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결혼 허용, 그리고...
category 靑羊  2015/07/07 17:26

먼저 기사 하나 링크합니다.

 

“사촌과 결혼 관습인데...” 귀화 한국인 혼인무효 위기 (김남일 기자, 20070730, 한겨레)

 

좋든 싫든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시대이기에 위와 같은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누구와 혼인을 해서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고 있고, 이는 우선적으로 특정 사회의 법률과 규범에 문화충돌을 불러올 것입니다. 만약 동성간에 결혼한 사람들이 국내로 이민을 와서 살게 된다면 한국사회는 그들을 법적으로 인정해 줄 것까요? 한국사회가 역동적일지언정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회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가족을 이루는 문제와 관련해서 앞으로 미증유의 문화적 갈등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입니다.

가족법이나 혼인 관련 법률 조항은 잘 모르지만, 부부와 가족, 자녀, 그리고 기타 등등에 관련한 많은 법 조항을 놓고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시점입니다. 바로 어제도 김조광수 부부의 혼인 신고 반려처분 취소 소송 관련 뉴스가 보도되었는데, 소수자들의 인권 증진에 의미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바랍니다. 며칠 전에도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 보수 단체 회원들이 인분을 투척한 모양이던데, 역설적으로 그들이 있어 차별받는 소수자의 정치성이 부각되고, 퀴어 축제가 상업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한국사회는 다른 사회들이 다 변한 다음에 뒤따라 마지 못해 억지로 끌려서 변할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들이 짜놓은 판에 끌려가기만 하여 안타깝습니다. 법적으로 여성참정권을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보다 반 세기 이상 앞서 보장한 것에서 큰 자부심을 느끼듯이 인류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었으면 합니다. 걸그룹의 선정적인 댄스가 아닌 좀 다른 것으로 세계사적인 기여를 해야 할 때입니다. 외국에서는 로봇의 윤리학을 말하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2015/07/07 17:26 2015/07/07 17:26

언제까지 폭로에 의존할 것인가
category 靑羊  2015/06/20 16:02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고, 작금 진행되는 신경숙 작가 표절 사태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폭로에 의해 양심과 성과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까. 2000년대 초 경락의 실체를 입증했다며 마치 큰 혁명이라도 올 것처럼 세간에 이를 알리고 엄청난 연구비를 수령받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경락과 기의 실체를 밝혔다면 한의학은 그 자체로 발전이 시작됐을 텐데도 X-ray 사용 허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민 건강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민 건강을 그렇게 위한다는 한의학계가 어찌 약사들의 한약 취급에는 결사 반대를 했는지, 또 한의학의 큰 혁명을 일으킬 근거를 입증한 지가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어찌 메르스 사태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한지 궁금합니다. 불과 한 달전까지만 해도 뜨거웠던 X-ray 사용 허가 논쟁은 메르스 앞에서 납작 엎드려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를 풍미한 다문화 연구도 그렇습니다. 엄청난 연구비가 인문사회 전 분야에 주어졌고 엄청난 논문과 연구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대중들의 차별 의식과 제도적 문제점의 개선은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동양 철학 고전에도 다문화 관련 내용이 있다며 국가의 연구비를 받아먹은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대중과 소통했단 말입니까? 읽히지도 않고 그냥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그 많은 연구 결과물들은 학자들의 연구 업적 집계용일 뿐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 연구비들은 대학과 학계의 권력자들이 학문 후속세대들에게 갑질하기 위한 근거로 쓰이지는 않았는지 냉정히 되돌아봐야겠습니다.

국가의 예산이 들어가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특히나 연구와 창작 관련해서는 전문 분야이다 보니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평가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가를 하려고 해도 끼리끼리 뻔한 얼굴들이 서로 좋은 평가를 내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치 문학평론계의 고질병인 ‘주례사 비평’처럼 말입니다. 또 평가를 해주는 사람들은 소위 권위자들이다 보니 연구비(또는 창작 지원금)를 신청하거나 그 결과물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열세에 처하게 마련입니다. 이래서는 연구나 창작이 질을 담보하여 자유롭게 진행될 수 없습니다.

