세상에 그러한 폭력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이 꼭꼭 감추어져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거진 2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 충격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아마 평생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총을 든 이유. 민주화? 독재에의 저항? 민중혁명? 글쎄...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 그러나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분노. 지극히 원초적인 분노.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분노. 그것이었으리라. 죄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연의 일치 때문에 총알에 관통되어 죽고, 개머리판에 맞아죽고, 대검에 찔려 죽고,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고... 내 옆에서 그렇게 내 아는 사람들이 스러져간다면, 그 때 머리 속에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분노, 바로 그것이 솟구쳐 오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폭도'들의 '광분'으로 매도되었고, 모든 선전수단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왜곡은 진실로 둔갑해 바깥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가려진 '진실'. 전두환은 세세만년 진실을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불과 수년만에 반공소년 행인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고 말게 될 것이었는데...

 

아프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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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9 20:54 2005/05/1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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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5/05/19 23:00
    Subject: 5.18

    오늘이... 5/18 이구나.. (거꾸로 읽으면 공휴일인데.. 쩝..) 도덕시간에 도덕 선생님이 심심했는지, 5/18 이야기를 슬쩍 꺼내보이셨다. 난 초등학교때 '5/18 민주항쟁' 이라고 배웠는데 지금

  1. 잇힝.. 518관련 포스트니 트랙백 날릴께요=ㅂ=)/

  2. ruca/ 헉... 감사합니다. ^^ 이런 아픈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3. 저도 만만치 않았던 반공소년 자일리톨이었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 대통령을 노태우에게 물려준다는 전두환의 말을 듣고, 대통령도 왕처럼 대물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습지요. 노태우가 6.29선언한 다음에 "아~ 아니었구나"싶긴 했습니다만..-_-;

  4. 오오~~~~ 자일왕림하시었도다~~~!!!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요? 많이 바쁜가봐요? 언제 함 또 모여얍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