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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맹신, 마리화나 FTA
지난 여름, 심난했던 더위가 제 풀에 꺾여 수그러들 때 쯤, 신촌 먹자골목 어딘가에서 노릇노릇 고기를 구우며 우연찮게 마리화나, 곧 ‘대마초’에 관해 지인들과 논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대충 두 갈래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는데, ‘대마초는 합법화 되어야하는가?’ 와 그에 부차적으로 ‘대마초는 몸에 해로운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들이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실물적인 증거들이 많았기 때문에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담배보다 몸에 해롭지 않고, 중독성도 강하지 않다, 라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합법화’라는 질문에서는 접합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아니, 담배보다 몸에도 덜 해롭고, 중독성도 약한데, 도대체 왜?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유리한 증거를 내밀어 설득하려 했지만, ‘그런데 난 대마초 마음에 안들어’라는 거칠고 옹색해보이는 논리 하나조차도 깰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논쟁을 모두 부정하는 듯한 그 말은 전혀 타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힘이 있었는지, 그 날 술자리에서의 실질적 승리는 반대측이 가져갈 수 있었다. 물론 찬성측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 상황 속에서 그저 씁쓸해했을 뿐이다.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해결된다면 무엇이 불평등하겠냐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떠한 믿음, 달리 말하면 ‘전형(=streotype)’들로 뒤덮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만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나름의 ‘전형’을 형성해간다. 국민 대다수에게 ‘대마초=마약’이라는 공식과 ‘마약은 나쁘다’라는 명제가 박혀있는 상태라면 대마초가 얼마나 해로운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된다. 대마초라는 말을 듣으면 자동적으로 마약이 연상되고, 온갖 좋지 않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형은 많은 경우 아무도 못 느끼는 새 우리를 쉽게 가치판단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무장 세력이 가장 저급한 권력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전형을 통제하는, 즉 헤게모니를 쥔 세력이 가장 고급스러운 권력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경청할만하다.
이러한 헤게모니 작용은 비단 사회적 문제만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기업체의 PR 등 다방면에서 볼 수 있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기업인 현대 자동차가 이미 90년대 이전부터 주 소비층이 아닌 어린이들을 타겟으로 한 PR을 시도한 점은 이러한 작용의 연쇄지점이라 볼 수 있다. 최근으로 넘어와 국정홍보처에서 시행하고 있는 최근의 FTA에 관련된 일련의 광고 영상들을 보면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기회다. 영상을 보면, 카메라는 망망대해를 마치 활공하듯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물론 그 끝에는 ‘아름다운’ 미국이 있다. ‘이제 세계 앞에 더 큰 대한민국이 달려갑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끝나는 이 짧은 CF에서 누가 감히 FTA 반대를 역설할 수 있을까, 우리도 ‘아름다운’ 미국같이 될 수 있다 말하는데. 물론 심지어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의 합리적 판단과 근거는 실종된 지 오래다.
