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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그 피폐한 똥꼬라니.

  • 등록일
    2005/06/10 11:24
  • 수정일
    2005/06/10 11:24

아침에, 한겨레신문에 끼워져있던 『한겨레 18.0』을 뒤적이다,  '평화고대' 희망이지만 허망하다.란 제목에 혹해, 어떤 미친놈이야 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필자가 김어준이라는걸 뒤늦게 깨닫곤, 더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일명 5.2 사태 '평화고대'의 출현에 대하여 김어준은

그들이 '기분 나쁘다'는 원초적인 개인적 감정에서 시작해 총학을 탄핵하는 정치적 행위로까지 나간 것에 대하여, 므흣하고 귀엽다고 한다. 왜냐.

 

'개인의 분노가 유예도, 포기도 되지 않고 거대한 시스템 자체를 문제제기 하는 데까지 나갔다는 점에서, 본질적 의미의 정치가 구현되는 장면이다. 이게 원시적 의미의 민주요. 정치다.

기존의 권력 상징과 그 작동 방식을 급속히 해체한 IMF(국제통화기금)와 인터넷이 열어 낸 신세계. 쥐뿔도 모르는 수습이 조직 위계를 간단히 점프해 사장에게 메일을 보내고, 울릉도 고삐리가 서울의 대통령이 직접 보는 게시판에 글을 쓴다. <평화고대>는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시대의 산물이다. 이제, 개인 정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당위나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적 동인으로 충분하다 인식하는 세대의 등장으로. 이건 희망이다.

 

이기 때문다.

 

갖다 붙이기는..

물론 이후 김어준은 그들이 조직의 담론으로 무장할 논리와 수사가 없는 관계로 그들의 분노가 지극히 개인적인것에 아직 머물러 있기 때문에 허망했다고 한다.

물론 나도 김어준과 마찬가지로 요즈음의 정치성의 부재에 대하여 그 못지 않게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명확히 구분해야 할 것은 구분해야 한다.

평화고대는 희망과 허망을 동시에 드러낸 사건이 아니라, 허망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당위나 이념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실천. 발런티어리즘은 단순히 나쁨이라는 사적 감정이 직접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요체가 아니다. 개인의 사적 동인이 사회적인 맥락에서 재구성되어 자발적인 행동까지 발현되는 사회화 과정이 요체이다. 쥐뿔도 모르는 수습이 사장한테 메일 띡띡 보내는 행위 자체만으로 자발적인 실천이니, 개인 정치의 시대는 씨부리는건 허망한 이데올로기일 뿐이요. 천박한 노빠들의 자기 치장에 다름아니다. 이 딴지스러움이라니.   

 

평화고대는 5.2사태 시위를 주도했던 학우들의 취지는 이해하나, 폭력적 고대라는 인식이 퍼져나가는 것에 분개하여 총학을 탄핵한다고 했다. 정말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그들의 가장 큰 죄악은 스스로에 대하여 솔직할 주변머리조차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분나쁜 것은 아마도 시위가 아니라, 삼성에 과잉충성하는 언론에 의해 호도되는 여론과 그런 여론에 개거품 무는 찌질이 네티즌들 때문일 것이다.

아마 자신들의 맘 상함이 어떤건지도 모르는. 또 심지어 쪽팔린 줄도 모르는 찌질이들이, 어디서 평화를 씨부리는지. 평화? 난 이 친구들이 차마 도대체 이 단어를 쓸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더구나 그런 찌질이들더러 개인 정치의 시대니, 어쩌구 갖다붙이는 몰염치는 더욱 커다란 죄악이다.

 

김어준 제발 그놈의 똥꼬소리는 이제 그만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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