이 오래된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개혁해야 합니다. 이것은 줄어드는 정부 살림의 문제이며 동시에, 우리 세금의 문제입니다. 질에 대한 평가는 구렁이 담 넘듯 하면서 정량적으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첫째, 각각의 연구비(창작 지원금 포함) 중 약 30% 이상을 검증비로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 검증 위원들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하고, 그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중징계를 해야 합니다. 셋째, 검증 위원회는 권위자와 신진 연구자들을 동수로 구성해야 하며 모여서 회의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신진 연구자들을 넣어야 하는 이유는 최신 연구 성과를 익힌 사람들이지만 아직 학계에 확고한 위치와 인적 네트워크가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만큼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검증을 제대로 못하면 그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합니다.이처럼 검증은 연구비를 지원받는 각 프로젝트의 예산 일부로서 편성하여 신진 연구자들에게는 연구비 수령 못지 않은 소득원이 되어야 연구자들이 연구비 수령에만 목 매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학의 연구교수라는 것이 실은 연구비 신청하러 다니는 앵벌이잖습니까.

검증해야 할 것은 연구 윤리, 표절, 조작, 성과의 질적 수준 등등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까지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고 연구비를 수령한 쪽에서 대충 서류 꾸며서 제출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전공도 아닌 사람들이 연구비 때문에, 윗사람들 때문에 일을 떠앉는 구조였습니다. 한식 세계화 운운하며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그래서 우리 식품회사들이 전 세계로 한식을 팔아치우고 있지도 못한데, 그에 들어간 예산은 결국 우리 주머니에서 나갔습니다. 그런 일은 감사원이 그나마 처리할 수 있습니다만 연구나 창작 관련 지원금의 경우는 질적 평가를 관료들이 할 방법이 사실상 없으므로 여기저기서 줄줄 샌다고 보면 됩니다. 그걸 이제는 막아야 합니다.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기에 제도로 사람을 몰지 말아야 하지만, 제도 자체가 미흡하다면 제도를 당연히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해나간다면 반대로 규제를 줄여야만 합니다. 법과 제도가 단순할수록 자유가 늘기 때문이죠.

신경숙 표절 의혹의 건만 하더라도 출판사측에서 자체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익명으로 추상같은 검증을 했더라면 일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걸 해야 하는 이유는 이제 저작권과 그에 따른 손해 배상이라는, 전과는 다른 문제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검증을 통해 그런 문제에 대비하지 않으면서 세계로 나아갔다가는 외국에 돈만 퍼주는 호구가 될 것입니다.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락과 봉한학설이 입증됐다면서도 한편에서 한의원이 계속 망해나가는 현실은 결국 10여 년 전의 떠들썩한 보도가 진실성 부족한 연구에 기반했던 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할 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는 국가가 구상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합니다. 연구비 뿐만 아니라, 잘못 집행된 각종 예산들에 대해서는 애초에 계약서에서부터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야 합니다. 세수가 줄었다고 투정하지 말고 기업의 법인세와 그들이 할인 받는 공공요금 등등을 합당하게 올리고 줄줄 새는 각종 예산들을 엄정히 감시해야 합니다. 아마 10년 후에는 이런 일들이 적극 논의되기 시작할 겁니다. 국가 경제가 버티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5/06/20 16:02 2015/06/20 16:02

표절 감싸는 문단 권력
category 靑羊  2015/06/18 19:33

먼저 기사 하나 링크합니다.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도 표절? 문인들 견해 엇갈려 (권영미 기자, 20150618, 뉴스1)

 

문학에 문외한이라도 수긍할 만한 표절 의혹을 받는 해당 소설가의 작가 윤리 뿐만 아니라 그녀를 감싸고 있는 일부 문인들과 거대 출판사의 작태가 너무나 어이없습니다. 아니, “만들어지는 데에 엄청난 공이 든, 세계에 알려진 우리 귀한 작가를 배려하자”니요? 결국 국익을 위해 황우석 사건을 덮자던 맹목적인 애국 네티즌들과 다를 바 없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맥을 잇는 단체의 사무총장이라는 사실이 표절보다도 더 참담한 심정입니다.