“난 과거에 사람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소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 여자에게 이 말을 할 거요
사랑하오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서유기 2 선리기연(1995)> 中
주성치, <서유기 2 선리기연>의 기억
박종윤
1. 심심한 추석
유달리 긴 한가위 연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 역시도 일주일 간 주욱주욱- 늘어진 오후의 연속이었다. 친척들과의 즐거운 시간, 송편 만들기, 전 부치기, 그리고 모처럼의 연휴를 만끽하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늘 쫓겨 살아온 탓일까, 긴 휴가는 오히려 날 지치게 만든다. 그렇게 풍성한 한가위가 심심한 추석으로 바뀌어 갈 때쯤,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추석 특선 영화 편성표가 담겨있는 며칠 전 한겨례 신문 쪼가리. 문득 명절마다 온가족이 앉아보던 특선 영화들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보다 오히려 명절날 보았던 영화들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가족들과 명절만 되면 “명절에는 역시 짱깨영화”라며 이번 추석에는 어떤 영화가 하나 꼼꼼히 살펴본다. 늘 그래왔듯이. 한국 영화가 더욱 많아진 요즈음과는 다르게 어릴 적에는 정말 많은 중국(그리고 홍콩) 영화를 티비에서 볼 수 있었다. 임청하의 <동방불패>, 이소룡의 <정무문>, 장국영과 왕조현의 <천녀유혼> 등 굵직굵직한 영화들이 방영되었지만, 사실 명절 영화의 왕좌는 역시 성룡과 홍금보가 지키고 있었다. 성룡이나 홍금보 둘만 나와도 박장대소하는데 둘이 같이 출연하는 <쾌찬차>같은 작품을 방영할때면 정말 행복했다. 어린 날 티비를 하나놓고 네 가족이 키득대는 모습은 영락없이 명절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간혹 성룡과 홍금보가 나오지 않아도 눈길을 잡아채는 영화가 있었다. 주성치, 그리고 오맹달이 출연한 작품들이 그랬었는데, 영화에 담긴 정서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종종 등장하는 슬랩스틱한 개그들만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뿐, 주성치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대학 들어온 그 해 여름의 이야기이다.
2. 주성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관객이 호평을 하는 영화가 있고, 대부분의 관객이 욕을 하면서 - 가끔은 영화 보는 도중에도 나가는 영화도 있고, 관객들의 호불호가 ‘취향’의 차이에 따라서 끔찍하게도 갈리는 영화들이 있다. 헐리우드의 흠잡을 데 없는 웰메이드 블록버스터가 첫 번째 경우에 속한다면, 두 번째 경우에는 정말 완성도가 낮은, 예로 들기는 미안하지만 조인성이 주연을 했던 <남남북녀> 같은 영화들이 속하지 않을까 한다.(최근작이었던 <비열한 거리에서의 연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마지막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은 작가주의적(이라 편의상 통칭하는) 영화들이 그러한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홍상수,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입김이 깊이 들어간 영화들은 감독의 특정한 정서가 영화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또한 변주되기 마련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개중 가장 반복과 변주에 천착하지 않나 싶다.)
특정한 정서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까닭에, ‘코드’를 가지지 못하였거나 혹은 맞지 않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감독들의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는 폭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그 나름의 맛을 알게되면 (통상적으로 개봉관이 적기 때문에) 찾아서 보지 않으면 보기 힘든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꼭 인사동 좁은 골목의 허름한 어느 술집 들어가듯 찾아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팬덤이 형성되게 되고, 이 팬덤은 그 크기가 작던 크던 작가주의적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큰 힘이 된다. 그렇게 창작 활동을 하고 또 피드백을 받는 행위를 통해서 그 특정한 정서는 주욱- 유지되기 마련이다. 감독이 (소위) 변절하지 않는 이상은.
주성치가 출연하거나 연출하고 있는 일련의 영화들 역시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주성치는 홍상수, 김기덕 등 감독의 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 못한 것에 비하면 정말 중국의 대중적인 영화인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마니아적인 특성은 거의 원본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 매력은 살아있다.
기본적으로 주성치는 코미디 배우다. 주성치의 팬 카페(물론 한국 팬 카페지만)에도 가입하여 거의 모든 주성치의 영화 리스트를 섭렵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주성치의 영화는 물론 멜로, 액션, 심지어 스포츠적인 면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극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작용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실상 코미디라는 큰 범주의 장르로 모두 묶어낼 수 있었다. 주성치의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다소간의 슬랩스틱, 엉뚱한 상황 전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패러디에 기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매력을 잘 살린 작품군은 <파괴지왕>, <녹정기>, <식신>등 주성치 코미디의 초중기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주성치가 슬랩스틱, 패러디로만 승부하는 것은 아니다. 주성치 영화의 표면적 매력이 그러한 코미디적 요소에서 나온다면 그 내면의 정서적인 기반에는 ‘힘없고 약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 묘한 동질감과 그러한 약자들이 결국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영웅 신화’의 이데올로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줏어 들은 말이지만 중국에서 주성치의 영화들이 큰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가 약자의 정서에 호소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웃기고 재치있는 주성치 영화의 이면에는 채플린의 영화들이 그랬듯 나름의 페이소스가 있다.(물론 주성치의 영화가 거의 해피엔딩으로 가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순수 희극의 영역을 넘어간 주성치의 영화들은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등 여타 요소들이 강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중 대표적인 영화가 굉장히 모던한 느낌이었던 <희극지왕>, 그리고 서유기의 주성치적인 재해석, <서유기 1 월광보합(이하 월광보합)> 과 <서유기 2 선리기연(이하 선리기연)>이다.
3. 선리기연
<월광보합>이 주성치가 그 전까지 가져오던 시종일관 웃음짓게 만드는 코미디의 미덕을 서유기의 인물들로 재해석한 1부라면, <선리기연>은 주성치의 코미디적 요소는 대폭 축소된 멜로적 성격이 강한 드라마를 가진 2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선리기연>은 <월광보합>보다 ‘덜’ 웃기지만 결과적으로 정서를 뒤흔드는 파장은 전에 없이 크다. 하지만 주성치식 유머는 슬픈 드라마에도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주성치의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 중 가장 명대사를 뽑으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난 과거에 사람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소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 여자에게 이 말을 할 거요
사랑하오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이라는 무척이나 긴 대사를 뽑을 것이다.(심지어 필자와 같이 외우고 다니는 사람도 종종 있다.)
이 대사는 <선리기연>을 통틀어서 두 번이 나오는데, 첫 번째는 지존보(주성치 분)가 영화에서 자하(주인 분)에게 죽을 위험에 쳐해 있을 때 거짓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지존보가 실지로 자하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우마왕에게 잡혀간 주인을 구하기 위해 손오공으로 환생하면서 속세와 인연을 끊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 중 주목해야 될 전제는 사실 이 대사의 원 주인이 주성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가 나오기 전해 나온 왕가위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중경삼림>의 대사이다. 금성무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되는 이 대사는 많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우울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 진지한 대사를 주성치는 통째로 따다 패러디 해버린다.
자하가 지존보에게 칼 끝을 겨누는 순간, 영화는 순간 스틸컷으로 전환되면서 지존보와 자하, 그리고 겨누고 있는 칼을 연달아 비추며 마치 만화를 읽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명백한 의미에서의 스틸컷이 아닌, 등장인물이 가만히 멈추어 있는 효과로 스틸컷의 효과를 준다. 검이 지존보의 목을 겨누는 순간 장면은 고정되며 지존보의 친절한 나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때 검과 내 목과의 거리는 0.01cm 밖에 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중경삼림의 패러디가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중경삼림의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친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 밖에 안되었다. 난 그녀를 모른다. 여섯 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라는 초반부 대사를 패러디해온 것이다.(“....만년으로 하겠소”라는 대사가 중경삼림의 패러디가 아니고, 우연히 겹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엿보이지만, 그 앞에 자리잡은 이 첫 대사를 본다면 그 것은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스틸컷은 계속된다. 자하의 화난 얼굴이 다시 비추며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검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과장된 지존보의 눈망울, 다시 자하의 눈, 과장되어 보이는 지존보의 이빨, 자하의 귀, 지존보의 다리, 자하의 다리가 정지된 상태에서 계속 넘어가면서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난 많은 거짓말을 해왔지만 이번이 가장 완벽했다.”라며 나레이션은 계속 흐른다. 지존보의 양손이 한번 클로즈업 될 때 한쪽 손은 Fuck you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자하의 검을 겨누고 있는 손을 비출 때 정지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손으로 오른 손이 간지럽다는 듯이 잠깐 긁고 이내 다시 자세로 돌아간다. 가히 키치적이라 할만한 설정이다.