그의 말은 마치 우리 경제에 끼친 공로가 있으니 기소 유예하겠다는 것과 익숙한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것이 세상 이치인지라, 이런 식의 논리는 우리에게도 좋은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한국 사회에 일익을 담당한 만큼의 죄는 짓고 살아도 떳떳하게 살아가게 해줍니다. 그들이 잘나신 것은 우리가 못난 척을 해줬기 때문이고, 그들이 부자인 것은 노예를 낳아서 노동 착취 당해줬기 때문입니다. 봉의 입장에서 같은 제품을 외국보다 비싼 값에 소비 해줬고 세금도 내줬습니다. 선거 때는 열심히 투표도 해줬으며 군대도 가줬지요. 자, 이제 우리도 한국사회에 기여한 만큼 우리 맘대로 살아갑시다. 이 사회의 존립에 기여한 만큼의 죄는 지어도 되는 겁니다.

더 황당한 것은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출판 권력 창비의 같잖은 입장 표명입니다. 소설 전체에서 큰 의미도 없는 부분을 거론하며 표절 운운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표절은 큰 의미 있는 부분을 베꼈느냐로 결정된다는 그 논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돈 문제와 권력욕이 결합되어 있음을 눈치 채기란 창비 덕에 잘 배운(?) 우리들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창비 말대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부분조차 표절을 했다면, 그런 실력 없는 작가를 “엄청난 공을 들여” 세계에 내보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앞뒤 안 맞게 허둥대는 모습이 아몰랑 정권과 똑같군요.

외국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도 겁없이 베꼈는데, 과연 해당 작가 본인이 심사한 수많은 응모작들에서는 안 베꼈겠는가라는 인터넷의 어느 댓글이 사무칩니다. 기업들로부터 무슨무슨 공모전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의 아이디어를 거저 주워먹는 짓거리들을 겪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문인보다 더 실감 나는 상상이 떠오를 법합니다. 사안은 다른 문인들에게까지 번져갈 것 같습니다. 벌써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프랑스 작품의 표절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으니, 아마 이번 사태는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김지하의 건이야 오래 전이라 치더라도, 최근의 경우에는 표절을 인정하는 순간 양심 문제에서 저작권 소송과 배상 문제로 질이 바뀌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도 이런 문제가 터진 배경에는 등단 제도라는 독특한 진입 장벽을 내세워 안주하는 문단의 기득권, 권위에 약한 대중, 상품성 있는 작가에 비굴한 업계의 상도덕 등이 얽혀있을 것입니다. 대중은 잘 모를 것이라는 교만함은 책을 많이 읽으면 대단한 지식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표절 문제가 특정 작가 1인에서 끝날 문제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예상했듯이, 예전부터 파다하게 알려져 있던 일이 마침내 불거졌다거나 얼마나 갑질이 심했으면 폭로를 했겠냐는 반응들이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득권과 비양심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딸은 어머니를 증오하지만, 어머니를 닮는다”는 격언처럼 권력을 닮아버린 우리 지식인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 상황이어서 더욱, 그리고 솔직히 흥미진진합니다. 우리 사회는 서구 사회와 달리 계몽(enlightenment)의 시기를 못 거쳐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6ㆍ8세대나 미국의 히피 세대처럼 기성의 권위에 도전한 세대가 없습니다. 권력에 도전해서 민주주의를 이뤘다고는 하지만 계몽 없이, 권위에 대한 도전도 없이 내용 없는 새로운 사회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들이 권력이 됐다는 사실에 애써 눈을 돌린 듯합니다. 우리에게 성찰을 말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입니다.

동구권이 몰락하고 한 세대가 지나자 서구권이 몰락했습니다. 이 땅에서도 독재정권이 종식된 지 한 세대가 지나면서 그 맞은 편에 섰던 ‘또 다른 꼰대’가 비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고 내일을 만들 새로운 생각들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미시권력과 일상의 영역에서 생활의 정치를 해나가야 하는 시대이므로 그에 맞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일어나야 하고, 기존의 모든 권위와 익숙한 생각들과는 단절하려는 투쟁, 즉 사고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백마 탄 초인이라 생각합니다.

 

2015/06/18 19:33 2015/06/18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