나레이션이 시작될 때쯤 정지된 사운드는 나레이션의 끝과 함께 슬픈 음악을 내보낸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 지존보는 “난 죽어 마땅하오, 어서 죽이시오.”라며 저 위의 그 유명한 대사를 읊는다. 자하 역시 대사의 말미 쯤에 가면 같이 울어버린다. 이 곳에서 카메라는 클리셰한 쌍팔년도 멜로드라마같은 방식의 워킹을 보여주는데, 자하와 지존보의 얼굴을 계속 연달아 클로즈업하는 방식이다. 대사 말미에 갈수록 감정이입을 강조하는 듯 점점 더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이 방식은 음악과 더불어 굉장히 저열한 느낌으로 재현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모두 울고 있지만 관객은 웃겨 자빠질 지경이다. 촌스런 시퀀스의 마지막에 자하가 칼을 놓치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찍은 것은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이에 반해 영화가 말미로 향하기 바로 전, 지존보가 자하를 우마왕에게서 구해내기 위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손오공으로 환생하는 장면에서의 패러디는 사뭇 진지하다. 물이 떨어지는 반사동 동굴 앞을 잠시 비추는 것은 지존보가 속세와 인연을 끊는 장소를 보여준다. 동굴 안에는 거대한 여의봉이 세로로 꽃혀있고, 그 밑에는 지존보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다. 지존보 주위로 카메라가 패닝하고 지존보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금강원(손오공의 머리띠)를 앞에 둔 지존보를 비춘다.
그 때, 지존보는 다시 한번 중경삼림의 패러디인 대사를 읊는다. 물론 나오는 음악은 전과 같은 음악이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촬영은 진중한 느낌을 전달하고 ‘돌아올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슬픈 느낌을 표현한다. 주성치의 수많은 영화 중 가장 슬프지 않을까 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지존보는 금강원을 머리에 쓴다. 금강원을 머리에 쓴 지존보를 앞, 뒤에서 클로즈업하면서 카메라는 다시 우마왕의 거처로 이동한다.
4. 다시 주성치
사실 [선리기연]의 아름다운 장면들은 이 말고도 많다. 우마왕 거처가 태양으로 떨어질 때 자하를 구하려 하지만 금강원이 머리를 조여 결국은 자하의 손을 놓치게 되는 장면, 감옥에 갇힌 삼장법사가 뜬금없이 “only you"를 마음대로 개사해 부르는 장면(극 중간에 뜬금없이 뮤지컬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전개 역시 주성치 영화의 반복 중 하나이다.), 극 에필로그에 잠시 등장하는 석양무사의 드라마 등 <선리기연>은 주성치의 영화의 총체 중 하나다.
최근 주성치의 행보는 종전의 B급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발달된 컴퓨터 그래픽을 애용하는 추세이다. <소림축구>로부터 시작된 기술력의 진보는 <쿵푸 허슬>로 이어지고 있고 어쩌면 이제 주성치의 영화에서 예전같은 허접한 특수효과, 인과관계가 부적절한 전개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름의 정서는 기술력의 진보에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주성치 영화를 사랑하는 한 관객으로서의 바람이다.
(가사) 2006.10
매년 초가을 새벽께 눈 비비며
평소엔 입지도 않던 정장을 입고
아직 졸린 눈
깨지도 않은 얼굴로 방문을 가만히 밀면
누가 화낼까 어느새 휘어지게 차려진 과일이며 백숙에 고기산적
아직도 바쁜 주방을 뒤로 하고 차례는 시작된다
술잔 세바퀴 크게 돌리고
저분 탁탁 치면
언제나같이 병풍 뒤에서 5년전 돌아간 어머니 나오신다
오래간만에 온가족 다모여서 그동안 고생밥 맛나게 먹는 시간
실컷 떠들다 문득 맞은 편 보니 어머닌 오간데 없네
아무 말 없이 어디로 가셨을까
혹시 내 옆에 당신은 알고 있나요
꿈에서 본게 아니냐 키득거리며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몇 주 전, 우연히 웹진 weiv의 게시판을 기웃거리다 불싸조라는 밴드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물론 이름은 몇몇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언급되었던 밴드였으나 음악을 찾아서 들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불싸조라는 밴드명과는 약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 참 마음에 들어서 조만간 나온다는 2집에 꽤나 기대했습니다.
결국 며칠 전에 신촌에 들릴 일이 생겨 향뮤직에 갔었는데, 불싸조 2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직원 분에게 물어보니 어떤 앨범을 꺼내주었는데, 불싸조라는 밴드명은 커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습관처럼 그 날 샀던 음반들의 비닐을 찌익찌익 벗기고 커버를 보는데, 불싸조의 음반에는 아무런 음반 소개가 없었습니다. 4p 짜리 거친 질감의 커버 안쪽에는 한두번 봐서는 내용이 감이 잘 안잡히는, 약간 하드하고 불친절한 만화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수록곡의 곡명은 물론 가사는 앨범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음반은 듣기도 전에 이미 불친절합니다. 후에 naver 등에서 검색한 홍보 문구도 '지옥에서 왔다'는 둥 '이성을 시어머니 댁에 둔 것처럼 정신없다'라는 둥, 키치적이고 거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하지만 음반은 생각만큼 아주 실험적이거나 거칠지는 않습니다. 물론 기타 톤은 마샬 앰프의 게인을 그냥 바로 녹음한 듯이 날것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고, 종종 샘플을 사용하며, 드럼은 (특히 빠른 곡에서는) 정신없이 후드리긴 하지만 그 구성은 오히려 클리셰한 기타팝의 정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편입니다.
첫 세곡, 'ㅁㅁㅁ To Fuck' 연작은 충만한 에너지를 전달해줍니다. 포문을 여는 트랙들로 부족함이 없으며, 불싸조 2집을 규정해주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트랙들이 모두 뛰어나진 않습니다. 몇몇 트랙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거나(이 지루함이 근원은 구체적으로 욜라 탱고등을 너무 많이 우려먹었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또 너무 전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몇몇 트랙은 질 좋은 도로를 깜깜한 밤안개 속에서 달리는 느낌을 준달까, 종종 쓰이는 환호 소리 샘플과 함께 충분한 에너지를 줍니다.
모든 곡은 거친 느낌의 드럼, 그 것보다 더 거칠지만 카랑카랑해서 기분좋은 기타, 평범한 베이스와 약간 작게 믹싱된 보컬이 주를 이룹니다. 이는 잘못하면 모든 곡이 거기서 거기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실지로도 사운드에서 곡들은 그다지 인상적인 차이를 내지도 못하고, 전개들도 기타팝의 공식을 따르기 떄문에 많은 차이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싸조라는 밴드는 사실 개성을 가지거나, 곡 스타일이 다양해야 된다느니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샘플링이 많다는 사실이 그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앨범을 처음부터 쭈욱- 한번 플레이시키며 집중해들으면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 혹자는 지루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은 흠뻑 빠질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사람은 당장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팔아치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싸조라는 밴드는 유추해보건데 그런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제 CD 플레이어에서 불싸조는 당분간 계속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로 연극 포스터 붙이던 사내
성균관대 학생도 아닌 것이 대학로에 괜시리 많이 가게 된 것은 아마 대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의 겨울, 대학로 모 처의 술집에서 미팅을 하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소싯적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은 성격은 어느새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하여 영화에까지 도달하였고, 1학년 때 운 좋게도 독특한 취향의 벗들을 많이 사귀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작은 영화’라는 것에도 관심을 가질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많이 데리고 갔던, 지금은 작은 영화들을 많이 상영해주는 ‘동숭 아트 홀’에 발을 들여놓게 된 이후 틈만 나면 대학로에 가서 영화를 한편 보고 가까운 후배들과 밥을 먹거나, 잔을 기울였다. 그 것이 2005년도,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그 짧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목격했던 것은 아마 그 무렵이지 싶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지날 때였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소극장이 밀집되어 있는 대학로답게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혜화역 쪽으로 쭉 걸어나가면 심심치않게 연극 혹은 뮤지컬 포스터를 볼 수 있다. 수수한 낮의 대학로에서 두 명의 남자가 게시판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자 처음 들어온 듯한 사내가 선배로 보이는 사내에게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에는 붙이면 안되지 않나요?” 그러자 선배로 보이는 사내는 말했다. “이 위는 괜찮아.” 남이 애써 붙여놓은 포스터 위에 자기들 연극 공연 포스터를 붙이다니! 라고 혼잣말로 지껄이고 다시 한번 게시판 쪽을 쳐다보았을 때,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문구로 장식된, 당시 잘 나가던 뮤지컬 공연 포스터 위에는 포스터를 덧대고 있는데, 마치 비슷한 사정으로 보이던 투박한 몇몇 연극 포스터 위에는 덧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위는 괜찮아.”라는 말은 뻔뻔함이 아닌 자조였다. 일전에 연극하는 친구와 술한잔 했을 때 들었던 소극장 연극계의 현실은 쉬운 종류의 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자본이 투하된 공연들이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전회매진! 뮤지컬 ㅇㅇㅇ!“라는 선정적인 카피의 홍보 문구와 보도 자료들을 보고 있자하면 아무리 그 계통에 일자무식인 나라도 눈이 가기 마련이다. 마케팅과 자본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규모와 관객 수의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이 위는 괜찮아.“라는 짧은 구절에는 ”우리가 이런다고 이 밑은 그리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경멸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함께 묻어있었다. 불평등한 현 상황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비슷한 처지의 극단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였을까, 덧대면 큰일날 것 같은 소규모 공연의 포스터 위에는 자신들의 포스터를 덧대지 않았다. 그 와중의 작은 미소였을까.
1년이나 지난 날의 짧은 일화를 꺼내보다 문득 현 정부의 과업처럼 추진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자본의 차이, 규모의 차이, 불평등한 현 상황... 많은 것들이 머리를 괴롭혔다. 그리고 “덧대면 큰일날 서민과 농민들을 과연 생각하면서 협상이 이뤄지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자유무역협정에서 작은 미소, 작은 관용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걸까? 오늘도 대학로 앞, 조그마한 공연들의 포스터를 보면 마음이 씁쓸하다.
두려운 반복,
‘반복 학습’의 효과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왜 있지 않은가, 그 유명한 ‘파블로브의 개’. 실험의 요지는 다들 아시다시피 ‘반복이 동물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처음에는 동물에게만 한정했었던 이론을 인간의 영역으로 확장한 이후 반복의 개념은 관점을 막론하고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서 부각되었다.
반복은 양날의 검이라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가져간다. 좋은 면이라 하면 역시 기능성이 높아진다는 면을 들 수 있겠는데,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일을 실행할 때 그 반복하는 횟수가 높아질수록 속도와 정확도가 높아진다. 여담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노동자라 해도 10년, 20년 이상 근속한 노동자에게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에 비하여 나쁜 면 역시 작지는 않은데, 수 많은 나쁜 점들에서 주목해야 될 것 중 하나는 결국 반복이란 행위가 고정관념(streotype)을 양산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고정관념이란 한번 형성되면 다시 새로운 개념을 주입하는 것이 힘이 듦은 물론, 자신도 모르는 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언제서부터 눈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꽤나 많은 TV 광고 뒤에 짧게 붙었던 토막 광고가 있었다. ‘네이버에서 ☐☐☐를 쳐보세요.’ 특히 제품의 성능과 관련된 광고가 아닌 이미지 광고, 혹은 영화 예고편 등에서 많이 활용된 문구였다. 이는 곧 네이버에 어떠한 상품을 검색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증명이며, 거꾸로 뭐든지 자유로와 보이는 정보의 바다에서 실지로는 네이버가 사실상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 순으로 헤게모니가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인터넷 검색 사이트의 역사에서는 야후에서 네이버로 헤게모니가 이동하였다. 2006년 8월 기준으로 대략 70퍼센트 정도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네이버의 검색 엔진은 현재 독점 혹은 야후, 엠파스 등의 기업들과 함께 과독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굳이 단순화 시키자면 대한민국 사람 10명 중 7명이 네이버를 통해서 정보를 찾아다니고, 네이버 뉴스에서 정치-경제-시사적인 이슈들을 확인하며, 네이버 지식인에서 일상적인 지식을 찾아다닌다는 도식이 그려진다. 즉, 네이버적인 사고방식이 고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고의 편의적인 고정이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을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될 문제다.
현재의 미디어 권력 구조 속에서 네이버가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흐름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나갈 수 있음은 자명하다. 아니, 현재도 그러하고 있다. 검색창의 스폰서 링크, 메인 뉴스의 선정, 인터넷 댓글의 의도적 삭제 등. 황우석 박사의 사태, 평택 대추리 사태 등 여러 사회적 이슈에서 네이버의 음모론이 끝임없이 재기되는 배경에는 네이버가 가지고 있는 미디어 권력의 암울한 이면이 항상 존재해왔다. 하지만 매번 이러한 정당한 문제의식은 금새 휘발되기 마련이다. 어쩌랴, 당신이 좋아하는 저 영화 속 주인공이 말한다. ‘네이버에서 ☐☐☐를 쳐보세요’ 라고.
우리 생활의 중심은 어디에 있나요? 교양 과목인 ‘현대 사회와 광고’ 혹은 전공으로 있는 광고 수업등을 듣다보면 교수님들이 수업 첫머리에 늘 반복하시는 어구가 있는데, 바로 ‘현대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 광고는 사람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번은 2호선 신촌 지하철 역에서 괜히 시간을 죽이며 역사를 주욱 돌아다 본 적이 있다. 신촌역에 도대체 몇 개의 광고가 존재하는 지 세어보려고 했는데 결국은 포기해버렸다. 이미 시작부터 소주독에 빠져있던 바, 잘 될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신촌 역사에 막차 시간 다 되어 분주히 제 갈길 가는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 수만큼이나 많을 것만 같던 광고의 개수를 세기란 어지간한 근성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문득 떠오른 교수님들의 클리세한 경구에 동감을 표하지 않기란 더욱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차고 넘치는 현란한 이미지, 사운드, 그리고 엄청난 정보량에 기죽게 되었는데, 그 때문일까,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되었다. 광고라고 예외는 없다. 수도 없이 많은 광고 중에서 우리의 머릿 속에 남아있는 것은 불과 세 네개? 사실은 그만큼도 못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장안에 화제가 되는’ 광고는 마케팅의 효과 역시 만만치 않겠지만 우리 일반 서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활력소가 된다는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2006년, ‘장안의 화제가 되는’ 마케팅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광고단체연합회에서 뽑는 2006 대한민국광고대상에 광고 대행사 TBWA 코리아가 제작한
하지만
누구라도 시간이 난다면, 특히 ‘시간이 금이다’라는 자본주의적 경구에 흡집을 내고 싶은 반항아라면, 한번쯤은 신촌 지하철 역사에서 광고가 몇 개 붙어있는 지 세어보자. 적어도 한번이라도 시도해본다면, 혹시나 정말로 그 많은 광고를 다 세어본다면 분명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바보같은 사람이 되어있을테지만,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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